경기도. 인천

인천, 부천 지역 능원묘답사1-지명의 유래

큰누리 2012. 6. 7. 01:47

이번 답사는 가까운 부천, 인천지역이어서 최근 들어 가장 많은 양의 답사를 했다. 먼 곳은 차로 이동하니 반쯤은 드라이브하는 기분이 들고 몸도 가벼운 편인데 가까운 곳은 답사량이 많아서 집에 돌아올 때 쯤에는 몸이 파김치 상태였다.

특이한 점은 답사한 묘와 지명의 관련이 유난히 많다는 점이었고 현재는 묘가 도심 외곽에 있기는 하지만 바로 곁의 불도저나 포크레인, 혹은 이미 파헤쳐진 개발현장들을 볼 때 과연 몇 년이나 더 유택들(정확히는 후손들)이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 곳이 대부분이었다.

 

첫번째 답사지는 성종의 서녀와 그 배필인 부천 작동의 경숙옹주-민자방 묘역, 바로 묘 앞에서 불도저로 땅을 파고 있었다. 사진 가운데의 황토는 우리 일행이 그 공사장의 황토를 밟고 지나면서 남긴 자국이다. 조만간에 산자락이 잘려 이 묘역 앞으로 길이 날 것이다. 

 

 

<부천 작동의 경숙옹주-민자방 묘역>

 

 

<부천 작동의 경숙옹주-민자방 묘>

 

 

<귀인 조씨와 딸인 화유옹주 묘가 있는 부천 작동의 효령대군 사직공파 선영 >

귀인 조씨는 영조의 후궁인데 정조 2년에 숙원에서 귀인으로 품계를 올려받았다. 그게 가능했던 것은 귀인 조씨와 정조가 개인적인 좋은 관계가 있었거나 종친, 혹은 조씨문중의 청원(?)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정조는 왕위에 오르고도 주변사람들의 정치적인 야심 때문에 편한 잠조차 못잔 분인데 조귀인의 사후에 묘 앞을 지나면서 특별히 배려한 전언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묘가 효령대군파 선영에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 궁금했다.

 

 

<부천 작동 효령대군 사직공파 선영의 귀인 조씨와 딸인 화유옹주부부 합장 묘>

 

 

<부천 고강동, 공장공 변종인선생 묘역 입구의 우물 청수정과 밀양 변씨 종가>

공장공 변종인 선생은 조선초기 무인이며, 이곳은 옛지명이 고리동(고리울) 강장골이었다고 한다. 지명의 흔적은 인근에 있는 '고리울초등학교'에 남아있다. 후손인 수주 변영로 선생묘와 시비가 묘역 안에 있는데 인근에 '수주초등학교'도 있다.

 

 

<부천 고강동, 조선초기 무인인 공장공 변종인선생 신도비 비각>

고강동의 상징일 수 있는 비행기가 보인다. 인근의 신월동과 더불어 비행기 소음이 가장 큰 지역이다. 이 묘역에서 특이한 점은 문인석의 목들이 거의 없다는 점인데 오래 전에 누군가가 고의로 목을 없앤 흔적이 역력하다. 

 

 

<부천 고강동, 조선초기 무인인 공장공 변종인선생 묘역에서 본 하늘>

 

 

<부천 고강동, 조선초기 무인인 공장공 변종인선생 묘역의 수주 변영로 선생 시비>

 

 

<구로구 궁동의 정선옹주, 권대임 묘역 안내판>

부마도위 품위 유지를 위한 녹봉도 거절할 정도로 검소한 분이었다는데 물려받은 재산이 많았는지 집이 궁궐 같아서 '궁동'이란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할아버지인 권협선생과 부마인 권대임선생의 신도비가 제대로 남아있고 다른 묘비들도 보존상태가 좋아 조선 초기의 묘지제도를 알 수 있는 중요한 곳이라고...

 

 

<구로구 궁동의 정선옹주, 권대임 묘역의 권협선생 신도비>

권협선생은 조선초기의 문인으로 정선옹주의 배필인 권대임의 조부이다. 서서울생활고학고와 구로여자정보산업고등학교 사이에 묘역이 있다.

 

 

<구로구 궁동의 정선옹주, 권대임 묘> 

 

 

<구로구 궁동의 정선옹주, 권대임 묘역의 권대임선생 신도비>

 

 

<점심을 먹은 부평 삼산동의 '짬뽕의 신화'에서>

레이디 퍼스트, 경로우대를 실천한 남성분들이 당당한 폼(?)으로 통로에 서서 순번을 기다리는 중. 이 곳 짬뽕의 홍합을 까먹는데 9분이 걸렸는데 짬뽕 속에서 홍합 2개가 더 나왔다!

 

 

<인천 서구 석남동의 조서강선생 묘>

조선 초기의 문인인데 이분의 호가 '가정'이고 인근에 가정동이 있다. 묘가 참 단아했고 조선 초기의 묘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인천 서구 석남동의 조서강선생 묘 후경>

여말 선초의 묘라면 후면도 다른 3면처럼 기대석이 있어야 하는데 사진 오른쪽에서 보이는 것처럼 후면의 기대석이 보이지 않는다. 봉분의 흙이 무너져내린 것이라고... 하지만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기억에 남는 '단아한 묘'이다.

 

 

<류사눌선생의 묘가 있는 인천 서구 경서동의 문화유씨 묘역>

 

 

<인천 서구 경서동의 문화유씨 묘역의 류사눌선생 묘>

선생은 조선 세종 때 예문관대제학으로 재직하면서 박연과 함께 아악정리에 크게 기여한 분이라고... 햇살가득님의 인상에 남았다는 8등신상 문인석이다.

 

 

<인천 서구 경서동의 문화유씨 묘역의 류사눌선생 묘>

햇살가득님이 문인석에 반하긴 반한 모양이다. 일부러 찍은 건 아니고 내 사진에 햇살가득님이 끼인 것이다.^^ 하지만 지금 찍는 것은 중앙의 새끼 문인석인데... 이 곳엔 망주석은 없고 문인석(내 기억으론)만 수평선 상에 2중으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