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전주사고, 어진박물관

큰누리 2015. 6. 17. 18:21

<전주사고(全州史庫)>

우리나라는 고려시대부터 춘추관과 예문관을 상설하고 사관을 두어 날마다 시정(時政)을 기록하였으며 한 임금이 전왕시대의 역사를 편찬하여 이를 실록이라 하고 특별히 설치한 사고에 봉안하여 왔다.

 

조선왕조에서 실록을 편찬한 것은 1409년(태종9)부터 1413년(태종13)까지 태조실록 15권을 편찬한 것이 처음이며 1426년(세종8)에 정종실록 6권을 편찬하고 1431년(세종13) 태종실록 36권을 편찬한 후 태조, 정종, 태종의 3조실록 각 2부씩 등사하여 1부는 서울 춘추관, 1부는 충주사고에 봉안하였다. 그러나 2부 실록만으로는 그 보존이 매우 걱정되므로 1445년(세종27)에 다시 2부를 더 등사하여 전주, 성주 사고를 신설하고 각 1부씩 분장하였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 때 춘추관, 충주, 성주 3사고의 실록은 모두 소실되고 오직 전주사고의 실록만이 병화를 면했다. 그것은 손홍록, 안의 등이 실록을 내장산 용굴암에 이안, 사수하였기 때문이다. 전주사고에는 실록 784권 614책 47궤, 기타 전적이 64종 556책 15궤가 봉안되어 있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실록각은 소실되었는데 1991년 이를 복원하였으며, 조선왕조실록(국보 제151호)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현지 안내문에 의함--

 

 

 <경기전 안에 위치한 전주사고>

책을 보존하기 위해 누각형식으로 지어졌고 현재 내부를 공개하고 있다.

 

 

 

<전주사고 내부>

계단이 엄청나게 가파르다. 현재 전주사고 내부에 실록은 없고 사고와 실록에 관한 내용을 전시 중이다.

 

 

<조선왕조실록> 세계기록문화유산.

<조선왕조실록>은 태조대부터 철종대까지 총 25대 472년간 조선의 역사를 연, 월, 일의 순서에 따라 기록한 것으로 분량이 888책(1,893권)에 이르는 방대한 역사책이다. 여기에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을 비롯해 천문, 풍속에 이르기까지 조선사회의 제반모습이 총망라되어 있다.

 

조선왕조는 실록의 안전한 보존을 위하여 첫번째 실록인 <태조실록>이 완성된 후부터 실록의 복본을 만들어 춘추관과 지방의 충주, 성주, 전주에 사고를 지어 보관했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전주사고본을 제외한 실록 전체가 화를 당하자 춘추관 외에 강화 정족산, 태백산, 묘향산(후에 무주 적상산으로 이동), 오대산 산간지역에 4개 지방 사고를 짓고 실록을 보관해 왔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를 이해하는 기초적 사료이며, 우리나라 인쇄문의 전통과 높은 문화수준을 보여주는 역사서로 1997년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보호받고 있다.

--현지 안내문--

 

 

<조선왕조실록에 대한 안내>

 

 

<왕조실록 제작 모습>

 

 

<조선왕조실록 제작 과정과 세초하는 모습>

세초(洗草) 역대 왕의 실록을 편찬한 다음 그 초고를 없애는 일을 말한다. 천막 안에서 세초연이 벌어지고 있고, 물에서는 세초 중이고, 줄에는 세초한 종이를 재활용하기 위해 말리는 모습이다.

 

사관은 왕의 생전에 사적을 두 벌 작성하는데 이를 수초라 하여 한 벌은 자신이 보관하고 다른 한 벌은 춘추관에 제출하였다. 왕이 승하하면 실록청에서는 춘추관의 수초를 바탕으로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등을 참고하여 1차 원고(초초)를 편찬하고 다시 수정하여 중초를 편찬한 후, 재수정하여 실록을 편찬한 후 사고에 보관했다.

 

실록을 사고에 넣은 후에는 모든 사초를 없애는데 이것을 세초라 한다. 세초는 자하문(창의문) 밖 조지서에서 사초를 물에 씻어 글자를 지운 것을 말하며 세초가 끝나면 세초연이라 하여 연회를 베풀었다. 세초(洗草)는 사초(史草)의 유출을 막고 시비를 예방하기 위한 조처였으며 광해군 때 선조실록을 편찬한 후 처음으로 시행되었다.

 

 

<전주사고에 대한 안내>

1439년 외사고의 설치가 결정되었으나 1445년 실록 봉안이 이루어질 당시까지 전주에 사고가 건립되지 않았다. 따라서 전주사고에 보관하기 위해 내려 보낸 <태조실록>~<태종실록>은 전주성 안의 승의사(僧義寺)에 안치되었다.

이후 실록은 1464년 가을에 전주객사 북쪽에 있는 진남루로 옮겨졌다가 1472년 <세종실록>과 <예종실록>이 완성됨에 따라 전주에 양성지를 봉안사로 파견하고, 이를 계기로 경기전 동편에 실록각을 건립하였다.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날 때까지 각 왕대의 실록이 순차적으로 봉안되었다.

전주사고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하여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 각종 서적 총 1,322책이 60개의 궤(실록 47궤, 기타 13궤)에 담겨 보관되고 있었다.

 

사진 아래 부분의 서적은 왼쪽부터 예종실록, 세조실록, 단종실록, 태종실록이다. 

 

 

<조선왕조실록의 과학적인 보관방법>

1. 실록의 보관방법 : 물이 책에 스며들지 않도록 책위에 기름종이를 덮고, 질 좋은 종이를 책 사이사이에 끼워 책들이 서로 달라붙지 않게 한다. 악귀를 쫓기 위해 책을 붉은 보자기에 싸고 천궁, 창포 등의 약재를 넣어 해충의 피해를 막는다. 궤짝의 재료로 오동나무, 버드나무, 피나무, 소나무 등을 사용하며 열쇠로 책궤를 잠궈 쉽게 열 수 없도록 한다.

 

2. 실록의 부식을 막기 위한 포쇄방법 : 사고의 책궤를 꺼내 봉안된 실록을 꺼낸 후 사흘 동안 햇볕과 바람을 쐬어준 후 다시 궤짝에 넣어 봉한다.

 

 

 

<조선왕조실록의 표지, 크기가 다른 이유>

조선전기에 제작된 실록은 모두 감색 비단으로 표지를 제작했으며 크기는 왕대별로 약간 차이가 있는데 가장 큰 것은 중종실록이다. 현존하는 실록은 동일한 크기인데 표지의 재질이 다른 이유는 조선후기에 표지만 다시 제작해 묶었기 때문이고, 내지는 조선전기의 전주사고본 실록이다.

 

 

<임진왜란 당시 실록을 피난 시키는 모습>

윗 사진 아래의 책은 <수직상제일기>로 임진왜란 당시 안의와 손홍록이 조선왕조실록과 태조어진을 내장산으로 이안하고 숙직하면서 작성한 글이다.

조선왕조실록이 후대에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경기전 참봉 오희길과 태인지방 선비 손홍록, 안의를 비롯해 무사 김홍무, 수복 한춘 등 전라도 사람들의 죽음을 불사한 노고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들은 실록을 정읍 내장산으로 옮겼고, 계속해서 호남지방 침공이 예상되자 내장산을 떠나 아산으로 옮겼다.

 

이후 실록은 해주로 옮겨졌고, 임진왜란의 전황이 소강상태에 이르자 조정에서는 1595년에 실록을 강화도로 옮겼다.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실록은 안주를 거쳐 평안도 안변의 묘향산 보현사 별전으로 옮겨 전쟁이 끝날 때까지 보존하였다. 실록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 영변부 객사를 거쳐 1603년 강화도로 옮겼다.

 

 

 

<전주사고 연표>

1439년(세종21) 전주에 사고를 설치한 이후 1592년 임진왜란 때 이안한 과정, 1990년대에 실록각 터를 발굴하여 복원한 내용 등이다.

 

 

<5대사고 사진 : 사진 하단>

왼쪽부터 전주사고, 태백산사고, 태백산사고 실록보관 궤, 오대산사고, 적상산사고, 정족산사고이다.

 

 

<경기전 구역의 어진박물관>

 

 

<태조어진>

어진은 왕의 초상화를 말한다. 전주는 조선 건국자인 태조 이성계의 본향으로 그 선대들이 살았던 곳이다. 이를 기념해 1410년(태종10) 태조어진을 전주에 봉안하였으며, 1872년 구본이 낡아 박기준, 조중묵, 백은배 등 8인의 화가가 새로 모사해 경기전에 모셨다.

 

태조어진(국보 317호)은 건국자의 초상이라는 점에서 조선왕조를 상징한다. 명종실록에 의하면 태조어진이 26축 있었다고 하나 현재 남아있는 것은 경기전의 태조어진이 유일하다. 태조어진은 평상시 집무복인 익선관과 곤룡포, 백옥대와 흑화를 착용한 전신상으로 가슴과 어깨에 왕을 상징하는 다섯 발톱을 가진 용이 그려져 있다. 1872년(고종9)에 모사한 것이지만 조선초의 제작기법으로 그려졌다. 곤룡포도 역대 왕들이 홍룡포를 입은 것에 반해 청룡포를 입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태조는 키가 크고, 몸이 곧바르며, 귀가 아주 컸다고 한다. 태조어진을 보면 넓은 광대뼈에 눈과 입이 작으며 양쪽 귀가 큰 모습이다. 오른쪽 눈썹 위에 사마귀까지 그려져 있어 사실적 묘사에 치중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영흥 준원전의 태조어진이 사진으로 전하고 있다. 경기전 태조어진이 흰수염의 노년 모습인데 반해, 준원전의 태조어진은 장년의 모습으로 검은 수염에 광대뼈가 도드라져 있다.

 

 

<어진박물관 안의 태조어진 모사본>

어진박물관의 태조어진은 2011년 권오창화백이 모사한 것이다.

 

 

 

<태조어진 사진과 태조진전>

♣ 태조진전 : 전주 경기전(1919), 개성 목청전(일제 강점기), 영흥 준원전(1911), 경주 집경전구기(1922) 사진이다.

 태조어진(두번째 사진) : 왼쪽은 경기전의 태조어진을 1915년에 촬영, 오른쪽은 영흥 준원전의 태조어진을 1911년에 촬영한 것.

 

 

 

<태조 관련 유물 사진>

♣ 함흥본궁도(왼쪽 첫번째단 ) : 태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

 태조가 사용했다고 전하는 활과 화살(오른쪽 첫번째단).

 유린청(오른쪽 두번째단) : 운봉(황산대첩)에서 싸울 때 태조가 탔던 함흥산 말.

 건원릉(세번째 단) : 태조의 능과 충남 금산에 있는 태조의 태실.

 

 

<경기전 태조어진 뒤의 일월오봉도>

 

 

<경기전 조경묘에 있는 채운선>

 

 

<경기전 본전의 용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