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림동 약현성당> -성당 안내문-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중림동 149번지 2호
지정번호 : 사적 252호 / 시대 : 1892년(고종 29)
중림동 약현성당은 우리나라에 세워진 최초의 벽돌조 서양식 교회 건축물이다. 약현(藥峴)은 이곳에 약초 재배지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성당은 수많은 순교자의 처형지였던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지'를 염두에 두고 설립되었다. 이들 중 聖 정하상 바오로와 聖 남종삼 요한을 비롯한 44명의 순교자가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 때 시성(諡聖)되었고, 2009년 현재 25명의 순교자가 시복청원 중이다.
이 성당은 1887년 현재의 순화동에서 공소(사제가 없는 지역신자들의 모임)로 시작하였다. 그 뒤 조선교구 제 8대 민 주교(뮈텔)는 1891년 이곳 대지를 매입하고 정 두세(Doucet) 신부를 초대 본당 주임으로 임명하여 성당 건립의 책임을 맡겼다. 명동성당을 설계한 코스트(Coste) 신부의 설계로 1891년 착공되어 1892년 완공되었고, 1893년 4월 23일 축성되었다. 1896년 한국에서 최초로 사제서품식이 이곳에서 거행되었다.
이 성당은 폭 12m, 길이 32m, 종탑의 높이 26m이며, 내부 공간은 좌우 열주에 의해 3개열로 구분되는 삼랑식 평면구성이다. 창은 반원아치형이며, 중앙 천장은 갈빗대 모양의 뼈대가 있는 뾰족 궁륭천정(pointed barrel vault)을 지닌 고딕풍의 건축양식이다. 이후 한국 교회 건축의 모델이 되었다. 1998년 방화로 성당이 일부 소실되었으나 1999년 원형을 복원하였다.
<서소문 순교 성지> -약현성당 석비-
우리 겨레는 하느님을 찾아 스스로 믿음을 일으키고 실천하였다. 천주교회가 이 땅에 세워진 1784년부터 100년이 넘도록 천주교는 참혹한 탄압을 받았다. 이런 박해를 겪는 동안에 예수 그리스도께 향한 믿음과 겨레의 구원을 위하여 10,000명이 넘는 교우들이 기꺼이 목숨을 바쳤다.
서대문 밖 네거리로 불리던 이곳은 1801년 이래로 100명이 넘는 교우들이 순교한 곳으로 한국에서 가장 큰 성지이다. 더욱이 이곳에서 목숨을 바친 44분이 1984년 5월 6일 성인으로 선포됨에 따라 이곳은 영광의 땅이 되었으며... 하략
≪3대 천주교 박해≫
♣ 신유박해(1801(순조 2)년.
사건 개요 : 1800년 정조 승하 후 대왕대비 김씨의 수렴청정으로 집권한 노론 벽파에 의해 시작된 천주교 박해 사건. 1801년 1월, 박해를 예상하고 감추려던 명도회 회장 정약종의 (천주교 관련) 책 궤짝이 발각되어 같은 해 2월 정약종, 홍낙민, 최창헌, 최필공, 이승훈 등이 서소문에서 참수되고 지방으로 박해가 확산되었다.
3월 2일 신도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 자수한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4월 19일 새남터에서 외국인 사제 최초로 군문효수 되고, 이어 전라도의 유항검이 참수되었다. 9월 15일 황사영의 백서 사건이 발생하고, 대왕대비의 척사윤음이 반포되었으며 16명이 처형되었다.
순교자 : 지도자로는 주문모 신부가 새남터에서, 정약종, 홍낙민, 최필공, 이승훈, 최창헌, 강완숙, 손경윤 등의 지도급 신자들은 서소문에서 처형되었다. 기타 약 100명의 평신도가 처형되고, 400여명이 유배를 당했다.
결과 : 최초의 대규모 박해로 천주교도를 국가의 원수로 단정하여 박해의 법적인 근거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신유박해로 인해 교회의 지도급 인사들이 거의 사라졌고, 살아남은 교인들은 산간벽지로 숨어들어 한국 천주교는 빈사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 기해박해(1839(헌종 5)년.
사건 개요 : 헌종이 8세의 나이로 1834년에 즉위하자 순조 비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고 오빠인 김유근이 보필을 하면서 안동 김씨가 집권하게 되었다. 이후 김유근은 병에 걸려 병상에서 세례를 받았고 안동 김씨는 천주교에 대해 관용적인 태도를 취했다.
건강 악화로 김유근이 정계에서 은퇴한 후 천주교를 적대시하던 벽파 우의정 이지연이 정권을 잡자 조병현, 정기화 등이 천주교도를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역적이라며 천주교도 43명을 잡아들였다. 대부분 배교하고 석방되었으나 남명혁, 박희순 등 9명은 배교를 거부하고 처형되었다. 5월 25일 대왕대비의 척사윤음 반포로 전국적으로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었다.
순교자 : 앵베르 주교, 샤스탕 신부, 모방 신부는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되고 정하상, 유진길, 조신철, 이광열, 남명혁, 박희순 외 2명의 궁녀가 참수되었다.
결과 : 풍양 조씨가 천주교에 대해 관용적이었던 안동 김씨로부터 정권을 빼앗기 위해 천주교도를 희생양으로 삼은 정치적 사건으로 이후 정군이 풍양 조씨에게 넘어갔다.
♣ 병인박해(1866(고종 3)년.
사건 개요 : 1864년 러시아가 국경에서 통상을 요구하자 당황한 조정에 천주교인들이 조선에 있는 대주교를 통해 영, 불, 조선이 동맹하여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저지할 것을 건의했다. 지방에서 포교 중이던 프랑스 신부들과 연락이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에서 러시아가 잠잠해지자 조정은 천주교도를 처형하라고 흥선대원군에게 압박을 가했다. 마침 중국에서 서양인들을 처형한다는 사신들의 보고를 받은 대원군은 천주교 박해를 시작했다.
1866년 2월과 3월에 베르뇌 주교를 비롯한 프랑스 신부와 지도급 인사들이 대부분 처형되었고, 7월에 리델, 10월에 페롱, 칼레 신부가 중국으로 탈출했다.
순교자 : 베르뇌 주교, 브르트니에르 신부, 도리 신부, 볼리외 신부, 푸르티에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와 우세영, 정의배는 새남터에서 처형되고, 남종삼, 홍봉주 등은 서소문 형장에서, 병인양요 후 평신도들은 주로 양화진(절두산)에서 처형되었다. 전국에서 8,000여명의 신도들이 처형되었다.
결과 : 9월 12일 병인척사윤음이 반포되고 박해가 일단락되었으나 10월 초 중국으로 탈출한 신부의 안내로 프랑스 함대가 출병하여 병인양요가 발발함으로써 박해가 다시 시작되어 한국 교회 사상 최대의 순교자가 발생했다.
<중림동 약현성당 입구>
<약현성당 정문에서 성당으로 이르는 언덕의 '십자가의 길' 조형물>
비슷한 내용의 조형물이 절두산 성지에도 있다.
<약현성당에서 내려다 본 서소문 밖 형장 추정지>
전면에 보이는 서소문공원이 서소문 밖 형장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현재까지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고 한다.
<약현성당 정문에서 성당으로 이르는 언덕의 순교자 탑>
<약현성당 순교자 탑 앞의 정하상 바오로像과 서소문 순교 성지 비문>
정하상은 신유박해(1801년) 때 순교한 정약종의 아들이며, 다산 정약용의 조카이다.
<약현성당과 신혼부부가 탈 차량>
주일인 이날, 마침 결혼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성당 옆의 서소문 순교 성지를 보고 싶은 욕심과 결혼식 때문에 내부 촬영을 포기했다. 앙징맞은(?) 신혼부부 차량을 참으로 오랜만에 보았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작은 성당에서 가까운 사람만 초대했을 조용한 결혼식이었다. 피로연도 성당과 서소문 순교성지 기념관 사이에 있는 마당에서 테이블 위에 흰종이를 깔고 뷔페식으로 조촐하게 벌였다. 몇 천만원씩 들여 내노라 하는 호텔에서 하는 호화 결혼식보다 차분하고 보기에도 좋았다.
<약현성당>
<서소문 순교 성지 전시관 내부>
<서소문 밖 형장의 군문효수 및 참수 미니어처>
서소문으로 보이는 배경에 참수형을 당한 뒤 장대에 걸린(군문효수) 죄인의 머리가 보인다. 참수를 당하기 직전의 죄수가 밧줄에 묶여 있고, 특이하게 중앙 쯤에 물 먹인 창호지를 켜켜이 얼굴에 붙인 죄수도 보인다. 아마 박해 당시에 물 먹인 창호지로 질식사 시킨 죄수도 있었던 모양이다.
♣ 군문효수는 앞글에서 설명한 것처럼 대역죄인의 목을 베어 장대에 매달아 군문(성문)에 건 극형이다. 목을 벤 것(참수)으로도 모자라 그 목을 다시 장대에 매달아(효수) 걸었다.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한 성인들>
좌로부터 전경협, 박희순, 김유리대(이상 3명은 궁녀), 정하상과 어머니 유소사, 여동생 정정혜 일가, 맨 오른쪽은 조신철 초상이다.
<서소문 순교 성지 전시관에 전시된 김대중대통령의 세례증명서>
<서소문 순교 성지 전시관에 전시된 황사영 백서 모사본>
황사영 백서는 초기 교회 평신도 지도자였던 황사영 알렉시오가 작성하여 동료 황심의 이름으로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려고 했던 비밀서한이다. 배론(충북 제천군 봉양면 구학리)에서 작성되었으며 완성된 날짜는 1801년 9월 22일(음)이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 주문모 신부와 신도들이 처형되자 황사영은 그 실상을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알리고,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방법으로 서양 선박의 파견을 요청하기 위해 서한을 작성하였다. 황심이 서한을 북경으로 전달하기로 했으나 밀고에 의해 1801년 9월 15일 체포되었고, 황사영은 9월 29일 체포되었다.
백서는 62×38cm 크기로 총 122행, 13,331자이며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론은 1행부터 5행까지로 구베아 주교에게 드리는 인사와 서한의 배경, 본론은 6행부터 90행까지로 신유박해의 전말과 주문모 신부의 순교까지 다루고 있다. 신유박해 순교자 36명과 밀고자, 척사론자 6명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결론은 91행부터 122행까지로 자신이 생각한 선교방안을 제시했다.
황사영 백서는 당대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백서 원본은 현재 교황청 민속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중림동 약현성당 문밖>
가톨릭대학교 교회음악 대학원 쪽 출입문이다. 이 문을 나서 남쪽 언덕으로 오르면 경기여자상업고등학교가 있고, 그곳에서 공원 안으로 들어가면 손기정기념관(구 양정고 터)이 있다.
우리의 이날 명동, 서울역 주변 답사 코스는 명동성당- 나석주 의사 의거 터- 서울시청 구청사(현 서울도서관)- 환구단- 한국은행 본관(한국화폐박물관)- 숭례문- 서울역사- 중림동 약현성당과 서소문 순교 성지 전시물관- 손기정기념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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