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과 양화진, 잠두봉 유적

큰누리 2013. 6. 27. 01:46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찾아가는 길>

지하철2호선 합정역 7번 출구 → 당산역 방향으로 지하철 아래의 도로를 따라 5분 정도 걸어감.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개요>

묘지의 총면적은 14,000㎡(4,000평) 정도이다. 그 중 개신교 선교사 묘지가 120여기(가족 포함)로 가장 많고, 미군 묘지가 60여기, 한국인 묘지도 23기가 있다. 선교사나 군인이 아닌 경우는 60여기, 직종이 확인되지 않은 경우는 70여기이다.

국적별로는 14개국(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벨기에, 러시아, 남아공화국, 필리핀, 일본, 한국)의 묘지가 있다.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의 유래 및 역사>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의 유래는 1884년 갑신정변 때 개화파에 의해 죽을 뻔한 민영익을 살린 알렌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알렌(H.N.Allen)은 그 공로로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을 설립했고, 헤론(J.W.Heron)이 제중원으로 바뀐 병원의 2대 원장이 된다. 이질 환자를 돌보다 감염된 헤론이 1890년 7월 26일, 34세로 세상을 뜨자 매장지가 문제가 되었다. 당시 외국인묘지는 유일하게 제물포에 있었는데 한여름이라 시신을 옮기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과 영국이 통상지역 안에 외국인 묘지를 무상으로 조성한다는 통상조약을 맺은 직후라 미국 공사 허드는 통상조약과 최혜국 조관을 근거로 도성 가까운 곳으로 매장지를 요구해서 양화진으로 결정되었다.

 

양화진에 묻힌 외국인들 중에는 선교사들이 많은데 병원, 학교를 설립하고 일제와 맞서 싸우기도 하면서 열악한 상황의 한국인을 위해 자신뿐 아니라 대를 이어 봉사하거나 활동했고 이 땅에 묻히기를 원했다. 외국인들의 모금으로 정비된 초기의 묘지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제대로 관리되지 못했고, 6.25전쟁 때에는 묘지 부근이 격전지가 되었기 때문에 일부 묘비가 훼손되거나 총탄자국이 곳곳에 남아있다.

 

처음에는 양화진외인묘지 → 1913년, 경성구미인묘지 → 1986년 10월, 서울외국인묘지공원 → 2006년 5월, 현재의 명칭으로 바뀌었다. 소유권을 놓고 외국인 유족과 법정투쟁을 벌인 끝에 1985년 6월,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가 소유권자로 등기되어 관리하고 있다.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안장된 외국인들>

양화진 외국인 묘원에는 선교사 145명을 포함하여 417명의 외국인이 잠들어 있다. 

연세대(연희전문) 설립자인 언더우드 부부와 그의 아들 부부(한국명 원한경), 배재학당을 설립하고, 목포의 배 사고 현장에서 한국인 소녀를 구하려다 의롭게 죽은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거하드 아펜젤러의 딸로 이화여전 초대교장이었던 앨리스 아펜젤러이화학당 설립자 매리 스크랜톤평양 선교 개척자 윌리엄 홀 한국 최초의 맹인학교와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를 설립한 그의 부인 로제타 홀, 한국에 최초의 결핵요양원을 세운 윌리암 홀의 아들 셔우드 홀한국의 독립을 위해 외교분야에서 노력한 호머 헐버트구한말 <매일신보>를 창간한 어니스트 베델숭실대학 설립자인 윌리엄 M.베어드한말 군악대를 창설하고 일본의 국가 기미가요를 작곡한 독일인 에케르트와 그의 사위이면서 구한말 법어(프랑스어)학교 교사였던 마르텔한국 고아의 아버지로 불리는 유일한 일본인 소다 가이치 등의 묘가 있다.

 

개신교 선교사 언더우드, 아펜젤러, 에비슨, 베어드, 홀, 게일, 쇼, 테일러, 웜스는 가족 묘 형태이다.

 

 

<양화진 홀>

입구에 들어서면 안내인이 나와 성경 위에 동행한 이들의 손을 겹쳐포개고 짤막한 기도를 하게 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양화진 홀 내부>

역사 속의 선교사 활동 연표, 양화진의 역사,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등이 일목요연하게 정리, 전시되어 있다. 한켠에서 한국에서의 선교사들의 선교활동, 한글 성경번역 과정 등에 대한 동영상을 상영한다. 상영 시간은 짧지만 흔히 접하기 어려운 자료들이어서 흥미있게 보았다.

 

 

 

 

 

 

 

<묘역 안내도>

A묘역부터 I묘역까지 있다.

 

 

 

<I묘역>

영국인 성공회 선교사들이 주로 잠들어 있다.

한국 성공회 2대 주교로 1907년부터 1910년까지 YMCA회장을 역임하면서 YMCA 발전에 기여한 영국인 터너, 아더 어네스트 채드웰주교한국 초창기 성공회 신학을 정립하고 전도자 교육에 힘쓴 선교사 허지스, 성공회 소속의 간호선교사인 노라, 로이스, 엡스터 등의 묘가 있다. 아래 사진은 아더 어네스트 채드웰주교 묘이다.

 

 

 

<H묘역>

 

 

<F묘역의 언더우드(원두우)가족 묘와 기념비>

F묘역에는 언더우드 가족 묘와 기념비 외에 언더우드의 권고로 한국에 들어와 세브란스병원과 의학교를 설립하고 연희전문 2대학장을 지낸 에비슨의 기념비 그의 4남 부부의 묘, 베어드 기념비와 그의 가족 묘 등이 있다.  

 

 

 

<C묘역의 소다 가이치(曾田嘉伊智)묘>

C묘역에는 소다 가이치 묘 외에 아펜젤러 가족, 홀 가족,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최초의 매장자인 헤론 묘 등이 있다.

 

소다 가이치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묻힌 유일한 일본인으로 '한국 고아들의 아버지'로 불린다. 31세 때인 1899년 대만에서 술에 취해 길에 쓰러진 그를 업어다 치료하고 목숨을 구한 한국인의 은혜를 갚기 위해 한국으로 왔다. 황성기독교청년회 학관(YMCA 전신)의 일본어 교사로 있다가 기독교도가 되었고, 결혼한 후에는 부부가 함께 전도와 고아를 돌보는 일을 했다.

1950년에 부인인 우에노 다키는 한국에 남아 고아를 돌보다 세상을 떠났고, 소다 가이치는 홀로 일본에서 회개활동을 하다 1961년 한국의 초청으로 한국으로 들어왔지만 이듬해인 1962년 3월 28일, 9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921년부터 해방이 될 때까지 서울 가마쿠라보육원에서 소다 가이치부부가 길러낸 한국 고아는 1천명이 넘었다.

 

 

<B묘역의 스크랜톤 대부인묘(매리 스크랜톤)>

매리 스크랜톤 남편과 사별한 후 53세 때인 1885년 외아들 부부와 함께 한국 최초의 여선교사로 들어왔다. 이화학당을 설립하여 여성교육에 힘쓰고 선교사업을 하다 1909년에 세상을 떴다. B묘역에는 이화여전 초대교장이었던 앨리스 아펜젤러, 한국의 독립을 위해 외교분야에서 노력한 호머 헐버트, 배화학당 설립자인 캠벨 등의 묘 있다. 

 

 

 <B묘역의 호머 헐버트 묘와 사연 많은 묘비>

한국의 독립을 위해 외교분야에서 노력한 호머 헐버트의 묘와 묘비이다. 묘비에는 '1949년 8울 11일의 영결식에 제막하여 이승만대통령이 묘비명을 쓰기로 했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50년 동안 비어있다가 1999년 8월에 김대중대통령의 휘호를 받아 묘비명을 세워넣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1950년 3월 1일에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A묘역의 어니스트 베델의 묘>

A묘역에는 충청북도 지역의 복음화에 기여한 밀러와 그 가족, 한국의 여권신장에 기여한 여선교사 베어한국교회발전을 위해 노력하다 내한 3년 만에 과로로 죽은 채핀과 한국 여성신학교육의 초석을 놓은 부인 안나, 한국에 최초로 침례교를 전파하고 강경에 침례교회를 세운 파울링과 그의 가족 묘가 있다.

카톨릭신자로는 한말 군악대를 창설하고 일본 국가 기미가요를 작곡한 독일 출신 작곡가 에케르트와 그의 사위 한말 법어(프랑스어) 학교 교사 마르텔이 A묘역에 있다.

 

아래 사진은 구한말 양기탁과 함께 <매일신보>를 창간한 어니스트 베델 묘이다. 특이한 점은 묘비의 뒷면에 새긴 베델의 생전에 대해 기록이 모두 쪼아내졌다는 것이다. 1968년 3월 1일에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수훈되었다.

 

 

<양화진(양화나루)>

양화진은 조선시대에 교통과 국방의 요충지였다. 수심이 깊어 큰 배를 댈 수 있었기 때문에 제물포로 들어오는 전국의 물자가 양화진을 통해 도성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적들이 쉽게 도성으로 들어올 수 있는 취약성 때문에 영조 30년(1754)에 군사 주둔지인 군진이 설치되었다. 따라서 양화진의 '진'은 나루(津)와 병영(鎭)의 뜻 함께 쓰였다.

 

1866년 8월,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을 응징하고자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까지 침범했다가 10월에 강화도에서 패퇴한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이후 대원군은 '양이'로 더렵혀진 한강을 '사교'들의 피로 씻는다면서 천주교도들을 절두산과 새남터에서 참수하여 한강은 피로 물들었다.

 

 

<일부만 구획해 놓은 양화鎭 장대석>

 

 

 

<양화津(양화나루) 터>

위로 서울지하철2호선이 지나고 옆으로 절두산이 있는 지점이다.

 

 

<잠두봉>

누에모양을 닮아 잠두봉으로 불렸으나 병인박해 이후로 절두산으로 불렸으며, 현재 절두산 성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