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인왕산 아래(옥인동)의 매국노들의 집, 별장 터

큰누리 2013. 6. 11. 13:25

'송석원'과 '벽수산장' 동일한 곳인지, 어느 한쪽이 다른 곳을 포함하는지 헛갈렸다. 글을 올리기 위해 사전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정조 치세기인 1786년, 중인계층에서 글을 직업으로 삼는 훈장, 규장각 서리 등의 지식인들이 '옥계시사'(玉溪詩社)란 모임을 결성한다. '옥계시사'를 주도한 인물 천수경이 살던 집 이름이 송석원(松石園)이었고, 그들의 주된 모임 장소였다. 옥계시사 계원들은 중인계급 30대 10여명으로 구성되었는데 상당한 수준의 지식인들로 평가된다. 

1817년에 통의동 백송이 있는 근처에 살던 추사 김정희가 5월쯤 천수경의 회갑을 기념하는 시사에 와서 송석원 뒤에 있던 바위에 '송석원(松石園)'이란 글자를 남겼다.

 

'송석원시사'(옥계시사가 바뀐 이름)는 30여년간 잘 이어지다 100여년만에 흐지부지 되고 집터는 김수항, 민태호를 거쳐 윤덕영의 소유가 되었다. 송석원은 명성황후의 일족인 민규호가 병에 좋은 물을 먹기 위해 살았는데 후에 민태호에게 넘어간 것으로 추측한다. 서촌(웃대)은 조선 건국 이래 왕족 → 서인 → 중인 → 권력자 개인 거주지로 변화했다.

 

윤덕영은 을사오적보다 훨씬 파렴치하고 악랄한 친일파이며, 어떤 이는 'XX죽여도 모자랄 인물'로 지칭할 정도이다. 

순종의 제2황후인 순정효황후 윤씨의 백부가 되기 전에 탄탄한 해풍 윤씨 집안을 뒷배로 두고 있었다. 집안 배경과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을 다녀온 후 승승장구하던 중 고종의 후궁 엄비가 순원황귀비로 되는 과정에 개입하게 된다. 그 공로로 엄귀비의 환심을 사 자신의 조카를 황태자비로 입궁시켰다.

황태자비의 백부라는 명예와 기존의 지위로도 모자라 1910년의 한일강제 합병 과정에서 왕족과 국가의 안녕을 위해 일본과 합병해야 된다고 고종을 집요하게 괴롭히고, 옥새를 치마폭에 감춘 조카(순정효황후)에게서 탈취했다고 한다.

 

윤덕영은 경술국치에 공헌한 공로로 일제에게서 거액의 하사금과 자작 직위를 받고 닥치는대로 이권에 개입하여 부를 축적했다. 그는 순정효황후의 부친이자 동생인 윤택영이 말년에 빚에 쫓겨 중국으로 도망가서 타국에서 죽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고 한다.

 

윤덕영은 송석원 터에 프랑스공사 민영찬이 가져온 설계도를 바탕으로 독일인의 감독하에 1914년부터 10여년의 공사를 거쳐 222평 저택 벽수산장과 한옥 등 14동의 건물 지었다. 송석원 산장은 당시 서울 최고의 호화주택으로 서촌사람들에게 '돌문 안 뾰족집'으로 불렸다. 현재 남산골 한옥마을에 복원된 5채의 한옥 중 '옥인동 윤씨 가옥' 벽수산장 안에 있던 99칸짜리 집의 일부이다. 송석원(벽수산장) 바로 밖에서 구름다리로 이어진 양옥은 윤덕영 딸 부부의 집이었다. 화가인 박노수의 집이었다가 작품과 집을 기증하여 최근에 박노수 미술관으로 단장, 개장된 것으로 안다.

 

윤덕영이 잘 먹고 잘 살다가 1940년에 편안하게(!) 죽은 후, 송석원(벽수산장)은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 미쓰이재벌이 점거했다. 대역죄인에 대한 천형이었는지 윤덕영 사후 그 후예들은 재산관리를 제대로 못했고 엄청난 유지비 때문에 송석원을 포기했다고 한다. 해방 후 덕수병원이 들어섰다가 6.25전쟁 때는 '조선인민공화국 청사'가 되었다. 서울 수복 후 유엔군장교 숙소를 거쳐 언커크(UNCURK,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회)가 사용하였다. 1966년 수리를 하던 중 불이나 전소되었고 1973년에 철거되었다.

 

 

<벽수산장(송석원) 정문 기둥돌>

송석원, 그 중에서도 프랑스식 건물인 벽수산장은 정문인 이곳으로 들어가 한참을 왼쪽으로 꺾어올라간 정상 부근에 있었다. 남아있는 3개의 기둥 중 사진 왼쪽의 기둥 위에는 보안등이 설치되어있고, 오른쪽 기둥 하나는 주저앉았고 하나는 건물 벽으로 재활용되었다. 

 

 

<송석원 정문 기둥돌에 관한 기사>

해방 후로 추정되는 시점의 동아일보 <내 동네 명물>이란 기사에 실린 내용이다. 엄청나게 원색적으로 송석원에 대해 비난하고 있다. 

'... 독일식을 본떠서 별별 사치를 다한 집이라 대궐도 못따르겠지요. 그런데 어린아이라도 이 집은 떼악마가 얹어붙은 것처럼 흉하게 보아서 부럽게 알지 않습니다...'

 

 

<송석원 안의 벽수산장 터>

윤덕영 고택(송석원, 벽수산장) 소재지 = 옥인제1구역 주택 재계발정비사업 구역.

중앙 쯤의 가장 높은 곳에 벽수산장이 있었고, 이 일대가 모두 송석원이었다. 중앙의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붉은 벽돌 집 아래에 '옥인동 윤씨 가옥(윤덕영 고택)이 자리하고 있다. '벽수(璧樹')는 윤덕영의 호이다.

 

 

<일제 강점기 하 수성동계곡과 주변의 건물 지도, 사진에 대해 설명 중인 안내자 이순우선생님>

사진 위 부암동 방향에서 흘러내리는 백운동천 물길 오른쪽 맨 위(선생님의 중지, 약지 아래) 건물이 벽수산장이다.

 

 

 

<한복차림으로 벽수산장 바위글씨 앞에 앉은 윤덕영 사진>

사람이 미워서인지 입고 있는 옷이 기모노에 게다인 줄 알았다. 벽수산장 각자 왼쪽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희미하게 가로로 새겨진 ' 園 石 松'  순으로 '松石園' 각자가 보인다. 송석원 각자는 벽수산장 뒤의 바위에 새겨져 있었는데 아직까지 존재가 파악되지 않고 있다. 혹자는 마모되거나 파손되었을 것이라고 하고, 혹자는 건물의 일부로 사용되어 묻혔을 것이라고 한다.

 

 

 <북악산을 배경으로 본 벽수산장>

 

 

 <송석원 안에 있었던 윤덕영 고택(옥인동 윤씨 가옥)>

송석원이 있었던 옥인동 47-1번지 일대는 재개발이 확정되어 진행 중이다. 원래 벽수산장이 있었던 대로라면 이 일대는 벽수산장을 위한 소나무, 사과나무, 개나리 밭이었을 것이다. 송석원 안의 99칸 한옥은 프랑스식 건물과 북쪽 뒤로 일직선 상에 놓여있었다. 6.25전쟁 후 송석원 벽수산장 주변에 무허가 건물이 난립하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남은 것이라고 한다.

 

이 건물은 남산골 한옥마을에 '옥인동 윤씨 가옥'이란 이름으로 복원되었지만 그 집은 아무리 보아도 같은 건물이란 느낌이 들지 않는다. 계단을 올라서면 일반 한옥에서는 볼 수 없는 계단의 소맷돌, 장대석 주초, 특별한 처마의 장식, 아름다운 벽, 날렵한 기와선이 눈에 들어온다. 겉은 비록 쓰러지기 직전의 빈사상태이지만 궁궐의 건물이 연상될 정도로 최고급 자재들을 썼다. 

지금은 7가구가 대지를 공동으로 소유하고, 안에서 출입구를 달리하여 함께 살고 있다고 한다.

 

 

 

 

<송석원 구역에 6.25 이후 들어선 민가들>

윤덕영 고택 주변 풍경이다. 송석원에서 가장 높은 곳에는 당대 최고 호화건물인 벽수산장이 있었고 소나무숲과 사과나무밭이 있었다고 한다. 벽수산장 앞, 뒤로 현재 허름하게 목숨만 남아 헐떡이는 99칸 한옥과 윤덕영의 딸 부부가 산 3층 양옥이 있었다. 그 외에도 능금나무밭으로 불리는 곳에 지은 건물에는 윤덕영의 소실과 아들이 살았다고 한다. 3층 양옥은 현재의 박노수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자수궁 터인 옥인아파트>

광해군은 경희궁 일대에 왕의 기운이 서린다는 말을 듣고 인왕산의 왕기를 차단하기 위해 궁궐을 지었다. 자수궁은 그 때 지은 3개의 궁궐(인경궁, 경덕궁, 자수궁) 중의 하나이다. 인조 반정 후 경덕궁(경희궁)만 남기고 인경궁과 자수궁은 폐지하였는데 자수궁은 자수원으로 명칭을 바꿔 이원(僧房)을 만들었다. 아들이 없는 후궁이 자수원에 들어가 살면서 여승이 5,000명까지 불어났으나 폐해가 심해 1661년(헌종2)에 폐지했다.

 

자수궁 터는 조선 개국 직후에는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 소생 왕자들이 거주했었다고 한다. 문종이 그곳을 수리해서 자식 없는 선왕의 후궁들을 거주케 했다고 하니 광해군이 자수궁을 건립하기 이전부터 정업원 비숫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었던 셈이다.

송석원과 마주한 자수궁 터 바로 뒤에 매국노 이완용의 집 있었다.

 

 

 

<이완용 집 터 입구에 있는 옥인파출소>

옥인파출소 입구에서 안내자인 이순우선생님이 김창룡과 간첩 김수임에 대한 말씀을 하셨는데 지쳐서 내용을 놓쳤다. 두 사람은 옥인파출소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지금은 이완용 집의 흔적을 찾을 수 없지만 윤덕영의 저택인 송석원만은 못해도 고대광실이었을 것이다. 윤덕영과 달리 이완용은 을사오적으로 공공의 적이 된 이후에 그 목숨을 노리는 이들이 많아 집이 불 타기도 하고 여러 번 이사를 했다.

 

 

 

<김수임과 김창룡 관련 기사>

악질 경찰 김창룡에 사형이 언도되었다는 내용과, 여간첩 김수임이 헌병에 끌려가는 모습, 그녀의 딸에 관련된 기사이다.

 

 

<자수궁 앞에 있었던 자수궁교>

사진으로 보아 일제 강점기에도 자수궁 일부와 다리가 남아있었다. 헌종 초에 정업원 역할을 하던 자수궁이 폐지되면서 주요 건물 자재들은 성균관 서쪽의 비천당, 일량재, 벽입재 등의 자재로 사용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