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05.11의 답사 코스는
명동성당(이재명 의거 터)- 나석주 열사 동상- 남대문로 한국전력 사옥- 구)미국문화원- 구)서울시청(서울도서관)- 원구단- 한국은행 본관- 구)제일은행 본점- 숭례문- 약현성당- 손기정기념관이었다.
<충무로역 7번 출구에서 명동성당으로 들어가는 길에 본 명동성당 옆 모습>
젊은 시절에는 롯데호텔 쪽에서 들어갔기 때문에 명동성당을 못찾아 한참 헤맸다. 일본 관광객들과 중국 관광객들로 명동은 북새통...
명동에서 헤매는데 길가에 진고개(泥峴)이란 표석이 보였다. 예전에는 이곳이 남산골의 고개였고 비만 오면 진흙에 발이 빠져 진고개라고 불렸다 한다. 조선시대에 명동은 성안이기는 해도 외곽에 지나지 않았는데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인들에 의해 번화가가 되었다. 얼핏 현재의 명동성당 자리는 초창기 천주교도였던 김범우의 집터였다는 내용이 생각났다.
<명동성당 전경>
이날의 답사에서 나는 명동을 헤매느라 30분 정도 늦었기 때문에 명동성당을 둘러볼 기회를 놓쳤다. 답사를 마치고 나오는 일행과 합류하느라 명동성당 겉모습만 보고 지나쳤다. 예전이랑 달라진 게 있다면 성당 정면에서 정확한 대칭으로 팔을 벌리고 있던 하얀 예수님像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YWCA여인상>
명동성당 입구 맞은편에 있는데 성당과 관련된 조상과 느낌이 달라 다시 확인해 보니 YWCA여인상이었다. 예전에 명동성당 맞은편에 7층인가 되는 YWCA회관이 있었는데 지금도 그대로인지 궁금하다. 그것을 확인하지 못할 정도로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명동성당 입구의 이재명 의사 의거 터 표석>
이재명 의사는 1890년(고종 27)에 평북 선천에서 태어났다. 1904년 미국노동이민사 모집으로 하와이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한일협약이 체결되자 국권회복을 위해 귀국했다. 1909년 1월 순종과 동행하여 평양을 순행하던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려다 안창호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연해주로 갔다. 안중근 의사의 하얼삔 의거 후 귀국하여 조창호, 김정익, 이동수 등과 함께 이완용, 송병준, 이용구 등의 매국노를 암살하기로 했다.
1909년 12월 22일 종현천주교회당(현재의 명동성당)에서 열리는 벨기에 황제 레오폴트 2세의 추도식에 참석한 이완용을 칼로 피습했으나 죽이는데는 실패하고 어깨에 중상만 입혔으며, 그 자리에서 일경에게 중상을 입고 체포되어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이듬해 순국하였다.
<명동성당 입구>
1980년대에 명동성당, 혹은 앞에서 열렸던 민주화 시위, 노동자들의 천막 시위, 무명가수들의 거리공연이 생각났다.
<명동거리>
<서울지방 우정청 앞의 홍영식 동상>
한국 우정의 아버지로 불리는 홍영식(1855~1884)은 개화기의 선각자로서 우리나라 근대 우편의 창시자이다. 1884년 4월 22일 우정총국을 창설하여 초대 우정총판이 되었다. 같은 해 11월 8일 서울 인천 간에 최초로 우편업무를 개시함으로써 새로운 우편시대를 열었다. (이하 하략, 동상의 발문에 의함)
우정의 아버지라는 점에서는 선각자이지만 일본의 힘을 빌어 우정총국 개관식 석상에서 갑신정변을 일으킨 것은 무리였다. 어쨌거나 갑신정변의 실패로 홍영식은 멸문을 당하고 집은 역적의 집이라 하여 국가에 환수되었다가 제중원 터로 하사되었다.
몇년 전에 홍영식 묘에 들른 적이 있는데 그래도 누가 시신을 수습해서 매장을 했는지 가파른 산꼭대기에 있었다. 그 동안 답사한 수많은 묘들 중에서 어사 박문수 묘와 더불어 가장 오르기 힘든 곳이었던 기억이 난다.
<남대문 시장>
우리나라 제일의 재래시장이 매국노 송병준에 의해 제대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시장 바깥쪽은 외국 관광객들로 북새통이다.
전에 수수부침을 사먹으러 일부러 이곳에 들르곤 했는데 먹자골목은 여전히 살아있지만 파는 내용물이 달라졌다. 길게 줄을 선 곳은 주로 호떡부침을 파는 곳이었다. 기대를 안 하고 사먹었는데 1,500원 가격에 비해 상당히 맛 있었다.
<상동교회>
신세계백화점 본점 옆에 구)제일은행 본점이 있고 그 옆에 상동교회가 있다. 1885년에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 스크랜톤이 1889년에 이곳에 터를 닦고, 1900년에 교회를 지었다.
이후 상동교회는 전덕기 목사의 주도로 민족운동의 근거지가 되어 헤이그 밀사 파견을 주도했고, 신민회의 산실이 되었다. 이준, 주시경, 남궁억, 이동녕, 이회영, 이승만, 김구, 최남선, 장도빈 등이 이곳을 거쳐갔다.
<복원된 숭례문>
지정 번호 : 국보 제1호.
지정일 : 1962. 12.20.
숭례문은 조선 태조 7년(1398)에 한양도성의 남쪽 대문으로 세워졌다. 그 후 세종 30년(1448), 성종10년(1479), 고종 연간에 큰 수리가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매일 밤 인경(10시 무렵)에 문을 닫았다가 다음 날 아침 파루(4시 무렵)에 문을 열었는데, 이 때 문루에 종을 달아 시간을 알렸다. 장마나 가뭄이 심할 때는 임금이 몸소 기청제와 기우제를 지내는 등 숭례문에서는 국가의 중요한 행사가 거행되곤 하였다.
석축 위에 세워진 중층 누각은 장식이 간결하고 내부 구조가 건실하여 조선 초기의 건축 기법을 잘 간직하고 있다. 1907년부터 1908년 사이에는 좌우 성곽이 철거되었으며, 한국전쟁 때 피해를 입어 1961년부터 1963년 사이에 해체보수를 하였다. 2008년 2월 10일 방화 사건으로 크게 훼손되어 2013년 4월까지 복구하였으며, 이때 성곽도 함께 복원하였다.
(현지 안내문에 의함)
<숭례문에서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시대에 따른 성곽 돌들>
시대에 따른 성곽 돌들의 차이가 숭례문 주변의 성곽에도 적용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동글동글하고 작은 태조 시기, 메주같은 세종 시기, 네모 반듯하고 큰 숙종 시기의 돌이 다 모여있다.
인물이 찍히는 것을 피하기 위해 한참을 기다려도 아래의 커플은 사진촬영에 취해 이러고 있었다.^^
<숭례문 홍예와 안팎, 중앙에서 본 천정의 그림>
<복원된 숭례문의 달라진 점, 하나>
노인의 허리 쯤에 해당하는 아래 부분은 이전에는 땅속에 묻혀있었지만 복원하면서 드러낸 부분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석축의 색깔이 거무스름하고 숭례문 안쪽 양쪽에 몇단의 계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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