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영월 장릉(莊陵)과 청령포

큰누리 2015. 7. 14. 22:08

<영월 장릉(莊陵)>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단종로 190(영흥리) 소재.

조선 6대 왕인 단종(재위 1452~1455)의 무덤으로 사적 제196호이다.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긴 후 충신들이 그를 다시 왕으로 복위시키려는 계획이 발각되어 영월 청령포로 유배되었다 관풍헌에서 죽임을 당했다. 주검이 강물에 띄워졌으나 후환이 두려워 시신을 거두는 사람이 없었는데 영월호장 엄홍도가 시신을 수습하여 암장하였다.

그 후 오랫동안 묘의 위치조차 모르다가 중종 36년(1541) 왕명으로 당시의 영월군수 박충원이 묘를 찾아 묘역을 정비했다. 선조 13년(1580)에 상석, 표석, 장명등, 망주석 등을 세웠다. 숙종 7년(1681)에 노산군에서 노산대군으로 추봉되었다가 숙종 24년(1698)에 단종으로 추복되었으며, 능호를 장릉으로 정했다. 

 

상석은 추봉된 왕릉의 예우에 따라 난간과 무인석을 설치하지 않고 가장 간단한 양식을 따랐다. 사각형 집 모양의 장명등은 조선왕릉 중 장릉이 최초이다. 장릉은 왕의 무덤에 따른 격식 외에 단종에게 충절을 다한 신하들의 위패를 모시는 장판옥과 그들에게 제향을 올리는 배식단이 있다. 기타 정려비, 기적비, 정자(배견정) 등이 있는 유일한 왕릉이며 이 모든 시설들은 단종이 왕위를 찬탈 당한 것과 관련된 것이다. 장릉은 2011. 07.08 고시에 의해 영월 장릉으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유네스코문화유산(조선왕릉)으로 등재되었다.

 

 

<영월 장릉 단종역사관과 재실>

 

 

<영월 장릉 재실>

재실은 능을 지키는 참봉 1명과 수호군 9명이 기거하며 제기 등을 보관하고 단종 제향을 지낼 때 제물을 준비하던 곳이다.

 

 

<단종역사관의 사료들, 장릉지와 세종실록>

<장릉지>는 단종이 왕위를 빼앗긴 뒤 영월에서 죽음을 당하기까지의 내용과 숙종 때의 복위에 관한 내용을 기록한 책이다. <세조실록>에서는 '금성대군의 죽은 소식을 접한 노산군이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장릉지>에는 '세조 3년 10월 24일 유시에 복득(단종의 하인)이 활끈으로 노산군의 목을 졸라 숨지게 하였다'고 적혀 있다.

단종 죽음의 진실은 진실은 최초의 유배지 청령포에서 홍수 때문에 관풍헌으로 옮겨 기거하다가 금부도사 왕방연이 세조의 어명으로 올린 사약을 받고 죽었다.

 

 

<단종역사관의 사료들, 복제 단종대왕실록>

단종 재위 기간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실록으로 처음 명칭은 <노산군일기>였으나 숙종 때 단종이 복위되면서 <단종대왕실록>으로 개칭하였다.

 

 

<단종역사관의 사료들, 단종과 정순왕후 금보>

 

 

<단종역사관의 정순왕후 관련 사료들>

왼쪽부터 정순왕후 능인 사릉(도), 정순왕후가 출궁 후 일생을 마친 정업원(도), 사릉비문(조선국 정순왕후사릉), 정업원구기 탁본이다.  

 

 

<엄홍도 정여각>

관풍헌에서 사약을 마신 후 강물에 던져진 단종의 시신을 거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어명이 내려졌다. 그런 상황에서 목숨을 걸고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여 현재의 영월 장릉에 암매장한 영월호장 엄홍도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영조 2년(1726)에 세운 비각이다. 엄홍도의 충절이 알려진 것은 영조 때이다.

 

 

<배식단>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들에게 제향을 올리는 곳으로 충신들의 위패를 모신 장판옥 앞에 있다.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신하들의 배식단이 따로 설치되어 있다.

 

 

<장릉 신로와 영천, 수라간>

 

 

<장릉 정자각, 비각, 수복방, 홍살문>

 

 

<장릉 수라간, 정자각, 비각>

뒤의 능선 끝에 봉분의 곡장, 문인석 등이 보인다.

 

 

<영천>

정조 15년에 판 우물로 매년 한식에 제향을 지낼 때 물이 많이 솟는다고 한다.

 

 

<단종비각과 홍살문>

비에는 '조선국 단종대왕장릉'이라 새겨져 있다. 뒷건물은 수복방, 배식단과 홍살문이다.

 

 

<장릉 봉분 쪽에서 내려다 본 모습>

왼쪽부터 수리 중인 장판옥, 배식단, 홍살문과 수복방, 비각, 정자각, 영천, 수라간이다.

 

 

<영월 장릉>

석양 무렵이라 난반사가 심해 제대로 된 촬영이 불가능했다. 무인석은 없고 문인석만 있으며 조선왕릉 최초의 사각지붕형 장명등, 곡장, 상석, 망주석 석마, 석양 등이 조촐하게 있다.

 

 

 

<장릉 봉분 쪽에서 본 송림>

 

 

<낙촌비각>

영월군수였던 낙촌 박충원이 엄홍도가 암장한 단종의 묘를 찾은 것에 대한 내용을 비에 적어 기록하고 있다.

 

 

<배견정>

배견정 아래에 있는 바위는 배견암이라고 한다. 1791년(정조) 영월부사 박기정이 두견새가 바위(배견암)에 앉아 왕릉을 바라보며 우는 모습을 여러 차례 목격하고 편하게 왕을 배알하도록 지어준 정자라고 한다. 

 

기타 영월 장릉 내 건물로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 32인, 조사 186인, 여인 6인, 환관군노 44인 등 268인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정조 15년에 세운 장판옥이 있으나 답사 당시 공사 중이라 촬영 및 접근이 불가능했다.

 

 

<청령포 건너편의 왕방연 시조비 앞, 뒤면>

금부도사 왕방연이 단종에게 사약을 진어하고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비통한 심정을 가눌 길 없어 청령포를 바라보며 시조를 읊은 곳이다.

천만리 머나먼 길의 고은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도다. 울어 밤길 예놓다.

 

 

 

<왕방연 시비 앞에서 본 청령포>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긴 후 단종이 유배된 곳으로 송림이 빽빽이 들어차 있고 삼면이 강물에 둘러싸여 배를 타지 않고는 출입할 수 없는 섬 같은 곳이다. 남한강 상류에 위치한 청령포는 수려한 절경으로 2008년 명승 제50호로 지정되었다.

 

 

<청령포 선착장에서 본 청령포와 관람료>

청령포에 들어가려면 이곳에서 배를 타야 하는데 우리는 늦게 도착하여 청령포행 마지막 배를 놓쳐 들어가지 못했다.

 

 

 

<청령포 선착장의 '오백년만의 해후'>

영월 청령포에 유배되었다 불귀의 객이 된 단종과 정순왕후가 이별한지 555년이 되던 2012년, 두 사람의 재회를 희망하며 만든 조형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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