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아나키스트 이회영선생을 기리는 우당기념관

큰누리 2013. 6. 3. 22:10

내가 우당 선생을 제대로 알게 된 것은 이덕일씨의 소설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을 통해서였다. 이후 TV에서 방영된 몇개의 프로그램을 보았다. 역사라면 그런대로 주워들은 내가 어쩌면 그렇게 이회영 선생을 까맣게 몰랐는지 모르겠다. 위의 이덕일 소설에서 기억에 남은 단어가 노블레스 오블리제 삼한갑족이다. 우당 이회영기념관의 카타로그에 적힌 우당선생에 대한 소개 글은 다음과 같다.

 

 

<Noblesse Oblige」의 살아있는 역사>

1910년, 일제침략으로 경술국치를 당하자, 조선최고의 명문가인 삼한갑족으로서의 영예와 당대 최고의 재산가로 평가 되었던 우당선생 6형제 가족 40여명은 전 재산을 정리하여,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 위하여 만주로 고난의 망명길을 떠났다. 대다수의 권문세가와 양반들은 일제에 빌붙어 기득권을 지키고 일신의 안위와 호사를 누리는데 이들은 왜 편안한 기득권을 버리고, 호랑이보다 무섭다는 살인적인 추위의 만주벌판에서 풍찬노숙하며 치열하게 독립투쟁을 벌였을까?

월남 이상재 선생은 "우리 민족은 우당가문에 큰 빚을 졌다"고 말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살아있는 역사의 주역 우당 이회영, 그는 누구인가?

 

<우당의 일생>

우당 이회영은 1867년 서울 명예방(명동)에서 이항복의 11세손,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의 4남으로 출생했다. 1907년경 전덕기목사, 이동녕, 양기탁 등과 신민회 창립을 주도했으며 헤이그 밀사 파견을 고종에게 직접 주청했다.

 

1910년 우당 6형제와 가족 40여명이 집단 망명하여 동지들과 경학사, 신흥무관학교 설립을 주도했다. 이후 10년간 3,500여명의 독립군 간부를 배출하였으며 이들은 청산리전투 등 대부분의 독립전쟁을 주도했고 1940년 임시정부에서 광복군을 창설할 때 지휘관인 지청천, 이범석, 김원봉, 김학규 등도 신흥무관학교 출신이다. 

 

우당은 1919년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호응하여 초대 의정원 의원으로 참여했으나 임정 내부의 파벌과 감투싸움에 실망하여 신채호 등과 북경으로 활동 근거지를 옮겼다. 이후 북경에서 중국의 대문호 루쉰, 북경대 교수 이석증, 오취휘 등과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주도하는 아나키스트운동을 전개하며 의열단, 다물단, 흑색공포단 등의 의열투쟁을 지도했다. 1932년 중국 요령자위군 당취오총사령관과 독립군 양세봉장군이 연합하여 항일투쟁을 벌이도록 독려하려고 잠입 중 대련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여순감옥에서 순국했다.

 

<우당의 사상과 교훈>

우당은 첫째, 철저한 자유주의자로 평등사상을 추구했다.

♣ 첫째, 혁신적 유학사상인 양명학과 서구의 진보사상에 영향을 받아 일제의 억압과 독재를 배격하고 인간의 자유와 평등, 인권을 종중하는 자유연합협동주의를 주창했다. 

 반상계급을 타파하고 적서차별을 시정했으며 남녀 불평등 반대 등을 실천했다.

 

둘째, 무장투쟁 독립운동 노선을 추구했다.

국민계몽과 외교노선만으로는 일본제국주의를 축출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무장투쟁노선을 추구했다.

 조선 패망의 원인을 무관 천시의 문무 불균형에 있다고 보고 문약한 유교문화를 극복하려고 무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세째, 독립 이후의 정부형태로 지방분권적 연합정부를 구상했다. 강력한 중앙집권제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한다는 판단 하에 지방분권적 연합정부를 구성하여 국민의 자유와 평등, 인권을 보장하는 복지국가 건설을 주장했다.

 

네째, 국제주의와 사해동포주의에 따른 "동아시아 평화공동체" 구상했다. 일제의 침략주의와 패권을 배제하고, 세계적인 평화체제를 추구했으며, 선린우호와 평화를 유지하는 "동아시아 평화공동체"를 구상했다.

 

다섯째, "노블레스 오블리제"와 통합과 화합의 시대정신을 실천 성인이다.

 국가나 민족이 위기에 처했을 때,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하려는 지도자의 길을 실천했다.

 갈등과 분열을 극복하기 위하여 어떠한 지위와 감투도 사양하고 화합과 포용정신을 발휘한 시대정신에 투철한 선구자이다.

 

 

<종로구 신교동 소재 우당기념관>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이란 특별한 명칭이 붙어있다. 서울 맹학교 맞은편, 우당의 후손(조카)인 국회의원 이종찬씨의 사저 1층에 있다.

 

 

 

 

<우당기념관 앞의 동네골목길관광 제1-2코스 안내판>

우당기념관이 있는 신교동 주변은 인왕산 아래의 풍치가 좋은 곳이라 일제 때 친일 귀족들의 별장 터, 바위 각자 등이 많다.

 

 

<우당 이회영 동상>

이 분을 생각하면 정말...

 

 

<우당의 일생에 관한 신문기사> 

 

 

<우당기념관 내부>

 

 

<신민회, 경학사, 신흥무관학교 관련 인사들>

이상설, 이동녕, 김동삼, 김좌진, 신채호 등이 보인다.

 

 

<경학사 설립 취지문>

 

 

<우당 선생 사진과 혁명열사증명서, 건국공로훈장증>

왼쪽의 빨간 리본이 있는 혁명열사증명서는 중국정부에서 2000년에 수여한 것이다.

 

 

<우당 선생 유품과 서적들>

 

 

 

<우당 이회영선생의 생애와 사상 약도>

 

 

 

<우당기념관 안의 한국독립운동사 자료실>

 

 

<우당 선생과 6형제>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이다. 이들 형제는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우리나라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상징이 됐지만 말년에는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어느 시대를 통털어도 유래를 찾기가 힘든 이분들에 대한 존경과 찬사는 어떤 말이나 글로도 부족할 듯 하다.

 

 

이 글을 올린 한참 후인 2016년 7월 31일부터 중국으로 '열하일기 코스 따라가기' 답사를 다녀왔다.

그 때 가장 먼저 들른 곳이 뤼순(여순)에 있는 뤼순형무소(Lushun Prison, 뤼순일아감옥구지, 여순감옥)였는데 그곳에서 안중근 열사 독방을 비롯하여 신채호 선생과 이회영 선생이 갇혔던 방, 안중근 열사가 죽임을 당한 사형장 등을 둘러보았다.

그곳에서 이회영 선생도 고문을 받은 후 돌아가신 것으로 알고 있어서 막연히 시신 수습이나마 제대로 되지 못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었다. 그런데 동작동 국립묘지에 답사 차 들렀다가 다행히(!) 선생이 동작동 국립묘지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이 되어 있는 것을 확인했다. 선생의 업적을 생각하면 받기만 한 후손들인데 그나마 조금은 다행이다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