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종묘

큰누리 2015. 5. 13. 01:55

<종묘(宗廟)>

종묘는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神主)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국가 최고의 사당이다. 왕실의 제사를 지내는 곳이기에 반드시 국가의 도읍지에 세워야 했고, 그 위치나 형식 등도 따로 규정한 제도에 의거해 정해야 했다. 지금 서울에 있는 종묘는 1395년 조선의 태조가 한양을 새 나라의 도읍으로 정한 후에 지었다. 

'궁궐의 왼쪽에 종묘를, 오른쪽에 사직단을 두어야 한다(左廟右社)'는 주례에 따라 경복궁의 왼쪽에 자리를 잡았다. 창건 당시의 종묘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고 지금의 종묘는 1608년에 중건한 것이다. 건립 후 모시는 신주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수차례 건물 규모를 늘려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

 

종묘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건물은 정전영녕전이다. 조선시대에는 지금의 정전을 종묘라 하였으나, 현재는 정전과 영녕전을 합쳐 종묘라 부른다. 정전의 신실 19칸에는 태조를 비롯한 왕과 왕비의 신주 49위를, 영녕전의 신실 16칸에는 정전에 들지 못한 왕과 왕비 34위의 신주를 모셨다. 왕위에서 쫓겨난 연산군과 광해군의 신주는 종묘에 모시지 않았지만, 왕위에서 쫓겨났다가 숙종 때 복위된 단종의 신주는 영녕전에 모셨다.

종묘는 제사를 모시는 공간과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으로 나뉜다. 제사를 모시는 공간으로는 정전, 영녕전, 공신당, 칠사당이 있고,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으로는 재궁, 향대청, 악공청, 전사청 등이 있다. 

 

종묘의 모든 건물은 장식과 기교를 절제하여 단조로워 보이지만, 이는 존엄하고 신성한 분위기를 위한 의도적인 장치이다. 중국이나 베트남과 달리 한국의 종묘는 건물과 더불어 제례와 제례악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종묘는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은 2001년에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등재되었다.

 

 

<왜 종묘를 세우는가?>

종묘의 건립은 유교의 조상숭배 사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유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혼(魂)백(魄)으로 분리되어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형체인 백은 땅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당(廟)을 지어 '혼'을 모시고 무덤(墓)을 만들어 '백'을 모시는 형태로 조상을 숭배하였다. 사당에서는 죽은 조상의 혼이 깃든 신주(神主)를 만들어 제례를 올리며 후손들의 정신적 지주로 삼았다. 사당 중에서 왕실의 신주를 모신 사당을 종묘라고 한다.

 

조선 왕조와 관련된 책이나 드라마에서 "종묘사직을 보존하고..." 또는 "종사를 어떻게 하려고..."와 같은 표현을 흔히 볼 수 있다. 종사는 종묘와 사직을 합친 말로 조선시대에 국가의 근본이 되는 것이었다.

 

 

<창건 당시의 종묘>

태조 이성계는 개경에서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기로 결정한 다음, 종묘를 먼저 짓고 궁궐을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성벽을 쌓아 도성을 건설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이에 따라 1394년 10월에 가장 먼저 종묘를 짓기 시작하여 1395년 9월에 완성하였다. 창건 당시의 명칭은 '태묘(太廟)'였다. 태묘가 완성되자 개경에 봉안되어 있던 태조의 조상 4대의 신주를 새로 지은 종묘로 옮겨 모셨다.

 

 

<종묘 기본 모습의 형성>

종묘는 태종, 세종대에 이르러 기본 모습이 정립된다. 태종은 종묘 남쪽에 인공으로 가산(假山)을 조성하여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였다. 야트막한 구릉이 사방으로 종묘를 둘러싸도록 해서 그 안에 신성한 기운이 감돌게 만든 것이다.

또한 제례 때 비와 눈을 막을 수 있도록 건물 양끝에서 직각으로 꺾인 동서 월랑(月廊, 행각)을 만들었다. 이것은 중국과 달리 새로 고안한 종묘 건축의 기본 틀로서 조선의 독특한 양식이다. 그리고 종묘의 둘레에 담을 두르고 하마비(下馬碑)를 세워 종묘의 격식을 갖추었다. 세종 때 영녕전을 새로 건립하여 조선 왕조의 종묘 건축은 종묘와 별묘를 두는 제도로 정비된다.

 

 

<종묘의 훼손>

조선시대에는 건물을 지을 때 자연 지형과 조화를 이루도록 하기 위해 풍수를 중시했다. 종묘는 응봉자락을 따라 흐르는 산줄기의 지맥이 창덕궁과 창경궁을 거쳐 흘러 들어온 곳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지금의 종묘와 창경궁 사이에는 도로가 동서 방향으로 나 있어 두 곳을 가르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광화문에서 이화동으로 통하는 도로(현재의 율곡로)를 내어 종묘로 들어오는 지맥을 끊어 버린 것이다. 다행히 율곡로를 덮고 창경궁과 종묘를 잇는 복원 계획이 현재 진행되고 있다.                           

--이상은 종묘에서 구매한 설명서에서 발췌함--

 

 

 <종묘 신로(神路)>

신로는 종묘제례 의식을 위해 낸 길로 신만이 다니는 길을 말하며, 가운데 길은 약간 높고 양옆 길은 약간 낮다. 가운데 길은 혼령이 다니는 신로(神路)와 향, 축문, 폐백 등 제사 예물이 오가는 향로(香路)가 합쳐진 신향로이고, 오른쪽 길은 왕이 다니는 어로, 왼쪽 길은 왕세자가 다니는 세자로이다.

 

 

<지당(池塘)>

종묘에는 연못(지당)이 세 곳 있다. 사각형의 지당 가운데에는 둥근 섬이 있는데, 이는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 사상을 나타낸다. 대부분의 궁궐 지당에는 소나무가 심어져 있는데 종묘 지당에는 향나무가 심어져 있다. 

 

 

<종묘 안내도>

 

 

<망묘루(望廟樓)와 향대청>

망묘루는 종묘를 관리하던 관원들이 업무를 보던 곳이다. 도서를 보관하고 그림을 걸어두기도 하였다. 망묘루는 종묘의 정전을 바라보며 선왕과 종묘사직을 생각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정면 7칸, 측면 2칸의 규모인데, 연못 방향의 두 칸은 누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사진 왼쪽 뒤의 향대청은 제사 전날 왕이 종묘제례에 사용하기 위해 친히 내린 향.축문.폐백과 같은 제사 예물을 보관하는 곳이다.

 

 

<공민왕 신당 내부>

고려 제31대 공민왕과 왕비인 노국대장공주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정식 이름은 '고려공민왕영정봉안지당'이다. 조선 왕조 최고의 사당인 종묘에 고려의 왕을 모셨다는 점이 특이하다. 역성혁명에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한 의도로 해석하기도 하고, 종묘를 창건할 때 공민왕의 영정이 바람에 실려 종묘경내로 떨어졌는데 조정에서 회의 끝에 그 영정을 봉안키로 하여 공민왕 신당이 건립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공민왕 부부의 영정 외에 공민왕의 그림 3점이 걸려 있다.

 

 

 

<종묘제례악 안내문>

종묘제례악은 악기, 노래, 춤을 갖추고 종묘제례 의식에 맞추어 연행하는 음악이다. 악기의 연주에 맞춰 돌아가신 왕의 공덕을 기리는 노래를 부르며 제례의식을 위한 춤을 춘다.

 

종묘제례악은 1447년에 세종이 처음 만들었고, 세조에 이르러 제례악에 걸맞도록 보태평(保太平) 11곡과 정대업(定大業) 11곡으로 줄이고 다듬어 사용하였다. 보태평의 곡들은 역대 왕들의 문덕(文德)을, 정대업의 곡들은 무공(武功)을 시어로 칭송하며, 죽은 혼령과 인간, 왕과 백성을 한데 결속시켜주고 후손에게 한없는 복을 내려 나라가 창성하게 해줄 것을 기원하는 내용이 간절하게 표현되어 있다.

종묘제례악은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었고, 2001년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종묘 일간도>

종묘 일간도는 종묘의궤에 수록되어 있는 신실 1칸의 배치도이다. 신주를 모신 신주장을 중심으로 서쪽에 책장(冊欌) 동쪽에 보장(寶欌)이 있다. 신주장 앞의 신탑에는 궤가 놓여 있고 그 앞에 제상과 좌우에 봉선, 황개가 세워져 있다.

 

맨앞의 제기들은 유기(놋그릇)이기 때문에 환전가치가 높아 목숨을 걸고 훔쳐가는 백성들이 많아 관리에 골머리를 앓았다고 한다. 무게도 엄청나서 들어옮기는 것도 만만찮다고 한다.

 

 

<재궁 어재실>

재궁은 왕이 세자와 함께 제사를 준비하던 곳으로 어재실(御齋室), 또는 어숙실(御肅室)이라고 불린다. 북쪽에 왕이 머무는 어재실(사진), 동쪽에 세자가 머무는 세자재실, 서쪽에 어목욕청이 있다. 왕과 세자는 재궁 정문으로 들어와 머물면서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 후 서문으로 나와서 정전의 동문으로 들어가 제례를 올렸다.

 

 

<재궁 어재실 내부>

왼쪽은 종묘친제규제도설 병풍, 오른쪽은 모란 병풍, 앞의 의자는 왕의 옥외용 간이의자인 용교의이다. 

 

 

<재궁 어재실 내부의 종묘친제규제도설 병풍>

종묘제례의 의궤와 제도를 그림과 글로 표현한 병풍이다.

 

 

<어재실의 십이장복>

 

 

<재궁 세자재실>

세자가 왕과 함께 종묘제례를 준비한 곳으로 재궁 동쪽에 있다.

 

 

<재궁 세자재실의 제기도 병풍>

 

 

<재궁에서 정전 사이의 신로>

 

 

<종묘 정전의 찬막단과 전사청>

찬막단은 전사청에서 만든 제사 음식을 제상 위에 차리기 전에 검사하던 곳, 전사청은 종묘제례에 사용할 제사 음식을 만들던 곳이다.

 

 

 

<제정(祭井)>

제사 때 이용하던 우물.

 

 

<종묘의 개나리>

 

 

<제정에서 본 전사청(오른쪽 끝), 성생위, 찬막단, 수복방, 정전>

성생위(省牲位)는 제물인 소, 양, 돼지를 검사하던 곳이다. 수복방은 종묘를 관리하거나 제물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기거하는 곳이다.

 

 

<종묘대제 안내문>

 

 

<종묘 정전 신문>

 

 

<정전 신위봉안도>

정전 신실 19칸에  태조를 비롯한 왕과 왕비의 신주 49위가 봉안되어 있다.

태조와 신의.신덕왕후, 태종과 원경왕후, 세종과 소헌왕후, 세조와 정희왕후, 성종과 공혜.정현왕후, 중종과 단경.장경.문정왕후, 선조와 의인.인목왕후, 인조와 인렬.장렬왕후, 효종과 인선왕후, 현종과 명성왕후, 숙종과 인경.인현.인원왕후, 영조와 정성.정순왕후, 정조와 효의왕후, 순조와 순원왕후, 추존 문조와 신정왕후, 헌종과 효현.효정왕후, 철종과 철인왕후, 고종과 명성태황후, 순종과 순명효황후.순정효황후 등이다.

 

 

 

<종묘 정전(국보 제227호)>

종묘의 중심부분으로 길게 지은 정전의 앞에는 넓은 월대를 두었고 사방으로 담장을 둘렀다. 남쪽 신문으로 혼령이, 동문으로 왕을 비롯한 제관이, 서문으로 제례악을 연주하는 악공과 춤을 추는 일무원들이 출입했다. 1395년에 신실 7칸의 규모로 창건했고 여러 차례 증축을 거쳐 현재는 19칸에 이르러 매우 긴 목조 건물이 되었다. 몸체인 신실의 양쪽에는 창고와 부속실을 마련했다.

 

거친 월대 바닥과 그 위로 육중한 지붕이 떠 있는 모습은 숭고하고 고전적인 건축미의 극치를 이룬다. 남쪽 담장 안에는 공신당과 칠사당을 각각 동쪽과 서쪽에 세웠으며, 서문 밖에 제례악을 준비하는 악공청을 두었다.

 

 

<종묘 정전과 공신당, 신문>

 

 

<종묘 정전 공신당과 배향공신 봉안도>

공신당은 역대 임금을 보좌한 공신들의 사당으로 총 16칸 규모이며, 안에는 모두 83위의 공신 위패들이 모셔져 있다. 

 

윗 사진 공신당 끝에 보이는 칠사당은 일곱의 작은 신들에게 왕실과 궁궐의 모든 일과 만백성의 생활이 아무 탈 없이 잘 풀리도록 기원하는 사당이다. 칠사는 봄의 사명(司命)과 사호(司戶), 여름의 사조(司竈)와 중류(中霤), 가을의 국문(國門)과 공려(公厲), 겨울의 국행(國行)을 이르는 말이다. 칠사에게 지내는 제사는 토속신앙과 유교 사상이 결합된 국가의례였다.

 

 

 

<종묘 정전 악공청>

 

 

<종묘 진달래>

 

 

<종묘 영녕전 찬막단>

 

 

<종묘 영녕전 신문>

 

 

<종묘 영녕전 신위봉안도>

영녕전의 신실 16칸에는 정전에 들지 못한 왕과 왕비 34위의 신주를 모셨다. 

중앙의 4대조(목조와 효공왕후, 익조와 정숙왕후, 도조와 졍순왕후, 환조와 의혜왕후)를 중심으로 왼쪽에 정종과 정안왕후, 문종과 현덕왕후, 단종과 정순왕후, 추존 덕종과 소혜왕후, 예종과 장순.안순왕후, 인종과 인성왕후, 오른쪽에 명종과 인순왕후, 추존 원종과 인헌왕후, 경종과 단의.선의왕후, 추존 진종과 효순왕후, 추존 장조와 헌경왕후, 의민황태자와 비가 봉안되었다.

 

 

 

<종묘 영녕전(보물 제821호)>

정전의 신위를 옮겨 모시기 위해 1421년에 새로 지은 별묘로 '영녕전(永寧殿)'이란 '왕가의 조상과 자손이 길이 평안하라'는 뜻이다. 시설과 공간 형식은 정전 일원과 유사하지만 정전보다 규모가 작고 좀 더 친밀하게 지어졌다.

 

정전 일원과 유사하게 2중으로 된 월대 주위에 담장을 두르고 동.남.서 세 곳에 문을 두었다. 원래 6칸 규모였으나, 여러 차례 좌우 협실을 늘려서 현재 신실은 모두 16칸이다. 가운데 4칸은 태조의 4대조를 모신 곳으로 좌우 협실보다 지붕이 높다. 동쪽에 제사 도구를 보관하는 제기고를, 서남쪽 바깥에 제례악을 준비하는 소악공청을 두었다.

 

 

<종묘의 오얏(자두)꽃>

오얏꽃은 조선왕실을 상징하는 일종의 문장이다.

 

 

 

<종묘의 앵두꽃>

 

'서울특별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5. 10/16. 하늘공원 억새축제  (0) 2015.10.17
손기정기념관, 손기정체육공원  (0) 2015.08.03
헌인릉  (0) 2015.04.04
봄날의 선릉과 정릉  (0) 2015.03.31
광화문광장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0) 2014.1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