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국립서울농학교 안의 유적과 인왕산 병풍바위의 수난

큰누리 2013. 6. 16. 19:17

국립서울농학교 부근은 유적들이 몇 집 건너 있을 정도로 많다. 명승지로는 인왕산을 끼고 수성동계곡과 청풍계, 백운동천이 있다. 경치가 빼어난 곳이어서 청풍백세, 청운산장, 백운동천 등 바위글씨가 줄줄이 남아있다. 

유적으로는 우당기념관이 있고, 그 위쪽에 송석원(벽수산장) 터, 자수궁 터와 이완용 집터, 세종대왕 탄생지, 김가진 집터 등이 있다. 그 외에도 경성식림묘포 터인 경복고등학교, 경기상고, 청운초등학교가 있고 국립서울농학교 안에 선희궁 터와 세심대로 추정되는 곳이 있다. 역사 속의 유적들이 현지인들의 거주지로 스며들거나 터로 남아 현재와 과거가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지역이다.

 

주변경관이 좋고 전망이 좋아 시대를 막론하고 가진 자들이 눈독을 들인 곳이기도 했다. 조선 초기에는 왕족들이 거주하거나 죽은 왕족을 위한 사당들이 들어섰다가 서인→중인 집단이 거주했다. 근대에 이르러서는 매국으로 치부한 친일파들이 호화스런 집이나 별장을 짓는 곳으로 바뀌었다. 해방 이후 송석원 터에 들어선 무허가 건물들을 정비하고 재개발하는 공사가 진행 중인데 근근히 명맥을 유지하는 유적들이 잇권 때문에 싹쓸이 당하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국립서울농학교와 맹학교>

도로 중앙의 보호수 은행나무 바로 왼쪽에 우당기념관이 있다. 벽화가 보이는 오른쪽 앞 건물이 국립서울농학교이다. 그 위로 서울맹학교가 이어있는데 앞을 볼 수 없는 학생들의 특성을 고려해서 손바닥 부조 벽화를 만들어 붙였다. 

 

 

<국립서울농학교>

대학 과정을 빼고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모든 교육과정을 이 학교 안에서 다 이루어지는 것 같다.

전면에 보이는 건물 왼쪽으로 선희궁 터가 있다. 선희궁 영빈 이씨는 영조의 후궁이면서 사도세자의 생모로 이곳은 그녀의 사당이다. 묘는 연세대학교 안의 수경원인데 1968년에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서오릉으로 이장하였고, 수경원 터에는 정자각과 비각이 남아있다. 묘를 옮기면 정자각과 비각도 함께 따라가야 당연한데 도대체 누구 머리에서 나온 발상인지 한심하기 그지 없다. 연세대학교 정문 오른쪽 위에 있는 수경원 터에는 정자각, 빈 비각이 광혜원 건물의 한채를 복원한 연세역사사료관과 함께 있다.

 

 

<국립서울농학교의 제생원 사진>

왼편 사진이 제생원이다. 제생원은 서민들의 의료를 담당한 기관으로 1397년(태조6)에 설치되었다. 빈민을 치료하고 미아를 보호하였으며 의약의 수납과 보급, 의학 교육과 편찬사업도 담당했다. 역사 드라마에서 가끔 볼 수 있는 의녀들을 교육 시킨 곳이기도 하다. 1459년(세조5)에 혜민국에 통합되었다.

 

제생원 사진이 이곳에 있는 이유는 이곳에 일제가 설치한 제생원 소속의 양육부, 맹아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 이후의 제생원의 변화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이순우선생님의 자료에 의함).

 

♣ 1911년 6월 11일 조선총독부 제생원 규정 제정, 9월 1일부터 고아 교양사업을 개시하면서 양육부로 지칭

 1912년 4월 1일 제생원 관제 시행, 양육부(옛 숭의묘)와 의료부(조선총독부의원 구내) 사업 개시 

 1912년 12월 10일 제생원 양육부를 선희궁 내로 이전

 1913년 4월 1일 옛 숭의묘 터에 재생원 맹아부를 설치

 1931년 4월 19일 제생원 양육부는 숭의묘 터로, 맹아부는 선희궁 터로 맞교환하여 이전

 1933년 12월 5일 제생원 양육부를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공덕리로 이전.

 

 

<선희궁 터>

현재 영빈 이씨의 사당 건물만 남아있다. 영빈 이씨 사후, 영조는 후궁 중에서 최고의 예우로 장례를 치뤘다고 하니 규모도 크고 부속건물도 많았을 것이다. 지금의 빈 사당은 일제가 신사로 썼기 때문에 건물이나마 온전하게 남은 것으로 추측한다.

 

 

 

 

<일제에 의해 신사로 용도가 변경된 선희궁 사진>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지... 하긴, 터어키의 성 소피아성당도 무슬림들이 동로마를 점령한 후 모스크로 용도 변경하지 않고 기독교 성전이라고 없앴다면 오늘 날 우리는 그 아름다운 유산을 영원히 보지 못했을 것이다.  

 

 

<선희궁 터 뒤쪽 언덕>

지금은 국립서울농학교의 후면 운동장겸 농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정상 부근에 있는 바위는 정조가 할머니(영빈 이씨) 사당에 와서 마음을 다스렸다는 '세심대'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선희궁 터 뒤쪽 언덕의 금낭화>

현호색과의 여러해살이 풀이다. 돌밭이나 계곡에 자라며 꽃이 여성들의 한복에 매다는 주머니를 닮은 특이한 모양이다.

 

 

<선희궁 터 뒤쪽 언덕의 세심대로 추정되는 바위>

전망 좋은 이곳에서 정조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어떻게 하면 최고조에 이른 세도정치가들 틈에서 제대로 정치를 할 수 있는지 고심하지 않았을까? 정말 전망하기 좋은 곳이다.

 

 

<국립서울농학교 뒤편 언덕에서 본 청와대 쪽>

청와대 건물 일부가 보인다. 청와대가 지척이라 (보안상) 높은 건물이 없고, 인왕산과 북악산을 배경으로 두른 곳이라 전망이 아름답다. 이곳이 서울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이다.

 

 

<국립서울농학교 뒤편 언덕에서 본 남산 쪽>

 

 

<국립서울농학교 뒤편 언덕에서 본 관악산 쪽>

아직 못 가봤지만 앞쪽 근경의 산자락은 수성동계곡일 것이다.

 

 

<국립서울농학교 뒤편 언덕에서 본 북악산, 북한산 쪽>

텃밭은 학생들의 교육을 위해 만든 모양이다.

 

 

<옥인동 GS남촌리더십센터 앞에서 본 인왕산 병풍바위글씨 흔적>

일제는 우리 민족뿐 아니라 우리 자연에게도 몹쓸 짓을 했다. 해방 후에 일제가 쓴 바위글씨를 갈아냈지만 얼마나 크고, 깊게 새겼는지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글씨 자국이 보인다. 각자가 커서 지척에서는 보기 어렵고, 이 위치에서 전체적인 각자 흔적이 가장 잘 보인다. 난 이 바위를 치마바위로 알고 있었는데, 안내자이신 이순우선생님은 병풍바위라고 하셨다.

 

 

 

<인왕산 병풍바위 글씨에 대해 설명 중이신 이순우선생님>

병풍바위의 각자는 1939년 가을 경성(서울)에서 일제에 의해 열린 '대일본청년단대회'를 기념하기 위해 서울 시내의 어디에서나 잘 올려다 보이는 곳인 인왕산 암벽에 새긴 것이다.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의 글씨를 외금강 온정리에 사는 석공 스즈키 긴지로가 1940년 봄부터 가을에 걸쳐 새겼다.

본문 내용의 글자 한자는 사방 열두자에 깊이가 다섯치였고, 총경비는 1만 1천 4백 54원이었다고 한다. 해방 후 이 바위글씨는 치욕적인 흉물로 간주되어 다시 깎아냈지만 오늘날까지 깊은 상처로 남아있다.

 

 

<백운동천 물길>

백운동천 물길은 사진 중앙에 보이는 창의문쪽에서 이곳으로 흘러 아래 아래의 사진의 도로 밑으로 지난다고 한다. 이순우선생님은 시대가 변하면 도로는 없어질 수 있지만 물길은 거의 변하지 않으므로 물길을 눈여겨 보라고 늘 말씀하신다. 하지만 시내 대부분의 하천이 복개가 되어서 그마저 어렵다. 

 

 

 

<인왕산 아래의 동네들>

몇 번의 서촌(웃대) 답사를 통해 이제는 눈에 좀 들어오지만, 전에는 인왕산 아래의 크기는 작고 동네는 많은 이 부근이 늘 궁금했다. 옥인동, 체부동, 누상동, 누하동, 통의동, 청운동, 효자동, 창성동 등... 동네 이름이 무슨무슨 동에서 무슨무슨 길(도로명)로 바뀌어서 앞으로 의미가 없을 지 모르지만 내게 아직은 무슨무슨 동이 익숙하다. 

 

 

<시인 이상의 집터(제비다방)>

헐리기 일보직전의 이상 집터를 동호인(?)들이 구입해서 생전의 이상이 운영하던 제비다방을 사랑방처럼 만들었다고 한다. 우리가 답사를 하기 10여일 쯤전까지는 내부를 둘러보고 영상물도 보았다는데 무슨 일인지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