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

진천군 이월면 노원리 왜가리 번식지, 신화국 3대묘, 신헌 古家

큰누리 2016. 4. 29. 22:24

<진천군 이월면 노원리의 복숭아꽃> 

서울은 이미 복숭아꽃이 진지 오래인데...

 

 

 

<평산 신씨 재실(노은영당)>

 

 

 

<진천 왜가리 번식지(천연기념물 제13호)>

명칭 : 진천 노원리 왜가리 번식지.

지정일 : 1962. 12. 07.

소재지 : 충북 진천군 이월면 논실길 113-12(노원리).

소유자 : 평산신씨중헌공파종중.

관리자 : 진천군.

왜가리는 우리나라의 백로과 새들 중에서 가장 큰 새로 우리나라 전지역에 걸쳐 번식하는 여름새이며, 일부는 남쪽 지방과 섬 지방에서 겨울을 나는 텃새이다. 논, 하천, 간석지에서 살며 개구리, 물고기, 뱀 등을 잡아 먹는다.

진천의 왜가리 번식지는 1970년까지 노원리 보호지역 내에서 자라고 있는 은행나무를 중심으로 수백마리의 백로류 및 왜가리가 번식하여 왔다. 그러나 현재는 이 은행나무가 새들의 배설물에 의해 말라 죽어가고 있으며, 5~6개 둥지의 중대백로만 남아 있고, 왜가리와 백로들은 주변 숲으로 옮겨 살고 있다. 진천의 왜가리 번식지는 수질 오염으로 인해 왜가리의 먹이가 되는 개구리, 미꾸라지들이 줄어 수가 감소되었으나, 우리나라 왜가리 번식지를 대표하는 지역이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문화재청 홈페이지에서 퍼옴-

 

 

왜가리가 천연기념물인지 장소가 천연기념물인지 헛갈렸으나 위의 문화재청 자료를 보니 장소가 천연기념물이다. 위의 설명처럼 왜가리 번식지였던 신화국선생 묘역 앞 은행나무는 왜가리 배설물로 인해 상부가 말라 죽은 상태라서 방문 당시에 주변에서 한 마리의 왜가리도 볼 수 없었다. 대신 같은 날 답사를 했던 괴산의 송시열 선생묘 옆에서 엄청난 규모로 둥지에 앉아 있거나 주변을 나는 왜가리떼를 보았다.

 

 

<문화재청 홈페이지에서 퍼온 위의 수령 1,000년의 은행나무와 왜가리 번식지>

 

 

 

<은행나무 바로 위에 있는 평천부원군(신화국)사적비, 신화국 3대 묘역>

이 일대는 평산 신씨의 묘역이고, 멀리 왼쪽의 단 위에 있는 묘소가 신화국선생 3대 묘이다. 평천부원군 신화국(1517~1578)의 묘는 원래 금천 동면 삼성산에 있었는데 현 위치로 이장하는 과정에서 백자합과 청화백자 묘지석이 발견되었다. 묘지(석)에는 신화국의 선조와 그의 행적에 대한 내용이 적혀있다.

아들 신잡(1541~1609)이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한 공로로 호성공신이 되면서 신화국은 평천부원군으로 추종되었다. 또다른 아들 신립(1546~1592)은 임진왜란 때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왜군에게 패한 후 투신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신립의 아들 신경진은 인조반정 공신이다. 신화국의 딸은 인조의 생모인 계운궁 구씨의 어머니이다. 

 

 

<평산 신씨 제실 노은영당(老隱影堂)>

 

 

<신화국 3대 묘역>

위로부터 아버지인 신화국 묘, 아들인 신잡 묘, 손자인 신경희 묘이다. 묘 주변에 철 늦은 할미꽃들이 엄청나게 많이 피어있었다.

 

 

<신경희와 부인 완산 이씨 합장묘>

 

 

 

<신잡과 부인 남원 양씨 합장묘>

 

 

 

<신화국과 부인 파평 윤씨 합장묘, 문인석>

 

 

 

 

<신화국 3대 묘역 후경>

아무리 둘러보아도 부근에 왜가리가 살 만한 큰 나무가 눈에 띄지 않는다.

 

 

<윗 사진 원경 중앙쯤에 위치한 진천 신헌 고가(고택)>

이 집은 신헌(1810~1888) 선생이 살았던 집이다. 1850년경에 처음 지은 것으로 ㄱ자 모양의 안채와 안채의 동남쪽으로 중문과 광채가 있다. 1920년대에 헌 곳을 수리하고 고쳤다. 원래 ㄱ자 모양의 사랑채와 행랑채가 있었으나, 해체되어 진천읍의 길상사를 중수하는데 사용되었다고 한다.

 

신헌(1810~1888)은 조선말기의 무신이며 외교가이다. 자는 국빈(國賓), 호는 위당(威堂)이며, 본관은 평산이다. 순조 28년(1828)에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주부에 임면된 후 고종 때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부반직을 두루 지냈다.

고종 3년(1866) 병인양요 때는 총융사로 강화도의 소금창고를 지켰고, 난이 끝나자 좌참찬 겸 훈련대장이 되어 수뢰포를 만든 공으로 승록대부에 올랐다. 고종 12년(1875) 운양호 사건이 일어나자 이듬해 전권대관이 되어 병자수호조약을, 고종 19년(1882)에는 조미수호조약을 체결하였다. 1882년에 판삼군부사가 되었고 사후 왕은 장숙이라는 이름을 주어 그의 공덕을 기렸다.

 

 

 

<진천 신헌 고가(고택) 안뜰>

만개한 자목련, 옥매와 황매화(죽단화), 모과나무, 명자나무, 금낭화가 고택의 정취를 더한다.

 

 

<진천 신헌 고가(고택) 중문>

 

 

<진천 신헌 고가(고택) 광채>

 

 

 

<진천 신헌 고가(고택) 안채>

 

 

 

<측면에서 본 진천 신헌 고가(고택) 안채와 광채>

 

 

 

<진천 신헌 고가(고택) 뒷 모습>

 

 

<진천 신헌 고가(고택) 마당의 하늘매발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