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대마도 여행5 - 코모다하마 신사와 돌지붕 창고(이시야네)

큰누리 2013. 12. 27. 20:46

대마도는 우리나라의 제주도보다는 작고 거제도보다는 큰 섬으로 일본 본토의 4개섬을 제외하고 3번째 규모라고 한다. 하지만 예로부터 산이 많고 지형이 농토가 적어서 식량 자급자족이 어려웠기 때문에 우리나라나 중국 등을 노략질하기 일쑤였다. 지금도 총인구가 4만여 명에 지나지 않으며, 그 중 절반 가량이 우리가 처음 배로 도착한 이즈하라마치에 몰려있다.

우리나라에서 대마도로 가는 방법은 부산에서 정기적으로 운행하는 배편이 있고, 김포공항에서 주 3회 운행하는 20인승 비행기가 있다고 하는데 그 내용은 잘 모르겠다.

 

우리는 2박을 모두 이즈하라마치의 쯔시마 산장에서 묵었다. 산장 정도면 방마다 당연히 제공되는 전기포트가 없어서 층별로 복도에 놓인 전기포트를 공동으로 써야 했다. 숙소 시설은 괜찮은 편이었는데 문제는 식사였다. 대마도에서는 20여명의 단체 손님을 받을 수 있는 숙소가 흔치 않아서인지 주방시설이 열악했다. 계약대로라면 이틀 아침을 쯔시마산장에서 먹었을 것이다. 그런데 밤에 일행들이 모여 이야기할 곳이 마땅치 않아 주방에 모이게 되었는데 눈썰미가 예리한 우리 일행 중의 몇 분이 주방 내부를 보게 되었다. 사방에 곰팡이가 핀 주방 개수대와 조리대를 보고 우리는 경악했다. 주인이 나서서 수습을 하려 했지만 우리는 비위생적인 주방과 아무렇게나 수북히 쌓인 재료를 보고 식사를 거부했다. 결국 급하게 첫날과 둘째 날에 걸쳐 두 끼를 먹은 식당에서 아침을 먹기로 타협을 했다.

 

 

<우리가 이틀 밤을 묵은 숙소 쯔시마산장에서의 주변 조망>

밤에는 산 아래로 가물가물 민가의 불빛이 보이고, 아침에는 이름 모를 새 울음 소리에 주변에 삼나무가 빽빽한 게 주변환경이 좋다. 문제는 불결한 먹거리였다.

 

 

 

<쯔시마산장의 불결한 주방 때문에 바뀐 万松閣의 빈약한 아침상>

대마도가 아닌 일본 본토라 하더라도 일반적으로 일본의 아침상은 이런 식으로 빈약하다. 밥에다 날계란을 말아 후르르 들이마시고 된장국을 마시는 게 대부분이다. 호텔 같은 곳이라면 손가락만한 소시지 2개에 우메보시(매실 장아찌) 정도가 더 있었을 것이다.

 

 

<万松閣 안의 한국 관광객이 다녀간 흔적들>

산악회에서 주로 다녀갔고, 가수인지 모르지만 전영록이란 분의 sign도 보인다.

 

 

<대마도의 소소한 일상 풍경들>

윗 사진은 음료수와 담배 자판기, 쓰레기통이다. 두번째 사진은 민가에 있는 신사이다.

 

 

 

<카미자카(上見坂)전망대의 宗武志 시비>

宗武志(소우 다케유키)는 전기한대로 마지막 대마도 번주(?)이자 덕혜옹주의 남편이다. 번주제를 폐지하면서 일본 중앙정부는 그에게 백작이라는 직위를 하사했다. 그 옆에서 본의 아니게(!) 공손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분은 우리의 현지 가이드였던 대마도 통인 윤영원님이다.

 

 

<카미자카(上見坂)전망대에서의 조망>

 

 

<카미자카(上見坂) 전적지의 유적1>

원래 대마도 지배자였던 아비루(阿比留)씨를 외지인인 소우(宗)씨가 1245년에 이곳에서 결전을 벌여 승리하고 대마도주가 되었다. 이후 소우(宗)씨는 1868년의 메이지(明治)유신까지 대마도를 지배했다. 아비루(阿比留)씨는 백제계일 것으로 추측한다. 아비루家와 소우家가 싸웠던 당시의 유적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카미자카(上見坂)전적지의 유적2>

아비루家와 소우家가 싸웠던 당시의 유적은 거의 남아있지 않은 대신 메이지유신 이후에 만든 아래의 병영 터가 남아있다.

 

 

 

<코모다하마 진쟈(神社) 앞 풍경>

 

 

 

<코모다하마 진쟈(神社) 안내문>

안내문을 보면서 실소가 나왔다. 우리가 역사에서 일본, 특히 대마도의 해적을 왜구(倭寇)라고 흔히 부르는데 이 코모다하마에서 元寇(원나라 도적)란 단어를 흔히 보았으니 말이다. 1274년(고려 원종 15년)과 1281년(고려 충렬왕 7년), 2차례에 걸쳐 여몽연합군이 대마도와 일본 서부지역에 침입하였는데 1274년 대마도주가 친병 80기를 이끌고 3만명과 900척의 군함을 지닌 몽고군과 싸웠지만 전투 직후 전멸하였다는 내용이다.

 

어쨌거나 불행(!)하게 풍랑(神風 : 가미가제)을 만나 여몽연합군은 전멸하다시피 바다에 수장되고 말았다. 이곳 코모다하마 신사는 여몽연합군과 싸우다 죽은 대마도주와 병사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곳이다.

 

 

<코모다하마 진쟈(神社) 도리이와 신사 내부>

 

 

 

 

 

 <코모다하마 진쟈(神社) 본전>

 

 

<코모다하마 해병공원>

'해변'공원이 아니라 '해병'공원이다. 다른 이의 블로그를 보니 이곳에서 신나게 놀았다고 하는데 우리가 갔을 때는 분위기가 너무 썰렁해서 바다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돌지붕 창고 이시야네(石屋根>

과거 일본(우리나라도 그렇지만)은 서민에게 기와집이 허용되지 않아 초가에서 살아야 했다. 초가는 비바람을 완전히 막을 수 없고 화재에 약해 곡물을 저장하기 위해 돌지붕으로 만든 창고를 지은 것이라고 한다. 물론 아무나 이시야네(돌지붕 창고)를 지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엄격한 규제가 따랐다. 대마도 전체에 산재되어 있었지만 현재는 이즈하라마치에 몇 채만 남아있다고 한다.

곡물 건조를 돕고 부식을 막기 위해 지면에서 30cm~50cm정도를 띄웠다. 이시야네(石屋根)는 대마도에만 있다고 한다. 이 창고 주변에서 대마도에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논(벼)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