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천주교 순교성지 새남터기념관

큰누리 2013. 7. 9. 14:54

위치 : 용산구 이촌동 199-1번지. 1호선 용산역과 한강철교 사이에 있는 뽀족한 종탑의 3층 기와 건물.

 

≪새남터의 유래 및 역사

새남터는 조선 시대 도성 밖 남쪽 한강변에 있던 노들(한자어 음역 사남기(沙南基)을 말하며 노량진과 배로 왕래하던 나루터였다. '새남터'의 뜻은 '새나무 터'의 준말로 '새나무'는 풀과 나무를, '새'는 억새를 뜻한다. 이곳은 숲이 울창해서 조선 초기에 군사들의 훈련장으로 사용되었고, 국가에 중죄를 지은 국사범의 처형장으로도 사용되었다. 1456년(세조 2)에 단종의 복위를 꾀한 사육신들도 이곳에서 처형되었다.

 

새남터가 순교자들의 피로 물들기 시작한 것은 1801년부터 1866년까지이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처형된 것을 시작으로 1839년의 기해박해 때 앵베르 주교를 비롯한 프랑스인 신부 3명이, 1846년 병오박해 때 한국인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과 순교일지인 <기해일기>를 남긴 현석문이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되었다. 1866년의 병인박해 때에는 베르뇌 주교를 비롯한 프랑스인 신부 6명과 우세영, 정의배 등의 천주교인들이 군문효수되었다.

서울에서 서소문 밖 네거리가 '평신도들의 처형지'였다면 새남터는 '사제들의 처형지', 절두산은 병인박해 때 '평신도들의 한시적인 처형지'였다.

 

PS : 군문효수란 조선시대에 대역죄를 지은 국사범들의 목을 잘라 그 목을 올빼미가 매달린 것처럼 군문(軍門)에 높이 매달던 형벌이다. 목을 벤 것(참수)도 모자라 그 목을 장대에 매달아 걸었으니(효수) 죽은 자는 재차 능멸 당하고, 보는 이들은 두려움에 떨었을 것이다.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한 극형으로 천주교 박해 당시 주로 외국인 신부를 처형할 때 사용되었다. 프랑스인 신부들과 중국인 주문모 신부, 김대건 신부 등이 군문효수되었다.

 

새남터와 신유박해(1801년)

조선의 천주교는 세계에서 유래를 찾기 힘든, 사제가 없는 특이한 형태로 신앙을 받아들이고 교회를 세웠다. 1795년 북경 교구에서 중국인 주문모 신부 파견한 이후 6년 만에 6.000여명으로 신자가 늘어났다. 1801년, 배교자의 밀고로 주문모 신부가 쫓기면서 자신 때문에 주변의 신도들이 희생되자 자수하여 최초의 새남터 순교 사제가 되었다. 새남터에서 순교한 외국인 사제들이 1984년에 대부분 시성(성인으로 추대)되었는데 특이하게 제외된 분이기도 하다.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서 활동하는데 뒷바라지를 했던 주변의 독실한 신도들은 1801년 신유박해 때 가장 먼저 맞아죽었다. 서소문 밖 처형장에서는 정약용의 세째형인 정약종과 최창현, 강완숙, 손경윤 등을 비롯한 신도들이 줄줄이 참수되었다.

 

 

새남터와 기해박해(1839년)

1831년 북경 교구로부터 조선 교구가 독립되고, 1836년부터 1837년에 프랑스인인 모방, 샤스탕 신부와 앵베르 주교가 입국한다. 이후 1년만에 신자가 9,000명으로 늘어났다. 당시 소년이었던 최양업, 최방제, 김대건은 프랑스 사제의 도움으로 마카오로 유학을 떠나고 몇몇 신자들은 라틴어와 신학을 배운다. 그러나 1839년, 벽파인 풍양 조씨가 시파인 안동 김씨로부터 정권을 빼앗는 권력투쟁 과정에서 천주교도들이 희생양이 되었다.

 

1834년(헌종1), 8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 헌종을 순조 비인 순원왕후가 수렴청정하면서 안동 김씨가 실권을 잡았는데 천주교에 대해 관용적이었다. 1839년 실권자인 김유근이 물러나면서 반대편인 벽파의 이지연, 조병현, 정기화 등이 시파를 제거하기 위해 '천주교도는 무부무군(無父無君)'이라 하여 대왕대비의 척사윤음을 내세워 잡아들이면서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었다.

중심 인물인 정하상, 유진길, 이광열, 남명혁 등을 비롯하여 118명의 신도가 참수, 장살 또는 그 후유증으로 희생되었다. 프랑스 사제인 앵베르, 모방, 샤스탕신도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 자수한 후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되었다. 신도들은 삼엄한 감시를 뚫고 20일 후 프랑스 사제들의 시신을 수습해 노고산(서강대학교 뒷산)에 매장했다가 4년 후 삼성산에 안장했다.

 

 

새남터와 병오박해(1846년)

1846년, 한국인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안드레아)과 천주교도들의 순교를 <기해일기>로 남긴 현석문이 참수된 사건이다. 김대건은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김제준의 아들로 1822년 충남 당진군 우강면에서 출생했다. 7세 때 용인군 내사면으로 이사했는데 1836년 은이공소를 방문한 모방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신학생 후보로 발탁되었다. 앞서 발탁되어 유학을 준비하던 최양업, 최방제와 서울에서 합류하여 1837년 모방 신부의 소개로 마카오로 건너갔다. 최방제는 얼마 뒤 병으로 마카오에서 죽고 말았다. 이들은 마카오 파리외방전교회에서 수학하던 중 현지에서 민란이 일어나 필리핀으로 두 차례나 피신을 하기도 했다. 김대건은 20세인 1842년에 두 차례나 귀국을 시도했지만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와 감시 때문에 실패하고 마카오로 되돌아갔다.

 

1844년 최양업과 김대건은 연령 미달로 사제품이 아닌 부제품을 받고 1845년 서울로 들어오는데 성공한다. 선교사를 영입하기 위해 다시 상해로 갔다가 사제품을 받고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함께 재입국에 성공한다. 이후 사제로서 교세 확장에 전념했으나 2개월이 전부였다. 1846년 5월, 서해로 선교사 영입을 할 루트를 찾기 위해 백령도로 갔다가 돌아오던 중 순위도에서 붙잡혀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3개월의 문초 끝에 9월 15일 사형 선고를 받고 이튿날 26세의 나이로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되었다. 시신은 모래사장에 가매장 → 40일 후  이민식에 의해 미리내에 안장 → 1901년에 용산 성직자묘지 → 1951년 두개골을 가톨릭대학으로 안치하였다. 1984년 새남터를 방문한 교황 요한바오로2세에 의해 시성되어 성인품에 올랐다.

 

 

새남터와 병인박해(1866년)≫

철종 즉위 후, 섭정을 하던 순원왕후의 천주교에 대한 호의로 천주교는 교세를 확장하고 신학교까지 설립한다. 그러나 고종 즉위 후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하면서 1866(고종 3)년부터 1873년까지 천주교를 탄압했다. 처음에는 천주교에 대해 관용적이었던 흥선대원군이 러시아의 남하정책, 문호개방 요구와 관련하여 영, 불, 조선이 동맹하여 러시아의 남하를 막고자 한 정책이 시기를 놓치고 프랑스 함대가 기해박해 때 처형된 프랑스 신부들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며 안면도, 양화진까지 들어오고 강화도에서는 전투까지 벌어지자 상황이 돌변했다.

 

'양이'로 더렵혀진 한강을 (양이를 불러들인) 천주교인들의 피로 씻는다' 면서 천주교도와 외국인 선교사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평신도들은 주로 한강 변의 절두산(양화진)에서 참수되었고, 사제들은 새남터에서 참수되었다. 새남터에서 순교한 사람은 프랑스 주교인 베르뇌와 신부인 브르트니에르, 볼리외, 도리, 푸르티에, 프티니콜라 등의 6명을 비롯해 한국인인 정의배, 우세영 등이었다. 이들 중 푸르티에, 프티니콜라 신부를 제외한 8명이 성인품에 올라 새남터는 총 11명의 성인을 배출한 최대의 순교성지가 되었다.

 

 

<천주교 순교성지 새남터기념관에 있는 참수 장면 미니어처>

자료 조사를 하다보니 참수 장면에 관한 내용이 꽤 자세히 나와있었다. 죄인은 웃도리를 벗기고 양쪽 귀에 화살을 꽂으며, 얼굴에 회칠을 한 후 몸과 머리를 장대에 묶는다. 사형을 집행히는 병졸이나 망나니는 (술에 취해) 물을 죄인의 머리에 내뿜으며 칼춤을 추다 목을 벤다.

 

 

<천주교 순교성지 새남터기념관>

 

 

<천주교 순교성지 새남터기념관>

지도에서 위치 검색을 하면 '천주교 순교성지 새남터성당'으로 뜬다. 새남터 형장의 본래 위치는 서부 이촌동 아파트 부근이라고 한다. 한국 천주교회 측에서 1890년부터 새남터 순교 터를 매입하고자 했으나 경부선 철도공사로 실패했다. 1956년에야 겨우 본래의 순교 터에서 북쪽으로 500보 쯤 되는 곳(現 용산구 이촌동)에 현양비를 세웠다.

새남터 성지는 1950년에 순교기념지로 지정되었고, 1956년에 '가톨릭 순교성지' 기념탑을 세웠다. 현재의 건물은 명지대 건축학과 박태연 교수가 설계한 것이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성 앵베르 주교, 성 모방 신부, 성 샤스탕 신부, 성 베르뇌 주교, 성 브르트니에르 신부, 성 볼리외 신부, 성 도리 신부, 성 우세영 알렉시오 등 9명의 유해가 이곳에 안치되어 있다.

 

 

<천주교 순교성지 새남터에서 순교한 성인들>

 

 

 

<새남터에서 최초로 순교한 사제 - 중국인 신부 주문모>

1795년, 최초로 한국(조선)에 파견된 신부이다. 6년 동안 박해를 피하며 신도를 6,000명으로 늘리는 등 큰 공헌을 했지만 1801년 배교자의 밀고로 사제로서는 최초로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특이하게(!) 시신도 찾지 못했고, 프랑스인 사제들처럼 사후에 성인으로 오르지도 못했다.

 

 

<천주교 순교성지 새남터기념관의 성모자상>

 새남터기념관의 성모자상이나 성인상은 대부분 한복 차림이다. 이후에 들른 용산신학교(성당)의 성모자상도 한복차림이었는데 그 어떤 종교 아이콘보다 친근하고 느낌이 좋았다.

 

 

 

<천주교 순교성지 새남터기념관 성모자상 앞의 촛불>

이날, 우리는 하루 종일 마포와 용산 지역 답사를 했고 마지막으로 새남터 순교성지에 들렀다. 절두산성지에서부터 망원정, 효창공원을 거쳐 한강철교, 용산 수위탑 등을 둘러보며 8시간 정도를 걸었다. (합정에서부터 효창공원까지는 지하철로 이동) 동행한 이 중의 한분은 발에 물집이 잡혀 일주일 여를 고생했고, 관절염에 족저근막염 환자인 나는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을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이곳이 마지막 코스인 덕분에 촛불도 보고 성모의 날을 준비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천주교 순교성지 새남터기념관 내부>

새남터 순교성지에 있는 대부분의 인물상이 한복차림이다. 정면의 한국화 초상화는 김대건 신부이다. 사진 오른쪽 앞으로 김대건 신부와 신유박해, 기해박해 때 순교한 프랑스 사제들의 친필 서한이나 당시에 사용한 성경들이 전시되어 있다. 소름 끼치는 참수 장면 미니어처도 이곳에 있다.

 

 

<천주교 순교성지 새남터기념관의 참수 장면 미니어처>

이 글에 올린 맨 윗 사진은 아래 사진을 클로즈 업 한 것이다.

 

 

<새남터에서 순교한 사제 및 평신도 성인들>

김대건 신부와 프랑스인 사제들, 우세영, <기해일기> 저자 현석문, 정의배 성인 등의 모습이다.

 

 

<새남터에서 순교한 사제 및 평신도 성인들>

♣ 위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 샤스탕 야고보 신부, 모방 베드로 신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현석문 카를로. 

 아래 왼쪽부터 베르뇌 시메온 주교, 브르트니에르 유스토 신부, 도리 베드로 신부, 볼리외 베르나르도 신부, 정의배 마르코, 우세영 알렉시오이다.

 

 

<천주교 순교성지 새남터기념관의 사료들1>

왼쪽부터 성경직해, 신명초행, 천주성교공과.

 

 

 <천주교 순교성지 새남터기념관의 사료들2>

왼쪽은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의 친필 서한, 오른쪽은 샤스탕 야고보 신부의 친필 전교 보고서이다. 앵베르 주교의 한국명은 범세형(范世亨), 샤스탕 신부의 한국명은 정아각백(鄭牙各伯)이라 쓰여있다.

 

 

<천주교 순교성지 새남터기념관의 사료들3>

김대건 신부의 친필 서한과 모방(한국명 나백다록 : 羅伯多祿) 신부의 친필.

 

 

 <천주교 순교성지 새남터기념관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의 벽화들>

2층은 성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천주교 순교성지 새남터기념관 2층의 성당>

규모는 아담하지만 제단 쪽의 벽화와 지붕, 천정이 돋보인다. 불화(佛畵)를 연상 시키는 벽화, 한옥풍으로 꾸민 그 위의 문창살과 제단 천정 등이 서양식 성당과 다른 독특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성모의 날을 맞아 꽃단장 중인 새남터성당의 성모상과 뒤쪽의 예수상>

카톨릭계 고등학교를 졸업한 내게 익숙하고 그립기조차 한 장면이다. 종교로는 인연을 맺지 못했지만 성모의 날, 꽃으로 둘러싸인 교정의 성모상과 종이컵 속에서 흔들리던 촛불들은 아직도 곱게 가슴에 남아있다. 

 

 

 

<천주교 순교성지 새남터기념관 마당의 김대건 신부상>

 

 

<천주교 순교성지 새남터기념관 마당의 척화비와 머릿돌>

척화비는 복제품, 오른쪽의 머릿돌은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바오로2세의 방한을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철로 위에 놓인 육교에서 본 천주교 순교성지 새남터기념관>

 

특이한 점은 1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천주교가 이 땅을 피로 물들이며 자리를 잡아가는데 신교는 전혀 접근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천주교 박해가 끝나고도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야 선교사들이 근대화 바람을 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