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경복궁 담장길 따라 역사의 흔적을 찾아서3

큰누리 2013. 4. 10. 02:18

<3차 답사경로>

국립민속박물관 정문(광화문 이전 위치) → 중학천 돌다리(장생전교, 건춘문 앞 다리, 십자각교) → 건춘문(경복궁 동문) → 어구(금천 수문) → 동십자각 → 광화문 육조 앞길 → 목은선생 영당

 

 

<국립민속박물관 정문(일제 강점기 때 광화문 이전 자리)>

이곳에 1927년 일제에 의해 이전된 광화문이 1968년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때까지 40년 가까이 있었다. 일제가 이곳으로 광화문을 이전한 이유는 이곳과 경회루가 일직선 상에 있었기 때문인데 당시에 경복궁의 전각들이 대부분 헐려 나간 상태에서 경회루와 이곳으로 옮긴 광화문을 일직선으로 배치한 후 양편으로 야외전시물을 늘어놓기 위함이었다. 그 목적에 충실하게 광화문은 1929년 조선박람회 때 출입구로 이용되었다.

1968년에 광화문은 콘크리트로 바뀌어 원래 위치로 돌아갔지만 일제가 광화문을 옮길 당시에 변형한 담장이나 공간배치는 복구되지 못하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중학천의 돌다리(장생전교, 십자각교)>

경복궁 동쪽을 따라 흐르던 하천을 중학천이라 하는데 1965년 복개공사로 인해 지금은 흔적을 찾기 어려운 상태이다. 건춘문 앞 중학천에 있던 돌다리를 장생전교라 불렀는데 다리의 위치가 장생전(長生殿) 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장생전은 국왕과 왕실에서 쓰던 관곽(棺槨)인 재궁(梓宮)과 동원비기(東園秘器)를 만들어 관리하던 기구이다. 국왕의 관(棺)은 재궁이고 왕족과 종친의 관(棺)은 동원비기(東園秘器)이다. 국왕은 재상이나 공신이 죽으면 동원비기의 남은 판재인 동원부기(東園副器)를 하사했다. 사진에 장생전교 아래에서 빨래를 하는 여인들이 보인다.

 

 

<중학천의 다리들(건춘문 앞 다리와 십자각교)>

장생전교 바로 아래 건춘문 앞에 돌다리 하나가 더 있었는데 명칭이나 유래는 알려지 있지 않다. 좀 더 아래 동십자각 옆에 있던 다리는 십자각교로 그 아래쪽에 있는 중학교와 더불어 안국동, 창덕궁 방향으로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였지만 지금은 복개되어 모두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경복궁 동쪽 담장을 따라 중학천이 흐르고 그 위로 장생전교, 건춘문 앞 다리, 십자각교가 차례로 늘어선 구조이다.

 

 

 

<경복궁 동장(東墻)문 건춘문>

 

 

 

<어구(금천 수문) 앞에서 본 경복궁>

 

 

<어구(금천 수문)를 경복궁 안에서 본 모습과 밖(아래 아래 사진)에서 본 모습>

현재의 경복궁 남쪽 담장은 2010년에 새로 지은 광화문과 더불어 땅속에 파묻힌 부분을 기초로 하여 재건되었으므로 비교적 원형에 가까운 모습이다. 이 담장 동쪽 끝부분에 있는 구조물이 어구(금천 수문)이다.

썩은다리(서금교, 석은교)에서 흘러내린 물길은 경회루 앞과 영제교를 지나 이 수문을 거친 후 중학천으로 합류하고 청계천 물길이 되었다가 다시 한강으로 합류한다. 

 

 

 

<경복궁 동쪽 망루 동십자각>

동십자각은 1923년 일제의 전차 부설공사로 사라져버린 서십자각의 반대편에서 용케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지만 몰골이 말이 아니다. 동, 서십자각은 경복궁 전면의 동, 서쪽에 설치된 망루이므로 원래는 경복궁 안에 들어가 있어야 맞다. 하지만 서십자각은 1923년에 사라졌고, 1929년에 일제에 의해 개최된 조선박람회 때 입구가 현재의 국립민속박물관 정문으로 옮긴 광화문이었는데 관람객들이 입구로 들어가는 시점인 동십자각 부근이 협소하다는 이유로 궁궐 담장을 완전히 허물어서 지금의 섬처럼 남은 것이다.

 

 

<경복궁 둘레길 출발점인 광화문으로 다시>

13:00부터 시작한 15차 특별답사 경복궁 담장길 따라 역사의 흔적을 따라서는 예정대로 5시간 만인 18:00에 끝났다.

 

 

<광화문 앞 육조 앞길>

이 길은 조선시대에는 광화문전로, 경복궁전로, 경복궁대로, 육조전로, 육조대로로 불렸고, 일제 강점기에는 광화문통, 현재는 세종로로 불린다. 육조 앞길은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의 진입로이자 전제군주 왕권을 상징하는 공간, 모든 정치활동의 중심지였다. 경복궁을 창건하면서 경복궁 앞의 이 길에 의정부, 삼군부, 육조, 사헌부 등의 관청이 나란히 배치되었다. 광화문 남쪽 동편에는 의정부-이조-한성부-호조가, 서쪽에는 예조-중추부-사헌부-병조-형조-공조-장예원이 배치되어 그 체계가 그대로 유지되었다.

 

1863년에 고종 즉위 후 경복궁을 재건하면서 삼군부를 재건하였는데 이 때 육조 앞길 관아 배치가 크게 바뀌었고 1894년 갑오개혁 때 중앙관제가 전면 개편되면서 조선 건국 때부터 존속했던 육조가 폐지됨에 따라 육조 앞길도 거의 해체되었다. 

일제에 의해 경복궁에 조선총독부가 들어서면서 육조 앞길은 광화문통으로 바뀌고 새로운 지번이 부여되었다. 현재의 이 길과 주변에 들어선 관청은 일제가 남겨놓은 관청 배치와 구역 재조정을 따른 결과물이다. 

 

 

<조계사 서쪽의 목은선생 영당>

공식적인 답사는 광화문 앞 육조 앞길이 끝이다. 이 곳은 답사를 마친 일부 회원들이 저녁 식사를 하러 가는 도중에 들른 것이다. 목은 이색선생 영당은 비공개이기 때문에 내부를 볼 수 없지만 영정을 안치한 것으로 추측한다.

목은선생 영당과 조계사 사이는 몇 발자국을 앞에 두고 용동궁 터, 중동학교 옛터, 천도교 보성사 터, 신흥대학 옛터, 고희동 활동 장소, 매일신보 창간 사옥 터 등이 밀집되어 있다.

 

 

<저녁을 먹은 새마을식당 체인점의 메뉴>

볶은 김치를 밥에 올린 후 김 가루를 섞어 비벼먹는다. 간단하지만 가격이 저렴하고 맛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