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대마도 여행8 - 오후나에, 만제키바시(万關橋), 와타즈미신사

큰누리 2014. 1. 10. 14:40

<우리 일행이 두번 밥을 먹은 万松閣>

숙소인 쯔시마산장의 식당이 불결해 일행들이 식사를 거부한 때문에 사실은 이틀째 아침까지 3끼를 먹었다. 이틀째 아침은 갑자기 많은 양의 식사를 준비해야 했기 때문인지 상당히 빈약했다. 제대로 먹은 2끼는 맛이 좋았지만 양이 부족했고, 서비스는 거의 기대할 수 없다.

 

일본 식당에서 반찬이나 음식을 추가하는 것은 우리나라와 다르다. 우리나라는 메인 메뉴가 아니라면 반찬이나 국 등은 대부분 거저 주지만 일본은 단무지조차 추가할 경우 돈을 받는다. 아래 메뉴-삼겹살, 가리비, 소세지, 야채구이는 맛있었지만 여럿이 먹기에 양이 너무 부족했다.  

 

 

<130년이 넘은 나무 우체통과 조선통신사 접견 장소>

일본에서 우편제도가 최초로 시행된 시기의 우체통이 아닌가 한다. 사진이 흔들려서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왼쪽 안내문에 130년 된 우체통이라 쓰인 것 같다. 

우체통과 직접 관련은 없겠지만 오른쪽 앞의 기둥에는 '1811년도, 조선통신사-막부 접견 장소'라고 적혀있다. 대마도에는 이렇게 조선통신사와 관련된 장소, 기념비, 탑 등이 많다.

 

 

 <지장보살마쯔리(지조봉)>

지장보살마쯔리(지조봉)는 지장보살에게 어린이들의 건강을 비는 축제라고... 지장보살의 빨간 턱받침(!)은 확실하게 각인이 되었다.

 

 

<당근이 인삼이라고라?>

ㅎㅎ... 대형 마트에서 판매하는 당근에 분명히 한자로 '人蔘'(일본어 닌징)이라 쓰여있고, 발음도 맞다. 들은 바로는 그 옛날 일본인들이 한국의 인삼이 귀하고 몸에 좋다는 것은 알았는데 정확한 모양을 몰라서 당근을 인삼으로 착각했다던가?

 

 

<대마도의 박각시와 민날개밑들이메뚜기>

한국의 생태와 정말 비슷하다! 민날개밑들이메뚜기(날개가 퇴화되어 날지 못한다!)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보았고, 바로 이어 선자령에서 그것도 짝짓기 하는 것을 보았다.

 

 

 

 <대마도의 아침 밥상>

만송각의 아침 밥상이다. 된장국에 들어있는 내용물(어패류) 중의 일부는 우리가 어제 바닷가에서 잡은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발효한 콩(낫토)를 잘 먹지 못하는 이들이 많은데 먹을만 하다. 콩나물과 깍두기는 무늬만... 맛 없었다.

 

 

<선착장 오후나에>

이즈하라에서 쿠다로 흘러가는 쿠다강 하구에 있는 5개의 선박을 묶어둔 선착장(왼쪽 지도의 왼쪽 아래)이다. 이 선착장은 눈에 잘 띄지 않고 간조 때는 깊이가 낮아 출입을 할 수 없는 곳이어서 (왜구들이) 노략질한 물건을 숨기거나 정해진 무역량을 초과한 물건을 숨기는 곳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고 한다.

 

 

 

 

 

<오후나에의 맥문동꽃>

 

 

<만제키바시(万關橋)와 대마도 해전>

만제키바시(万關橋)는 길이 210m의 무지개 모양의 다리로 아래로 만제키 운하가 흐른다. 가장 잘록한 위치에 이 운하를 개통함으로써 대마도는 두 개의 섬(상대마와 하대마)으로 나뉘어졌다. 더 중요한 것은 20세기 초에 이 운하로 인해 일본이 아시아의 주도권을 잡았다는 점이다.

 

메이지유신으로 근대화에 박차를 가한 일본은 1886년에 대마도의 이즈하라와 아소만에 각각 보병대와 해군을 배치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이곳은 일본 제1의 국방 요새였다. 아소만이 좁고 함선이 커서 대한해협으로 통과하기 어렵게 되자 일본은 이곳에 운하를 파서 전투함들이 은밀하게 운행할 수 있게 했다. 

일본과의 전쟁에 대비해 상테르부르크에서 아시아를 향해 출항한 러시아의 세계 최강의 발틱 함대는 일본과 동맹을 맺은 영국의 방해로 지름길인 수에즈 운하를 통과할 수 없어 아프리카의 희망봉을 돌아오느라 9개월이라는 기간을 소비했다. 먼 여정에 지친 상태로 발틱 함대는 기착지인 블라디보스톡으로 가기 위해 이곳을 통과하였다.

 

도고 헤이하치로를 총사령관으로 한 일본 해군은 1905년 5월 27일, 세계 최강의 함대 발틱함을 기습하여 38척의 모선 대부분을 격침 시키거나 나포했고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을 비롯한 6,000명이 넘는 포로를 잡았다(대마도 해전). 조그만 섬나라 일본을 세계대전의 주역(!)으로까지 격상시킨 러일전쟁의 시발점이다. 이어 벌어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아시아의 강국으로 부상하여 조선을 점령하고 대륙으로 진출한 후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고, 부동항을 얻고 아시아로 진출하려던 러시아는 참패하여 이후 볼세비키 혁명이 발발하고 결국 제국이 멸망하게 된다. 

대마도 해전의 총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東鄕 平八郞)은 아이러니하게도 이순신 장군을 가장 존경한 것으로 유명하다.

 

 

 

<만제키바시(万關橋) 위에서 본 만제키 운하의 좌(서쪽)와 우(동쪽)>

 

 

 

<에보시다케 전망대>

'에보시'는 '까마귀모자'란 의미인데 진짜 의미는 무엇일까? 에보시다케 전망대에서 관망하는 아소만의 경치는 대마도 관광의 꽃이다육지의 침강에 의해 형성된 전형적인 리아스식 해안으로 일본에서도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에보시다케 전망대는 아소만을 360도로 완벽하게 둘러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바다 가운데에서 흰점처럼 보이는 곳은 진주 양식장이라고 한다. 진주는 물이 맑은 곳에서만 양식이 가능하다는데 환경이 깨끗하고 공장 하나 없는 대마도는 그래서인지 양식 진주가 상당히 유명하다.

 

 

<에보시다케 전망대에서 사방으로 아소만을 한 바퀴 둘러본 모습>

해안이 너무 복잡해서 길을 모르는 배는 빠져나가기가 어렵다고 한다.

 

 

 

 

 

<일본 초대천황-진무텐노(神武天皇)의 출생 설화가 있는 토요타마마치의 와타즈미 진쟈>

우리는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와타즈미신사 뒤쪽으로 들어갔다. 와타즈미 신사는 하늘신 히고호호데미와 토요타마히메의 제사를 지내는 곳이면서 바다 신을 모시는 가장 오래된 신사이기도 하다.

이 도리이 바로 안쪽에 용왕의 딸이자 초대 천왕(진무텐노=神武천황)의 할머니인 토요타마히메의 무덤이 있다. 숲이 깊어 음침한 느낌이 든다. '와타'는 바다를 '미'는 신성한 뱀을 의미하며, 둘을 묶은 '와타즈미'는 용궁을 의미한다고 한다.

 

일본 고지키(古事記)에 의하면 우미사치히코와 야마사치히코는 일본의 시조신인 아마테라스의 손주이다. 형인 우미사치히코는 요즘으로 치면 어부이고, 야마사치히코는 사냥꾼이었다. 어느 날 야마사치히코가 낚시를 하고 싶어 형에게 낚시 바늘을 빌렸다가 잃어버리고 말았다. 형에게 용서를 받지 못해 바닷가에서 탄식하는 야마사치히코에게 신이 나타나 바다의 궁전 문 근처의 나무에서 기다리라고 한다. 야마사치히코는 그곳에서 해신의 딸인 토요타마히메(豊玉姬)를 만나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고 3년을 보낸 뒤 낚시 바늘을 찾은 후 형을 찾아 이곳으로 온다. 

토요타마히메도 야마사치히코와 동행해 사내아이를 낳았지만 남편이 출산 장면을 보면 안 된다는 금기사항을 어겨 아이를 두고 용궁으로 가버린다. 버려진 아이가 이모인 '다마요리히메'와 결혼하여 낳은 아이가 진무텐노(神武천황)라고 한다. 성장한 진무텐노가 뱃길을 따라 아스카(飛鳥)에 도착하여 나라를 세운 것이 일본 건국의 시초이다.

 

 

<와타즈미 진쟈의 신성한 장소 이소라마이(磯良舞)>

이소라마이(磯良舞)는 야마사치히코의 아내인 토요타마히메(豊玉姬)가 아이(신무천왕의 아버지)를 낳은 곳이라고 들은 것 같다. '이소라마이' 말고도 '이소라에비스'라고 하는 비늘 모양의 균열이 있는 바위가 있는데 신성한 장소라 하여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와타즈미 진쟈의 바다를 향한 도리이들>

사진 왼편에 신사 본전이 있지만 규모도 작고 특별히 볼 것은 없다. 바다를 향해 일렬로 주욱 늘어선 이 도리이들이 내게는 인상적이었다. 일본의 규모가 큰 신사나 특별한 의미가 있는 바닷가의 신사는 이런 식으로 빨간색이나 흰색의 도리이들이 바다 속까지 일렬로 늘어서 있는데 파란 바다와 어울려 보기에도 아름답고 무척 인상적이다. 정면 맨앞의 도리이 뒤로 도로가 지나고 그 뒤로 바다 속에 도리이 3개가 더 늘어서 있다. 한반도 방향이 아닐까 생각한다.

 

  

 

 

 

 

<도로(바다) 쪽에서 본 와타즈미 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