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피역사> 국가등록문화재 제208호
전라북도 군산시 임피면 술산리 소재.
내가 이곳에 종종 들리는 이유는 고향이고 부친 산소가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임피면은 원래 옥구군이었다가 군산시로 편입되었다. 군산과 익산의 중간지점으로 군산선 철도(군산-전주)가 지나는 것 외엔 특별한 볼거리가 없었다. 임피역도 이름은 임피역이지만 소재지는 읍내(리)가 아니라 술산리다. 부설 당시 임피향교가 있는 읍내리로 철도가 지나는 것을 유생들이 반대해서 현재의 임피역 방향으로 철로가 바뀌었다고 한다. 내게는 어린 시절 외가나 군산, 혹은 이리(현재의 익산) 같은 도시로 나가는 출구이자 가슴 설레이는 장소였다.
몇 년 전부터 군산의 근대문화유산이 재조명되고 관광자원화하면서 임피역, 임피향교 등도 함께 군산 라이딩 코스의 일부로 조명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갈 때마다 군산 근대문화유적도 달라지고 덩달아 임피역도 자꾸 달라지고 있다. 유적은 어차피 시간이 흐르면서 보존을 위해 정비하거나 보수하는 것이 필요하긴 하지만 갈 때마다 달라지는 모습 때문에 다소 걱정이 될 때가 있다. 임피역 하나만 보러 가기에는 무리지만 역사 앞에 오포대도 있고 하니 라이딩 코스를 훑을 기회가 있다면 지나는 길에 들러볼 만 하다.
≪임피역사≫
임피역은 1912년 군산선의 간이역으로 문을 열었다. 당시 일제는 호남평야의 쌀을 수탈해 가기 위해 군산선을 건설하였는데, 임피역은 호남지역에서 수확한 쌀을 군산항으로 수송하여 일본으로 반출하는 중간 간이역의 역할을 담당했다. 현재의 역사는 1910년대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1936년에 개축하여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게 되었다. 서양의 간이역과 일본식 가옥을 결합시킨 임피역사는 그 역사적, 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5년 등록문화재 제208호로 지정되었다.
일제시대 임피역은 임피 서수지역에서 운반된 미곡을 군산항으로 반출하기 위한 수탈의 거점이었다. 힘들게 수확한 쌀을 빼앗긴 농민들은 깻묵과 나무껍질로 허기진 배를 달랬고, 역사 옆 미곡창고에서는 노동자들이 배고픔을 참고 쌀가마니를 실어날랐다. 또한 임피역에는 태평양전쟁에 끌려갔던 젊은이들과, 해방 후 돌아오지 못한 아들 딸들을 애타게 기다리던 부모들의 눈물이 서려있다.
광복 후 비로소 임피역은 지역주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6.25전쟁 후 군산의 경공업이 발전하면서 많은 농촌 청년들이 공장에 취직해 통근열차를 타고 출퇴근을 했으며, 생선장수들은 새벽열차를 타고 군산항에 나가 생선과 젓갈을 구입해 머리에 이고 팔았다. 한편 학생들은 임피역에서 통학열차를 타고 군산, 익산, 전주 지역에 있는 학교를 다녔다. 이후 버스 등 다른 교통수단이 생기고 임피역이 영업을 중단함에 따라 이러한 풍경은 사라졌지만, 임피역에는 삶의 애환과 추억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군산선≫
호남선의 지선인 군산선은 1912년 3월 6일 개통되었다. 일제가 군산선을 개통한 것은 호남평야의 풍부한 농산물을 수탈하고 군산의 일본인 상권을 확대시키기 위해서였다. 이후 군산은 철도를 통해 모여든 호남평야의 쌀을 도정, 항구를 통해 수출하는 일본의 식량공급기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일본인 철도 경영자들은 조선인 승객을 차별하여 대우했다. 조선인들이 주로 타는 3등칸의 대우는 화물칸 이하였고, 요금 또한 조선인들이 주로 이용하는 근거리 노선을 상대적으로 비싸게 책정하였다. 일제시대 임피에서 군산까지 철도 요금은 쌀 두되 값이었는데, 일반 조선인들에게는 부담스러운 금액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걸어 다녔다고 한다. --현지 안내문--
현재는 군산선은 장항선에서 신군산역-익산을 경유하는 철길이 신설되어 역사는 사용되지 않지만 화물열차는 여전히 임피역 앞 철로를 통과한다.
<임피역사 '시실리광장'과 '거꾸로 가는 시계'>
사진 왼편의 나무시계탑이 '거꾸로 가는 시계'이고 역 앞쪽이 '시실리광장'이다. 시계는 분명히 거꾸로 가고 있었다. 임피역 앞 광장에 '시실리광장'이란 안내판이 있어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했다. 촌동네의 폐쇄된 역에 뜬금없이 외래어 이름의 광장? 알고보니 시실리(時失理)란 한자어였고, 광장 한편에 이름에 맞춰 '거꾸로 가는 시계'가 있었다. 좀 억지로 말을 맞춘 것 같기도 하고, 참신한 발상인 것 같기도 하고...
2013년에 이곳에 들렀을 때는 정비공사가 한창이었다. 지금은 말끔히 단장을 마쳤고 역 주변에 옥구농민항일항쟁기념비, 농민 동상, 장승 등도 세웠고, 2013년에 본 객차 2량에 전시실도 꾸며놓았다.
<임피역사 측경과 오포대>
역 앞은 시실리광장, 오른쪽 원경의 빨간 철탑이 오포대이다.
<임피역사 전경>
역 뒤의 은행나무 두 그루는 내가 어린 시절에도 있었는데 해마다 가을에 가마니로 은행을 거두었다고 한다. 지금이야 늦가을에 길바닥에 널린 것이 은행이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은행은 고급 술집이나 음식점에서만 만날 수 있는 귀한 식자재였다.
<안쪽에서 본 임피역사>
<임피역사 안쪽의 동상>
2013년에 들렀을 때는 없었으니까 당시에 정비공사를 하면서 세웠을 것이다. 할아버지와 손주로 보이는 일행이 지인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보이는 장면의 동상이다. 내 할아버지도 이곳에서 열차를 타실 때면 동상의 노인처럼 중절모를 쓰셨고, 중절모를 두른 끈 사이에 차표를 끼우곤 하셨다. 이 동상 말고 역사 안에 역무원과 승차를 기다리는 사람들 동상이 있고, 역사 밖에는 술상 앞에 마주 앉은 농부들 동상이 있다.
<임피역사 안 동상들>
차를 기다리는 사람, 차표를 사는 사람, 역무원 3명 등의 동상이다.
<차표를 파는 역무원 동상>
어릴 적 이 모습으로 표를 팔던 아버지 친구분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나중에 들렀을 땐 따로 검표를 하지 않고 차안에서 검표를 했고, 더 나중엔 그조차 필요없는 인터넷 매표를 했다.
<임피역사 사무실 안>
매표하는 역무원과 통화 중인 역무원 동상이 있다.
<검표 중인 역무원 재현 동상>
검표하는 것을 우리는 '개찰한다'고 했다. 승객이 내민 표를 펜치 비슷한 도구로 누르면 작은 반원형의 구멍이 표 끝에 뚫린다.
<임피역사 안의 전시물들>
이 외에도 역무원들의 낡은 기념사진, 포스터 등이 벽에 걸려있다.
<역사 안쪽에서 통화 중인 역무원 동상>
<역 안쪽에서 본 역사 사무실 모습>
매표하는 역무원 동상이 보인다.
<임피역에서 본 전면 풍경>
왼쪽 근경 마을은 신털메, 오른쪽 원경의 마을은 산자락에 고려시대의 탑 1기가 있는 탑동(탑골)이다.
<임피역에서 본 군산방향>
<임피역에서 본 익산방향>
<임피역 오포대>
임피역 광장에 있는 오포대이다. 5m 높이의 이 오포대는 철탑 위에 싸이렌용 스피커가 부착되어 정오에 싸이렌이 울려 시계가 흔치 않던 시절에 시계 역할을 했다. 1950년대 초반에 주민들이 성금을 모아 비상소집용으로 만들었다가 1970년 초반까지 사용되었다.
이날, 내가 군산으로 나가는 12시 10분 버스를 기다리며 역사를 도는 동안 때마침 정오에 20초 정도 싸이렌이 울렸다. 최근에 임피역사를 단장하면서 2014년 3월부터 다시 정오에 싸이렌을 울린다고 한다. 어릴 적에 이곳에서 울리는 싸이렌 소리를 들으면 작은 공포감이 느껴지면서 점심 때가 되어가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오포대 아래의 건물은 일종의 간이 소방서(술산의용소방대)인데 다음 날 군산근대역사박물관에 갔을 때 이곳에서 기증한 소방장치(완용펌프)가 있었다.
≪임피역 광장(시실리광장)의 옥구농민항일항쟁가념비≫
어린 시절을 보낸 이곳에서 농민항쟁이 있었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이 항쟁에 대한 자세한 내용과 사료는 다음날 찾은 군산근대역사박물관 특별실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6.25전쟁 때 누가 어떻게 죽었고, 누가 끌려갔다는 등의 이야기는 종종 들었는데 옥구농민항일항쟁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들은 적이 없다는 사실이 의외이다.
기념비에 새겨진 내용에 의하면...
<일제의 수탈에 항거한 옥구농민항일항쟁>
옥구농민항일항쟁은 악랄했던 일본의 식민지배에 정면 대항한 사상 초유의 농민저항운동이다. 일찍이 3.1운동의 열기가 뜨거웠던 군산지역에서는 민족저항 정신이 확산되면서 옥구농민조합(1926), 서수농민조합(1927), 서수청년회(1927) 등이 조직되었다. 이들은 언론의 자유를 외치고 악덕 농장주에 대항하는 시위를 벌이며 일제에 저항하였다.
1927년 11월, 일본인 지주들이 공동 설립한 대규모 농장인 이엽사 농장에서 수확한 곡물의 75%를 소작료로 요구하였다. 농민조합에서는 생존을 위해 소작료를 인하해 줄 것을 여러 차례 요청했으나, 이를 묵살 당한 끝에 11월 25일 소작료 납부 거부를 결의하였다. 다음 날 농장 측의 신고를 받은 경찰이 농민 간부 장태성을 술산주재소에 감금하였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500여명의 농민들은 징을 울리며 몰려가 주재소를 부수고 장태성을 구출한 뒤 만세를 불렀다. 또한 서수주재소에 감금된 농민 간부 박상호도 구출하였다. 경찰은 80여명의 농민들을 체포해 혹독하게 취조하였고, 체포된 농민 중 34명은 실형을 선고 받아 옥고를 치렀다. 이 항쟁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조직적으로 전개된 농민항일운동으로써 일제의 착취와 폭압에 항거한 대표적인 항일투쟁으로 역사에 기록되고 있다.
<시실리광장 안내판과 옥구농민항일항쟁기념비>
<임피역 시실리광장의 '논 이야기' 동상>
<논 이야기>는 1946년 <해방문학선집>에 발표된 채만식의 단편소설로 일제치하 일본인들의 토지침탈 및 해방 후 일본인 재산 처분 과정을 통해 농민의 현실과 부조리한 사회상을 풍자적으로 그려냈다.
<임피역의 솟대와 장승>
이것들도 정비과정에서 신설된 것이다.
<임피역 객차전시관>
2량의 열차에 군산선과 일제의 수탈, 소설 <탁류>와 <세 길로>, 추억의 통학열차, 임피면의 역사와 문화, 군산여행정보 코너, 쉼터 등으로 운영된다. 사라진 지 한참 되었지만 객차전시관 오른쪽에 사방이 개방된 형태의 상당히 큰 쌀창고가 있었다.
<임피역 객차전시관 내부>
<임피역 객차전시관 내부의 임피역사 미니어처>
<임피역 객차전시관과 철도 건널목 차단기>
임피역사는 폐쇄되었지만 화물을 실은 열차들이 수시로 오갈 때마다 이 건널목 차단기는 여전히 딸랑딸랑 소리를 내며 작동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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