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인천

제암리 학살사건과 제암리 3.1운동 순국유적지

큰누리 2015. 1. 14. 14:51

<1919. 4. 15. 제암리 학살사건 개괄>

제암리 학살사건은 3.1독립운동 과정에서 생겨난 일제의 대표적인 탄압 사건이다. 제암리 학살사건이 야기되기 까지는 그 이면에 당시의 정치, 사회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이 사건은 식민지 하에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거족적인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제암리 주민들이 민족저항운동에 적극 가담하였는데 이를 진압하려는 일제의 정규군대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다.

 

1919년 3.1독립운동 직전 제암리에서 형성된 기독교와 천도교가 수원, 화성지역의 민족운동세력과 제휴하여 만세시위를 모의하여 학생, 상인, 농민, 노동자 등 일반시민과 함께 이 지역의 3.1독립운동을 주도하게 되었다. 

이를 알게 된 일제는 이 지역 민족운동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는 기독교, 천도교 세력을 근절하기 위해 제암리교회에 이들을 모아놓고 학살을 감행했다.

 

 

<수원, 화성지방 만세시위의 특징>

첫째, 초기 만세시위 준비단계에서 기독교인과 천도교인 지도자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두 종교의 연합시위가 많았다. 둘째, 주로 장날을 이용하여 전개되었다. 세째, 만세시위 참여 계층이 친일분자나 관료계층을 제외한 거족적이었다. 네째, 만세시위 초기부터 경찰, 군사력을 동원하여 무리한 시위 지도자 검거로 군중의 거센 저항을 맞게 되었다. 다섯째, 일제의 무력진압과 지도부 검거로 흥분한 군중들의 폭력적 시위가 잇따랐다.

 

 

<일본군의 진압활동>

수원, 화성지방 만세시위의 강력한 진압을 위해 일본군이 동원됐다. 특히 군사적으로 중요한 경부선 철도를 따라 이루어지고 있는 시위를 조기진압할 목적으로 헌병과 경찰 혼성부대를 편성, 시위지역의 지도자들을 검거토록 하였다.

 

♣ 1차 진압 : 하세가와 대위를 비롯한 순사 11명으로 편성되어 4월 2일 원곡과 양성, 4월 3일 안성, 4월 4~5일 발안, 4월 6일 수촌 순으로 이어졌다.

 2차 진압 : 4월 9일 경성 헌병부대 츠므라 이하 헌병 6명과 보병 15명, 수원경찰서장 이하 순사 11명 등 모두 37명의 3개 진압반으로 편성, 4월 9일 오산 → 4월 10일 오산, 발안 → 4월 11일 발안, 우정, 장안 → 4월 12일 남양, 팔탄 → 4월 14일 팔탄 → 4월 14~15일 사강 → 4월 16일 수원 순서로 파견되었다. 2차 진압작전은 1차 때보다 훨씬 강력한 진압작전이었고 체포 검거된 시위 지도자가 8백명이 넘었으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군사작전을 하듯 포위, 공격, 방화, 살인을 자행했다. 바로 이 같은 폭압적인 토벌작전의 대미를 장식한 것이 제암리 학살사건이다.

 

 

<전동례할머니의 증언에 의한 제암리학살사건 개요>

전동례(1898~1992)는 경기도 화성 출신으로 제암리 학살사건의 대표적인 증인이었고 사건 당시 희생된 안진순 열사의 미망인이다. 제암리 학살사건에 대한 증언은 일본군측, H.D.Underwood, A.W.Taylor, F.W.Scofield(한국명 석호필), Royds의 증언이 더 있다. 진술과 평가면에서 일본측의 자료는 왜곡, 축소의 가능성이 농후하고 외국인들 자료는 주민들의 증언을 토대로 하여 생생한 면은 있지만 통역이나 기록과정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으며, 1982년 전동례할머니의 구술증언도 오랜 세월이 지났으므로 시간, 이름 등 세밀한 부분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으나 대체로 흐름은 사실에 부합한다고 본다.  

 

4월 15일 낮 2시경 일본인 순사 사사까와 순사보 조희창이 군인들을 데리고 마을에 들어오면서 열 다섯살 위로 남자들은 모두 교회로 모이라고 했다. 양쪽 방향에서 열 댓 명씩 와서 교회 안에 들어가고 오지 않는 사람은 불러왔다. 안중후 권사와 안진순 숙장은 교회 뒷문 쪽에 서서 도망칠 궁리를 하고 있는데 둘에게 먼저 총을 쏘았다. 북새통에 노경태는 탈출에 성공, 산으로 도망쳤다.

교회 안과 밖에서 짚을 늘어놓고 석유를 끼얹고 불을 질렀다. 바람이 세게 불어서 교회 아래 있던 집들에 불이 옮겨 붙었고 위쪽 집들은 군인들이 다니며 불을 질렀다. 두 세 사람씩 교회 밖으로 나와서 죽었는데 창자가 터져나왔다.

강태섭의 부인은 울고 있는데 군인이 칼로 목을 쳐 죽였다. 홍권사 부인은 집을 수색하던 군인의 총에 맞아 죽었다.

고주리로 가서 천도교인 6명(김흥열 일가)을 나무에 묶고 총살했다. 저녁에 사사까가 일본인을 데리고 와서 교회 밖의 시체를 창으로 찔렀다.

--이상은 제암리3.1운동순국기념관에 전시된 설명에 의함--

 

 

<제암리 학살사건 이후>

제암리 학살사건은 4월 6일에 일어난 인근의 수촌리 방화사건을 확인하기 위해 4월 16일에 현장을 방문한 커티스, 테일러, 언더우드 등이 알게되면서 서울에 전해졌다. 이어 4월 19일에 영국 대리영사와 감리교 선교사들이 현장을 방문하고 미국 교회에 진상을 알리고 구호활동을 했다. 영국 출신 캐나다인 스코필드(F.W.Scofield)도 현장을 방문하여 사진과 증언을 담은 <수원에서의 잔악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세상에 알렸다. 일본의 영자신문들도 사건을 보도하고 일본 기독교동맹은 조사단을 파견하였다.

학살의 책임자인 아리타 중위는 정당하게 직무를 집행했다는 이유로 보호받다가 세계의 비난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7월에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결과 사건 관련 군인들은 30일 근신처분을 받았고 살인 및 방화에 대한 부분은 무죄처분을 받았다.

 

해방이 되기 전까지 제암리 학살사건은 역사 속에 묻혔다가 1959년에야 불탄 첫 교회 터에 기념탑을 세웠다. 일본 기독교인들은 사건 직후부터 사건을 확인한 후 일본의 기독교신문에 고발기사나 추도시를 실었고 사죄의 의미로 사건 현장에 1969년에 제암리교회를 재건했는데 그 교회는 2002년 제암리 3.1운동순국기념관을 지으면서 헐렸다.

 

1982년 문공부는 제암리 학살사건 현장을 정비하기로 하고 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9월 21일부터 순국지사의 유해발굴을 시작했다. 또 1959년에 불탄 교회 터에 세운 3.1연동순국기념탑에 틀린 부분이 있어 부근에 묻고 새로운 기념탑을 세우고 유적지로 지정했다. 이 작업으로 발굴된 23위의 유해는 교회 뒷산의 남향에 합동으로 안장되었다.  

 

 

<제암리 학살 사건을 세계에 알린 스코필드(F.W.Scofield. 1889~1970. 한국명 석호필)>

스코필드 박사는 1889년 영국에서 태어났으나 집안형편이 어려워 19세인 1907년 캐나다로 이민을 가서 토론토 온타리오대학 수의과에 입학했다. 1910년 소아마비 후유증으로 지팡이를 짚고 다니게 되었고, 1911년 토론토대학에서 수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16년 당시 세브란스 의전 교장이던 에버슨의 부탁으로 한국으로 아내와 함께 건너와 세브란스 의전에서 세균학과 위생학 강의를 하게 되었다.

 

동료인 이갑성(가장 어린 민족대표 33인)의 부탁으로 불편한 몸으로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3.1운동 현장을 조사하여 사진을 찍고 기록했다. 스코필드 박사의 기록과 자료는 1919년 9월 중국의 영자신문 차이나 프레스에 보도되어 일제의 만행이 세상에 알려졌다. 그 외에도 3.1운동으로 수감된 독립지사들을 방문하여 고문을 확인하고 총독부에 즉각 중지할 것을 호소하기도 했다. 결국 1920년 스코필드 박사는 일제에 의해 강제추방을 당했지만 캐나다 토날드대학에서 재직하며 계속 한국의 독립을 지지했다. 

 

1959년 한국으로 돌아와 정착한 스코필드 박사는 보육원을 후원하고 후학을 양성하며 이승만정권의 부정부패에도 비판하며 맞섰다. 1968년 건국공로훈장을 받았으며 1970년 4월 2일 81세에 타계했다. 34번째 민족대표로 추앙받았으며 외국인으로는 유일하게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제암리3.1운동순국기념관 안내도>

 

 

<제암리3.1운동순국기념탑과 주변>

윗 사진 오른쪽의 흰 건물은 3.1정신교육관, 빨간 뾰족지붕의 제암교회 앞 흰 건물은 제암리3.1운동순국기념관이다. 사진 중앙의 순국기념탑과 오른쪽 끝의 3.1정신교육관 사이 뒤로 보이는 숲에 23위 순국지사의 합동 묘지가 있다. 

 

순국기념탑이 서있는 곳은 초가형태의 처음 제암리교회(일제의 학살 현장)가 있던 곳이다. 일본인들이 속죄의 의미로 지어준 제암교회는 2002년에 기념관을 만들면서 헐었기 때문에 현재의 제암교회는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순국 23인 상징 조형물>

왼쪽부터 제암리3.1운동순국기념관(제암교회 앞 흰 건물), 숲 뒤의 23인 합동 묘지, 순국 23인 상징 조형물이다.

 

 

<제암리3.1운동순국기념관>

 

 

 

<제암리3.1운동순국기념관 평면도>

1, 2전시관을 둘러보기 전에 안내데스크 옆에 있는 시청각실에 들러 제암리 학살사건에 대한 방송자료를 보면 사건을 이해하는데 상당히 도움이 된다. 상영시간은 17분 정도이다.

 

 

<제암리3.1운동순국기념관 제1전시관>

 

 

<제암리3.1운동순국기념관 제1전시관의 제암리 학살사건 관련 내용들>

 

 

 

 

 

 

<제암리3.1운동순국기념관 제1전시관의 제암리 미니어처>

 

 

<제암리3.1운동순국기념관 제1전시관의 자료들>

3.1독립운동 당시 태극기와 함께 흔들었던 천도교를 상징하는 궁을기, 천도교 의식 때 사용하는 청수기(그릇)와 희생된 천도교 가족의 족보이다.

 

 

<제암리 학살사건 희생자 명단>

고주리는 제암리의 인근 마을로 제암리에서 학살을 자행한 직후 일본군들이 만세운동 지도자였던 경주 김씨 일가족 6명을 살해한 사건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제암리-고주리학살사건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암리 희생자 : 희생자 명단이 27명인 이유와 기타 희생자로 표기된 안효진이 왜 '현 유족회장'으로 표기되었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빨강점천도교도 11명(안정옥, 안종엽, 안종환, 안면순, 안관순 일가 5명 / 안종린, 안무순 일가 2명 / 안경순, 안상용 2대 / 안유순, 홍순진), 초록점기독교인 10명( 안봉순, 안종후, 안진순, 김덕용, 김정헌, 홍원식과 부인, 강태성과 부인, 조경칠), 파랑점 기타 6명 안준옥, 안동헌, 안필순, 안효진, 안상옥

 

고주리 희생자  : 경주 김씨 일가족 6명이다. 김흥열, 김성열, 김세열 3형제 / 김성열의 아들 김흥복, 김덕기 형제 / 김세열의 아들 김주업

 

(제2전시관의 미니어처앞 '고주리 참변' 안내문에는 김흥열, 김성열, 김세열 3형제 / 김성열의 아들 김흥복 / 김세열의 아들 김주남, 김주업으로 적혀있다. 동일한 공간의 자료에 이런 식으로 틀린 부분이 몇 개 있어서 어처구니 없기도 하고 혼동이 된다. 각종 관련자료로 판단하건데 김덕기 대신 김주남이 맞다.)

 

 

<제암리3.1운동순국기념관 제2전시관 안내도>

제2전시관에는 제암리 이외 지역의 3.1독립운동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제암리3.1운동순국기념관 제2전시관 내부>

 

 

 

<고주리 참변 안내문과 미니어처>

제1전시관의 고주리 희생자 명단에는 경주 김씨 가계도와 함께 김흥열, 김성열, 김세열(형제) / 김성열의 아들 김흥복, 김덕기 / 김세열의 아들 김주업의 이름에 붉은 줄 표시를 해놓았다. 하지만 아래의 안내문에는 김덕기 대신 김세열 아들 김주남이 들어가 있다.

 

 

 

<제암리3.1운동순국기념관 제2전시관 자료들>

 

 

 

 

 

<제암리3.1운동순국기념관 제2전시관의 형구들>

각종 태형틀과 몽둥이, 육모방망이  

 

 

<제암리 학살 희생자 23인의 합동 묘지>

 

 

<제암리 학살사건을 세계에 알린 스코필드 박사 동상>

문화재청으로부터 유적지 안에 동상을 세울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들었다. 그래서인지 그가 타고 다닌 자전거와 함께 카메라를 든 모습의 좌상 동상과 관련 사진, 동판 등은 순국기념탑 동쪽 민가 옆에 이렇게 놓여있다.

 

 

<제암리 학살사건을 세상에 알린 스코필드(F.W.Scofield. 한국명 석호필) 박사와 전동례할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