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국립중앙박물관 야외 전시물과 연복사탑 중창비

큰누리 2012. 9. 8. 23:36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을 제법 드나드는 편인데도 야외 전시물은 제대로 볼 기회가 없었다. 야외 전시물도 본관 오른편의 부도가 전부인 줄 알았고... 집합 장소가 매표소인데, 매표소가 지금도 있었나? 무료 입장으로 바뀌고도 인원 체크를 위해 한참은 더 남아있던 매표소는 없어졌다. 다시 집결한 곳은 호수(거울못) 가운데 있는 청자정.

 

1시간 반 넘게 청자정에서 이순우선생님의 사전 설명이 있었는데 염천의 날씨에도 아주 시원했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골짜기의 개울마다 정자를 지었나보다. 청자정에서 설명을 마칠 때까지도 거울못 뒤편의 무성한 숲이 야외 전시장이란 걸 몰랐다. 토종 야생화와 소나무, 개암나무 등이 어우러진 숲으로 들어서니 그제서야 도록에 수록됐던 탑들이 보였다. 보물들이 바로 거기에 숨어있었다! 이곳의 탑(국립중앙박물관야외 전시장)들은 주로 일제가 1915년에 조선물산공진회(요즘의 박람회)를 개최하면서 전국에 있는 탑들을 모아 전시했던 것들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국립박물관에 남아있는 것들이다.

 

 

<거울못과 청자정>

일행들이 설명을 듣고 있는 게 보인다. 청자정(거울못) 뒤쪽의 숲이 바로 야외 전시장이다. 

 

 

<청자정을 나와 처음 마주한 김천 갈항사 터 동서 3층석탑>

통일신라기, 쌍탑 1금당식 배치로 추정되는 갈항사의 탑들. 동탑 기단부에 새겨진 글로 신라 경덕왕 17년(758년)에 영묘사 언적법사 3남매가 만든 것을 알 수 있다.

 

 

<탑들과 기타 석물들이 전시된 석조물 정원>

왼쪽으로 홍제동 5층석탑과 원주 영전사(영천사) 보제존자 사리탑이, 오른쪽으로 여주 고달사 터 쌍사자 석등과 원주 천수사 5층석탑이 보인다. 

 

 

<홍제동 5층석탑>

옮길 때 그대로의 모습이라는데 기단이 없어서 부담스러워 보인다.

 

 

<여주 고달사 터 쌍사자 석등>

우리나라에 3기 밖에 없다는 쌍사자 석등이다. 조형이 무척 아름답다. 지붕돌이 없어진 줄 알았는데 2010년에 고달사를 발굴하면서 지붕돌을 찾아서 얹었다. 

 

 

 

<원주 천수사 3층석탑>

이순우선생님에 의하면 이 절의 소재지는 천수사가 아니라 영천사(가마지절터)라고 한다. 

 

 

<원주 천수사 5층석탑>

이 탑도 원주에서 옮겨왔지만 천수사 탑이라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고...

 

 

<원주 영전사 터 보제존자탑>

보제존자는 고려 말의 나옹화상을 지칭, 탑속에서 나온 탑지의 기록으로 고려 우왕 14년(1388)에 건립된 사실이 확인되었다. '영전사'는 '영천사'의 와전이라는 게 이순우선생님의 주장이다. 

 

 

<이천 안흥사 5층석탑>

탑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측한다.

 

 

 <개성 남계원 7층석탑>

11세기에 세워졌고 탑 속에서 고려 충렬왕 때(1283년)에 넣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쪽물을 들인 종이에 은물로 쓴 경전 7축이 발견된 국보이다. 일제 때 전시를 위해 옮겨온 까닭에 개경에 있어야 할 이 남계원탑이나 경천사탑이 다행히(!) 남한에 있다. 

 

 

<양주 온녕군 석곽>

온녕군은 태종의 7자.

 

 

<조선시대의 석양> 

 

 

<파주 태실 석함>

태실은 왕족의 태를 항아리에 넣어 길지에 보관한 것이다.

 

 

<조선시대의 문인석> 

 

 

이 불상은 '부처'라고만 써있었는데 자세가 꼭 '국기에 대한 맹세'를 왼손으로 하는 수인이어서 일행들은 신기해하며 '애국 불상'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보물 제2호 보신각종>

원래는 조선 세조 때 만든 원각사 종이었다. 절이 없어진 후 여기저기 떠돌다 광해군 때 보신각에 옮겨져 파루와 인정에 도성문을 여닫는 것을 알리는 종으로 사용되었다. 종의 보존을 위해 이곳에 옮기고 보신각에는 새로운 종을 달았다. 

 

 

<북묘 비>

관우를 기리기 위해 고종 20년(1883)에 명륜동 흥덕골(송시열 집 터)에 세운 것으로 현재는 터만 남아있다. 지붕돌 안쪽에 먹물 선까지 그대로 남아있을 정도로 비의 보존상태가 무척 좋다. 오른쪽에서 첫번째 한자와 두번째 한자가 똑같은 묘(廟)인데 반복을 피하기 위해 다른 모양의 '묘'를 쓴 것이라고.  

 

 

<나주 서문 석등>

간주석에 고려 선종 10년(1093)에 만들었다는 글이 있다. 원래의 불발기집(화사석)과 꼭대기 장식은 없어져서 새로 만들어 넣은 것이다.

 

 

<개성 현화사 석등과 배례석>

석등도 독특하고 배례석도 그렇다. 석등 앞에 배례석이 있을 정도면 그 뒤의 존재는 얼마나 존경 받는 대상이었을지?  

 

 

 

 <원주 거돈사 원공국사 승묘탑>

지난 4월 7일에 능원묘 답사를 갔을 때 본 여주 고달사와 더불어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던 거돈사 터 승묘탑이다. 11세기 고려 때 만들어졌다. 승묘탑과 짝인 원공국사 승묘탑비는 현지에 양호한 상태로 남아있다. 내가 본 탑비들 중에서 보존상태가 특히 양호했고 양 머리 같기도 하고 어룡 같기도 한 받침돌 거북상이 기억에 남는다.

원주시에서 현지의 탑비와 짝인 이 승묘탑을 돌려달라고 여러 차례 요구했지만 결국 이곳에 이렇게 남게 되자 모사탑을 원 위치에 세워놓았다. 

 

 

<원주 흥법사 진공대사탑과 석관>

통일신라 신덕왕과 고려 태조의 왕사였던 진공대사의 묘탑이다. 옆의 석관으로 미루어 고승을 화장 뿐 아니라 매장도 했음을 알 수 있다. 원주 흥법사터에 이 탑과 짝인 탑비 중 머릿돌과 받침돌이 남아있는데 크기도 엄청나게 크고 보존상태, 작품의 질도 훌륭하다.

 

 

<양평 보리사 대경대사 현기탑비>

통일신라 말에서부터 고려 초에 활동한 대경대사의 업적을 기록한 탑비이다. 비 받침돌의 머리가 거북이에서 용으로 넘어가는 단계의 작품이다. 사진으로 멀쩡해 보이지만 옆에서 보면 전시된 탑비 중에서 파손상태가 심각하다. 

 

 

<창원 봉림사 진경대사 보월능공탑>

통일신라 말 선종 봉림산문을 세운 진경대사의 탑비이다. 

 

 

<원주 흥법사 터 염거화상탑>

탑지가 남아있어 통일신라 후대(문성왕. 844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선종 가지산문 2대 선사인 염거화상을 기리기 위한 승탑으로 후대의 팔각 승탑의 표본이 되었다.

4월 7일의 능원묘 답사에서 본 흥법사는 원래는 엄청난 규모의 절이었다는데 남아있는 절 터는 상당히 좁았다. 현지에 단아한 3층석탑과 돋을새김이 아름답고, 힘찬 거북이와 용의 모습이 돋보이는 진공대사 탑비 중 받침돌과 머릿돌이 남아있다. 염거화상탑이 흥법사에 있었다고 전해진다고 하니 흥법사는 유명한 고승들의 교육 장소?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오른쪽의 야외 전시장>

이곳에는 주로 탑비(부도)가, 오른쪽 뒤의 숲에는 탑이 주로 전시되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내부의 제천 월광사 원랑선사 탑비>

통일신라 후대의 고승 원랑선사의 일생을 기록한 탑비이다. 왜 실내에 전시하는지 모르겠다. 석비의 재료가 공해에 약한 것인가? 탑비의 오른쪽 뒤쪽 모서리에 직사각형으로 도려낸 것 같은 부분이 있다. 

 

 

<개풍 경천사 13층석탑>

고려 충숙왕(1348년) 때 만든 대리석 13층 석탑이다. 섬세한 아름다움 때문에 1907년 일본 궁내대신 다나카에 의해 밀반출되었다가 영국 언론인 E.베델과 미국 언론인 H.헐버트의 노력으로 1918년에 되돌아왔다. 유물(혹은 유적)도 미모가 탁월하면 여정이 순탄치 않은가 보다. 

경복궁 야외에 복원되었다가 대리석이라는 특성 때문에 산성비와 풍화작용으로 손상의 우려가 높아 1995년에 해체되었다가 2005년에 이곳 실내에 다시 복원하였다.

 

 

 

<용산 철도회관의 연복사탑 중창비>

보너스이자 마지막 코스인 이걸 보러 갈 때쯤 일행들이 모두 지쳐서 반 정도만 따라갔다. 나도 땡볕에 지쳐서 갈등이 생겼지만 '몹쓸 놈의 호기심' 때문에 결국 동행했고 결론은 조금 실망스러웠다. 비는 없고 머릿돌과 받침돌만 있다. 용머리는 그렇다쳐도 거북 모양의 몸이 너무 도식적이란 느낌이 들었다. 용 모양의 머릿돌도 뒷면을 보니 시멘트를 발라놓은 것 처럼 다소 무성의한 느낌이 들었고...

 

철도회관의 안쪽 모퉁이에서 소나무와 관목에 가려져 더욱 초라해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뒤늦게 우리가 온 걸 안 건물 관리인은 허락없이 들어왔다고 화를 냈다. 사전 허락없이 들어간 것은 물론 우리 잘못이지만(문은 분명히 열려있었다), 무성의하게 처박아 놓은(?) 문화유산을 애써 찾아온 사람들이니 오히려 고마워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게 내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