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경복고등학교와 경기상업고등학교 안의 유적, 그리고 몽혼(夢魂)

큰누리 2013. 5. 28. 21:46

경복고등학교는 청와대 서쪽에 있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경기상업고등학교가 바로 이웃해 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다음 차수에 진행된 서소문 밖 주변 답사 때 중림동 약현성당 주변에 경기여상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고... '경기'라는 선입견 때문에 둘다 경기도 어디쯤 있는 특성화고, 혹은 상고로 안 것이다.

청운동 89번지는 31,263평에 달하며 번지 내에 경복고, 경기상고, 청운초교뿐 아니라 그 일대를 두루 포함한다. 이 일대는 근대(조선 말기)에 궁내부 농상소가 있던 곳이다.

 

'농상소'1884년 5월에 보빙사(견미사절단)의 일원이었던 최경석이 미국을 다녀오면서 가져온 농기구와 종자로 농무목축시험장을 개설한데서 비롯되었다. 농상소에서는 미국에서 도입한 소, 말, 돼지, 양 등의 사육도 이루어졌지만 1886년 최경석이 사망하자 일시 중지되었다가 1887년에 영국인 자프레를 초빙하여 다시 농장이 운영되었다. 하지만 자프레도 1888년에 사망하자 1896년에 프랑스인 쇼트(蘇特)가 목양교사로 초빙되어 관리를 맡았다. 궁내부 농상소는 자주 원유회나 운동회가 열리는 공간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1909년 이후로는 식림묘포가 설치되어 나무 묘목을 보급하는 곳으로 바뀌었으며 1926년 6월에 폐지되었다.

 

원래 농상소 터(現 경복고, 경기상고, 청운초교 일대)에는 중종비인 장경왕후의 혼전인 영경전(永慶殿)이 있었다. 이후 선조 때 순회세자와 공회빈 윤씨를 위한 순회묘가 설치되었다가 숙종 4년에 신주를 매립했다. 인조 2년에는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의 소현묘가 구)영경전 구역에 함께 설치되었다가 정조 즉위년에 신주를 매립했다.  

숙종 24년에는 소현묘의 북쪽 담장 밖에 중종의 원비였다가 폐위된 신씨를 위한 신비사가 건립되었다. 폐비 신씨는 영조 15년에 단경왕후로 복위되면서 종묘로 위패가 옮겨졌다. 경복궁 서장문인 영추문 밖의 창의궁처럼 이곳도 제명에 못 죽은 왕비나 왕자의 위패를 모신 공간(사당)이었다. 

 

농상소 아래(남쪽) 좌우에는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 사당인 선희궁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사당인 육상궁 있었다. 

 

 

 <경기상고 담장의 벋은씀바귀>

논두렁이나 습기가 있는 풀밭에서 자라는 여러해살이풀이다. 씀바귀가 혀꽃이 5~8개 홑꽃인데 비해 벋은씀바귀는 23~24개의 겹꽃이다.

 

 

<경기상업고등학교>

경기상고는 1923년 5월에 동숭동에서 경기공립상업학교로 개교하였으며 경기도 관할이어서 '도상(道商)'으로 불리었다. 동숭동에 경성제국대학이 세워지면서 부지가 먹혀 1926년 구)농상소 자리에 있던 제2고등보통학교(現 경복고) 뒤로 이전했다.

1946년 9월에 경기공립상업중학교로, 1952년에 서울상업고등학교로 개칭(이 때 청운중으로 중, 고 분리)되었다. 1968년 이후에 경기상업고등학교로 개칭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경기상고>

이전 당시에 세운 건물이 잘 보존되어 있다. 뒤의 산은 북악산, 오른쪽 끝 건물은 1952년에 분리된 청운중학교이다.

 

 

 

<경기상고 운동장에서 본 인왕산>

경기상고 동쪽 약간 아래에 있는 경복고등학교가 겸재 정선의 집터였다고 하니 겸재의 집에서 인왕산을 바라보면 이 정도의 상황일 것이다. 원경 중앙에서 약간 오른쪽으로 정선의 <인왕재색도>에 나오는 치마바위가 보인다.

 

 

<원래 농상소 터에 있었던 건물들>

안내자인 사학자 이순우선생님이 경기상고 운동장에서 원래 이곳에 있었던 건물에 대해 설명 중이다. 이곳은 경기상고-경복고-청운초중고가 들어서기 전에 궁내부 농상소가 있었고, 그 전에 영경전, 순회묘, 소현묘, 신비사 등의 사당이 있었다.

 

 

<경기상고의 조팝나무>

산기슭이나 들에서 무더기로 자라는 밀원식물이다. 4~5월에 흰꽃이 핀 모양이 튀긴 좁쌀 같아서 조팝(조밥)나무라고 한다. 

 

 

<자주목련과 화정 이상덕像>

이 분은 경기상고가 공립이니 설립자는 아닌 것 같고, 학교 발전에 공로가 큰 분이 아닌가 생각한다. 학교 앞에서 보면 밋밋하지만 건물 뒤로 돌아가면 'ㅁ'자형 건물에 둘러쌓인 아늑한 정원(화단)이 있다.

 

 

<전형적인 학교 건물, 경기상고 뒤편 교사와 떨어져 쌓인 벚꽃잎들>

 

 

 

<경기상고 뒤쪽의 청송당 유지 각자>

조선 중기의 유학자 성혼의 아버지이자 조광조의 제자였던 청송 성수침이 은거하며 학문을 닦은 곳이다. 청송당은 언제 사라졌는지 알 수 없지만 겸재 정선의 그림 속에서 일부를 볼 수 있다.

 

 

 

<또 다른 농상소 터, 경복고등학교>

경기상고와 이웃해 있으며 옛 궁내부 농상소이자 경성식림묘포가 있던 곳이다. 경복고등학교는 1921년 4월에 화동의 경성제1고등보통학교(舊 경기고등학교)에서 개교했다가 바로 이곳으로 이전하였으며 1925년 이후에 경기도로 관할이 이전되면서 공립 경성제2고등보통학교로 개칭되었다.

 

1938년 조선교육령이 개정될 때 고등보통학교제도가 일제의 중학교 편제로 흡수되면서 경복공립중학교로 개칭되었다. 1952년 경복고등학교로 개칭되면서 중, 고가 분리(창의중학교)되었지만, 1971년 2월에 경복중학교는 폐교되었다.

 

 

<경복고등학교>

 

 

 <경복고 구내의 운강대와 효자 유지>

운강대 각자(刻字)는 이곳이 선조 때 승지를 지낸 운강 조원의 유지였음을 뜻한다. 조원은 스승인 남명 조식으로부터 아름다운 선비(嘉林)이란 칭송을 들을 정도로 인품이 뛰어났다. 그의 소실이었던 이옥봉은 허난설헌에 버금가는 명류로 일컬어진다. 첩으로 들어가면서 남편 조원과 한 '시를 쓰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겨 쫓겨나자 남편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표현한 '몽혼'은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는 명시이다.

 

이옥봉은 조원에게 쫓겨난 후 혼자 살다가 온몸에 시를 쓴 종이를 수백겹 감은 채 중국 해안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는데 그 종이에 '해동 조선국 승지 조원의 첩 이옥봉'이란 내용과 시들이 빽빽히 적혀 있었다고 한다. 위의 내용은 40여년이 지나 승지가 된 조원의 아들 조희일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명나라의 원로대신과 대화를 하다가 우연히 알게 되었다.  

 

 

 몽혼(夢魂)          이옥봉

近來安否問如何(근래안부문여하)  요새 안부를 묻노니 어떠하신지요?        

月到紗窓妾恨多(월도사창첩한다)  달 비친 사창에 저의 한이 많습니다.       

若使夢魂行有跡(약사몽혼행유적)  꿈 속의 넋에게 자취를 남기게 한다면     

門前石路半成沙(문전석로반성사)  문 앞의 돌길이 반쯤은 모래가 되었을 걸.

 

 

조원의 장남인 조희정과 차남인 조희철은 임진왜란 때 왜군이 어머니를 해치려 하자 몸으로 막다가 왜군의 칼에 목숨을 잃었다. 그 둘은 효자로 표창되어 쌍효자家가 되었고 효자동도 이들에게서 유래되었다. 이순우선생님이 이에 대해 설명 중이다. 

 

 

 

 

<경복고등학교>

 

 

<경복고등학교 안의 겸재 정선의 집터 표석>

이곳이 진경산수화가로 이름이 높은 겸재 정선의 집터였음을 알리는 조형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