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경복궁 담장길 따라 역사의 흔적을 찾아서1

큰누리 2013. 4. 7. 00:56

 

 <1차 답사 경로>

광화문과 해태상→ 서십자각→ 통의동 백송(창의궁 터)→ 영추문→ 대루원 터(매동보통학교 터)→ 적십자사 터→ 석은교(썩은다리)→ 진명여고 터→ 추성문과 신무문→ 경무대(융문당과 융무당)→ 춘생문 터→ 광화문 이전 터(국립민속박물관 정문)→ 중학교 돌다리(장생전교)→ 건춘문→ 종친부 터(규장각)→ 동십자각(십자각교)→ 어구(금천 수문)→ 육조 앞길

 

-≪경복궁에 대한 개요≫-

경복궁은 조선 건국(1392) 후 한양으로 천도(1394)를 하면서 태조 4년(1395) 9월에 완공한 법궁이다. 경복궁 앞으로 육조관아가 들어섰고, 임진왜란 때 궁궐이 소실되었지만 육조의 기능은 대체로 유지되었으므로 경복궁 주변과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은 정치권력의 핵심적인 공간이었다. 경복궁은 정남향이 아니라 약간 서쪽으로 방향을 튼 채 건립이 되었는데 그 이유는 백악산에서 내려오는 지세의 흐름을 맞춘 때문으로 보고 있다. 거기에 일제가 경복궁 안에 조선총독부를 건립할 때 방향을 튼 바람에 경복궁의 중심축과 육조 앞 도로축이 크게 어긋나게 되었다.   

 

 

<세종로 1번지 광화문과 해태(해치)상>

해태(해치)는 몸 전체는 비늘로 덮여 있고, 머리에는 뿔, 목에는 방울이 달려 있으며, 겨드랑이에는 날개를 닮은 깃털이 있는 전설 속의 동물이다. 해태(해치)는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싸우거나 정직하지 못한 사람을 보면 응징한다고 한다. 따라서 올바른 정치를 하라는 의미로 조선시대에는 사헌부 관헌이 머리에 쓰는 관과 대사헌의 흉배에 수를 놓았다. 그 외에도 화재나 재앙을 물리치는 상서로운 동물 여겨 궁궐 입구에 세웠다. 경복궁의 해태(해치)상은 하마비나 금표 역할 겸했다.

서울특별시는 2008년 5월에 해치를 서울의 상징 아이콘으로 선정하고 광화문 광장에 해치상을 복원하고 곳곳에 해치상을 설치했다. 

 

 

<광화문에서 본 근정문>

 

 

<광화문 왼쪽의 해태(해치)상>

해치(해태)상의 원래의 위치는 광화문광장의 북쪽 끝이며 1968년 12월에 이곳으로 옮겨세웠다. 1923년 경복궁 안에서 열린 조선부업품공진회 때 통행에 걸리적거린다는 이유로 해태(해치)상이 치워졌다가 1929년에 조선총독부 뜰 앞에 옮겨진 뒤 1968년 12월에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콘크리트 광화문 해체 결정 후 2006년 12월에 경복궁 안의 보관창고로 옯겨졌다가 2008년 8월에 다시 현재의 자리로 복귀했다.

 

 

 <안내자 이순우선생님과 경복궁 서십자각>

동, 서십자각은 경복궁 전면 좌우 모서리에 설치한 망루 기능을 하는 구조물이다. 지금은 동십자각만 섬처럼 도로에 남아있고 1923년 일제가 경복궁에서 개최한 조선부업품공진회를 앞두고 전차선로를 신설하면서 서십자각은 사라졌다.

 

 

<1926년의 영추문(경복궁 서장문) 붕괴 사진>

영추문은 바로 안쪽에 궐내각사가 포진했기 때문에 관리들이 궁궐을 드나드는 통로였다. 그러나 1923년에 바로 영추문 앞으로 전차선로가 개설되면서 담장과 문에 충격을 주었고 결국 1926년에 영추문 옆 담장이 무너졌다. 일제는 이를 기화로 영추문을 완전히 철거했고 1975년에 '콘크리트' 영추문으로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영추문 맞은편의 조형물>

 

 

<금청교 사진 자료와 창의궁>

금청교는 청계천 상류(발원지는 백악산)인 백운동 물길을 따라 흘러내리는 개천을 가로지르는 지점에 놓여있던 다리이다. 금청교는 광화문 앞쪽에서 체부동이나 누상동, 누하동, 청운동으로 갈 때 반드시 지나쳐야 하는 길목에 있었다. 경복궁 서십자각을 감아 도는, 현재의 통의동과 적선동의 경계 지점이다.

 

금청교 사진을 들고 있는 안내자인 이순우선생님의 뒤쪽은 창의궁 터이면서 일제 강점기에 동양척식회사 사택이 있던 곳이다. 창의궁은 효종의 딸인 숙휘공주가 인평위 정제현과 결혼한 후 살았으며, 숙종이 아들인 연잉군(영조)에게 하사했고, 연잉군이 경종의 왕세제가 되기 전까지 이곳에서 8년간 거처(잠저)했기 때문에 창의궁이 되었다. 이후 영조 4년(1728)에 어린 나이로 죽은 효장세자를 위한 효장묘가 되었다가, 영조 28년(1752)에 죽은 의소세손이 함께 봉안되었다. 

정조 등극 후 효장세자가 진종으로 추존되면서 위패가 종묘로 옮겨졌고, 순조 30년(1830)에 죽은 효명세자의 문호묘가 다시 이곳에 설치되었다. 효명세자가 익종으로 추존되면서 종묘로 위패가 옮겨졌다. 창의궁은 제 명에 못 죽은 조선후기의 왕세자나 왕세손의 위패를 모신 공간이었지만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통의동 백송>

통의동 백송은 우리나라 백송 중에서 가장 크고(높이16m, 흉고둘레5m) 수형이 아름다워 1962년 12월 3일 천연기념물 제4호로 지정되었으나 1990년 7월 17일 태풍으로 고사되어 1993년 3월 24일에 문화재 지정이 해제되었고 현재는 나무 밑둥만 남아있다.

 

 

<통의동 백송 앞의 조형물> 

 

 

<통의동 백송 앞의 그림판>

우리 젊은 날의 우상이었던 두 미남배우들, 찰스 브론슨과 알랑 들롱... 

 

 

<통의동 백송 앞의 추사 김정희 초상>

통의동 백송 부근에서 추사 김정희가 살았던 듯... 

 

 

 <통의동 서촌한옥마을 벽화>

서촌한옥마을이 있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은 것 같긴 한데... TV프로그램에서 서촌을 소개하면서 오래된 헌책방과 유명한 문인이 젊은 시절에 잠시 살았다고 방영한 것을 얼핏 본 기억이 있다. 고위 관료들이 주로 거주했던 북촌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지긴 했지만 서촌도 나름 옛 정취를 간직하고 있다.

 

 

<경복궁 영추문 맞은편 진갤러리의 철제 나비와 호박 혹은 알집?>

통유리 반사 때문에 사진이 좀 흐트러지긴 했지만 인근에서 예술적인 감각이 가장 돋보인 곳이다.

 

 

<경복궁 서문인 영추문>

 완벽해 보이는 영추문은 1923년에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다가 1975년에 '콘크리트' 영추문으로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영추문 북동쪽 대각선에 있는 통의동 7번지 구역은 대루원 터(매동보통학교 터)로 조선시대에 궁궐을 드나들던 대소신료들이 파루를 기다리며 궐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던 장소(대루원 터)이다.

 

 

<영추문 옆의 플라타너스>

플라타너스는 겨울 나목일 때 하얀 속살이 돋보이는 나무이다. 이 나무 열매로 머리를 맞으면 엄청나게 아팠던 기억이 있다.

 

 

<제목이 돋보이는 영추문 맞은편의 '예술을 파는 구멍가게'>

상호만 보면 1등감인데 중요한 것은 '무슨 예술을 파는 것'인지 내가 인지를 못했다는 것이다, ㅠㅠ...

 

 

<창성동 적십자사 터(경관연습소, 체신이원양성소)>

대한제국 시절(1905)에 적십자사와 적십자병원이 있던 곳이다. 1909년 5월에는 국권 침탈과정에서 경찰권을 장악한 일제가 일본에서 채용한 일본인 순사들을 교육한 경찰관연습소가 이곳에 들어섰다. 1918년 5월 이후 체신이원양성소가 되었다가 1936년 12월에 원효로 3가 1번지로 이전하였다. 해방 이후 신익희선생이 학장으로 있던 국민대학관(국민대학교)이 들어섰다가 1971년에 국민대학교는 정릉동으로 이전하고 현재는 정부종합청사 창성동별관으로 사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