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절두산 천주교 순교성지

큰누리 2013. 6. 30. 03:20

"천주교인들 때문에 오랑캐들이 여기까지 왔다.

그들 때문에 우리의 강물이 서양의 배로 더렵혀졌다.

그들의 피로 이 더러움을 씻어내야 한다"

 

 

<천주교 전파에서 병인양요까지의 약사>

천주교는 우리나라에 임진왜란을 전후해서 학문으로서 처음 소개된 이후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뒤부터 본격적으로 전파되었다. 천주교는1785년부터 조선에서 박해를 받기 시작했는데 주로 평등사상, 조상숭배와 유일신 신봉에서 따른 문화적 충돌 때문이었다. 순조 시기인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전국에서 300여명이, 1839년 기해박해 때 130여명이 처형당했는데 이 시기에는 기득권을 가진 자들이 정적을 제거하거나 자신들의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천주교도와 정치를 묶어 박해한 경향이 많았다.  

 

흥선대원군이 집권할 즈음에는 교세도 나름 확장되고, 남하를 시도하는 러시아를 대항할 수 있는 대안으로 생각되어 잠깐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1860년 들어 중국에서 선교사들이 학살당하고, 1866년에 유대계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두번이나 강화도까지 들어와서 통상을 요구하다 거절당했다. 

같은 해 미국 상선 서프라이즈호의 평안도 해안 출몰,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 하구에서 통상을 요구하다 관군에 의해 불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어 제2차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인들이 강화도에 상륙하여 은괴, 서적, 물건 등을 약탈하고 통상을 요구하다 문수산성과 정족산성에서 조선군에게 패하고 11월 21일에 중국으로 철수했다. 

 

2차 병인양요는 위정자에게 서양세력에게 깊은 적대감과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켜 결과적으로 천주교 박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프랑스군이 철수한 직후인 11월 21일, 조선 조정은 천주교 신자 색출에 나서 1868년 초까지 전국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 처형되었다.

 

 

  <병인양요와 절두산 성지>

병인양요 전에도 집권자들의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가 계속되고 있었다. 그런데 병인양요 직후부터 박해가 심해진 것은 박해를 피해 중국으로 망명한 신자들의 도움으로 프랑스 함대가 침략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병인양요 당시, 일부 신자들이 뱃길을 안내하거나 박해 상황, 강화도 주둔 조선군의 군사정보 등을 침략자(?)인 프랑스군에게 알려주었다. 대원군과 조정은 프랑스 함대가 정박했던 양화진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함으로써 천주교 신자들에게 책임을 묻고 본보기를 보이고자 하였다. 

 

서소문 밖이나 새남터가 아닌 양화진으로 처형지를 옮기면서 포고한 글에서 당시 사태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  

"천주교인들 때문에 오랑캐들이 여기까지 왔다.

그들 때문에 우리의 강물이 서양의 배로 더렵혀졌다.

그들의 피로 이 더러움을 씻어내야 한다"

 

 

<절두산 성지(양화진)에서 처형 당한 천주교 신자들>

절두산에서 처형된 천주교 신자들의 상당수는 프랑스 함대를 불러들인 '특정 혐의'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기록으로 확인된 숫자는 29명으로 병인박해 때 무명의 신자까지 합쳐 추측하면 서울 2,843명 중 177명 선이라고 한다. 1866. 10. 23부터 이의송과 처 김이쁜, 이의송의 아들 이붕익, 감한여, 최경원, 김중은, 박영래, 김진구, 최수, 김인길, 김진, 강명흠, 황기원, 이기주, 김큰아기, 이용래, 원후정, 박성운, 성연순, 원윤철 등이 효수형을 당했고 박내호와 유바오로는 참수를 당했다.

 

1867년에는 강요한과 조타대오가 무명의 5명과 함께 참수를 당하였다. 절두산에서 1866년 10월 23일부터 1867년 7월 30일까지 한시적으로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이 이루어지는 동안에 새남터나 서소문 밖에서는 신자들의 처형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1868년부터는 서소문 밖에서 다시 처형이 시작되었다.

 

 

<정확한 절두산의 처형 장소>

기록에 의하면 '양화진두에서 군민들을 모아놓고 천주교 신자들의 목을 베어 머리를 달아 경계시켰다' 한다. '진두'는 나루터를 뜻하므로 알려진 것처럼 절벽에서 처형한 것이 아니라 양화 나루터의 약간 언덕진 평지인 현재의 절두산과 꾸르실료교육관 사이의 지점으로 추측한다.   

-이상은 <절두산 순교박물관-절두산 순교성지-성지소개>에서 발췌, 요약한 것임-

 

 

 

<절두산 순교성지 - 꾸르실료교육관>

병인박해 때 절두산(잠두봉) 위 절벽이 아니라 이 건물 앞 평지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정확한 처형지로 추측되는 이 위치는 자료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뒤늦게 알았는데도 주변의 다양한 칼날 조형물 때문에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아래아래의 인물상도 고개를 숙이고 손에 든 몽둥이 같은 물건 때문에 종교적인 엄숙함과 섬뜩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꾸르실료교육관 맞은편의 절두산 순교자 기념탑>2001. 이춘만作

이 쯤에서 형을 집행했을 것이다. 기념탑 중앙의 조형물은 효수와 참수에 쓰는 밧줄, 칼날이 연상되어 섬뜩하다. 상기한대로 절두산에서 처형당한 천주교 신자는 177명 정도로 추정한다.

 

 

 

<절두산 순교성지의 조형물>

성지 안의 비술나무 그늘에 앉아 잠깐 쉬면서 눈앞의 이 조형물을 무심코 들여다보다 깜짝 놀랐다. 매끈한 게 아니라 톱날처럼 생긴 칼날이었고, 양쪽 끝에 손이 보였기 때문이다. 딱, 연상되는 장면은 사형수 앞에서 칼을 들고 춤추는 망나니들...

 

 

 

 <최봉자 수녀作, 팔마를 든 예수상>

최봉자 수녀는 카톨릭 관련 조각작품을 많이 제작한 분이다. '팔마'는 눈에 보이는대로라면 '펜' 같은데 이 작품에서는 더 함축적인 의미인 것 같다.

 

 

 

 

<절두산 순교성지의 건물과 노기남주교 금경축 기념비>

최초의 한국인 주교이자 제10대 서울대교구장을 지낸 노기남 대주교(1902~1984)의 사제 수품 50주년(1980.10.26) 기념비이다. 노기남 대주교가 교구장직을 은퇴한 뒤 머물던 합정동 자택에 있던 것을 옮겼다. 기념비 가운데 구멍에 밧줄을 끼우면 이곳 성지 안에 전시되어 있는 목을 매다는 사형도구와 비슷하다.

 

 

 

 

<교황 요한바오로2세 한국방문기념(1984. 5. 3) 기념상> 

 

 

 

 <순교자를 위한 기념상> 1973. 8. 1. 최종태作

이 조각상 뒤의 절두산성당 안을 둘러보고 싶었는데 일행들과 함께 하는 답사라 들를 시간이 없어 아쉬웠다. 볼 건 많고 시간은 촉박하고...

 

 

 

 <절두산 순교성지의 김대건신부 동상>

 

 

<김대건신부상> 1972. 전뢰진作

聖 김대건(안드레아)은 최초의 한국인 신부로 한국 천주교 성직자들의 103위 성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김대건은 1821년 8월 21일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천주교 신자인 김재준과 고우르술라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신앙 깊은 집안에서 성장한 그는 성직자의 길을 선택했다. 1836년 한국인 최초로 마카오로 건너가 신학문과 신학을 배웠으며 1845년 8월 17일 상해 연안의 김가항 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1846년 9월 17일,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으로 순교할 당시 그의 나이는 26세였다.

김대건신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바오로11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한국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1984년 5월 6일 시성되었다.  

 

 

 

 

 

<절두산 순교성지의 동상>

척화비 옆에 앉아 있는 중국 복장을 한 이분은 김대건 신부이다. 동상 뒷면에 김대건 신부라고 쓰여있다.

 

 

 

<척화비>

'서양 오랑캐가 침범했는데 싸우지 않는 것은 곧 매국이다'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비이다. 세상은 팽팽 돌아가는데 눈은 꼭 감고, 보루를 붙들고 몸부림치는 답답한 위정자, 절박한 상황, 국수주의, 입 떡 벌린 서구 열강... 복제품이라고 한다.

 

 

 

<병인박해 100주년 기념성당>

 

 

 

<십자가의 길> 조형물들

서소문 밖 약현(중림동)성당에서처럼 <십자가의 길> 비슷한 시리즈 조형물은 이어 답사한 천주교 관련 코스에서 또 만났다. 마지막의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을 묵상합시다'라는 조형물 앞에서 수녀님과 일행들이 경건한 모습으로 기도하며 찬송가(?)를 부르고 있었다.

 

 

 

 

 

<십자가의 길과 남종삼 흉상, 박순집묘 길>

 

 

 

<절두산성당의 천주교 순교자, 신자 관련 비석들>

왼쪽부터 박순집 일가의 공적비, 남상교의 청덕거사비, 聖 남종삼의 흉상, 성 남종삼의 순교사적비, 은언군과 그의 부인인 송마리아의 묘비, 해운당대사 의징지비이다. 박순집 일가는 순교자들의 시신을 발굴하는데 큰 공을 세워 순교자들의 행적 증언자로 불린다. 

남상교는 남종삼의 백부이자 양부이다. 현풍 현감으로 재직 당시 어려울 때마다 많은 선정을 베풀어 세운 비이다. 남종삼은 승지(요즘의 대통령 비서)라는 꽤 높은 현직에 있었음에도 병인박해 때 참수형을 받고 50세에 서소문에서 순교했다.

 

 

 

<남상교의 청덕거사비, 聖 남종삼의 흉상, 성 남종삼의 순교사적비>

 

 

 

<은언군과 그의 부인인 송마리아의 묘비와 해운당대사의 의징지비>

제 명줄을 못 지킨 사도세자의 후실 아들인데 삶이 오죽 지난했을까, 은신군과 은언군... 그 누군들 정통이 아닌 둘러리 삶을 살고 싶었겠는가? 보이지 않은 삶의 무게가 이들을 눌렀을 것이며, 그 상황을 탈피하여 사후의 삶을 보장받는다는 천주교를 신봉했을 것이다. 그 기약 없는 환상마저 세상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꽃은 찬란했다!>

절두산 성지의 유래야 어쨌든 화사한 봄날의 자목련은 찬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