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요르단

이스라엘, 요르단 여행11 - Amman Citadel(암만 성채)

큰누리 2017. 3. 11. 23:14

이스라엘 요르단 여행 5일째인 1/16의 일정은... 

암만 리완호텔- 암만 시타델(암만 성채), 암만 고고학박물관- 암만 구시가지, 재래시장 투어- 1시간 걸려 마다바 성 조지 교회(St.George Church) 도착, 모자이크 지도 관람 - 1시간 걸려 느보산 입구 도착, 현지식 점심 - 느보산 모세 기념성지, 성당 모자이크 관람 - 느보산 수공예품 센터에서 쇼핑 - 암만 리완호텔 투숙.

 

<암만 성채(Amman Citadel)>

국가역사지구로 지정된 암만 성채(Amman Citadel, 암몬성)는 요르단의 수도 암만 시가지 꼭대기에 있는 고대 유적지이다. 고고학적 발굴에 따르면 암만 성채는 수천 년 동안 요새로 이용되었는데 고대 4대 문명 발상지인 메소포타미아, 나일강 문명과 동시대인 7,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성채에 인간이 거주한 것은 최소한 청동기 중기이며 철기시대, 페르시아, 헬레니즘, 로마, 비잔틴을 거쳐 아랍 무슬림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다.

성채는 탁 트인 야외 박물관 같은 곳으로 시대를 달리하는 수많은 문명의 자취를 볼 수 있다. 이곳은 성경에도 나오는 곳이며 수많은 전쟁과 지진의 생생한 증거이기도 하다. 암만 성채는 요르단 최초의 국립고고학박물관이라 할 수 있으며 암만과 기타 요르단 여러 유적에서 발굴된 유물, 인물상, 도자기 등이 많이 수집되어 있다.

 

암만은 기원 전 나바테아 왕국시대부터 아라비아 반도에서 홍해를 따라 북상하는 대상들의 '왕의 대로'에 위치한 교통의 요지였다. 암만은 얍복강의 중심지이자 성채로 에워싸인 몇 개의 언덕으로 이루어진 도시로 가장 높은 언덕인 암몬성은 해발 850m에 위치한다.

 

고대 도시 암만은 라바트 암몬으로 불리다가 헬레니즘 시대에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푸스 2세가 도시를 재건했다. 1세기에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간 이후에는 필라델피아로 불렸다. 로마는 이곳을 아라비아 반도와 이집트로 가는 전진기지로 삼고 많은 로마인들을 거주시켰기 때문에 로마의 유적이 많다. 비잔틴 시대를 거쳐 7세기에 우마이야 왕조를 시작으로 1900년대에 이르기까지 이슬람 왕조들이 이곳을 지배했다.

로마, 비잔틴 시대의 유적은 암몬성의 헤라클레스 신전과 비잔틴 교회 터 외에 6,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원형극장, 님페온 유적이 남아있다. 지배자가 우마야드 왕조로 바뀌면서 도시의 이름도 암만으로 바뀌었고, 유적으로는 비잔틴 양식의 건물을 증축해서 만든 우마야드 궁전 기념문이 남아있다.

 

 

<암만 성채와 도시 이름의 변천사를 보여주는 석비들>

오른쪽부터 역사적으로 다르게 불린 암만의 이름이 적혀 있다. 라바트 암만 - 필라델피아 - 암만 순이다. 암만 석비에서 필라델피아 석비 사이 뒤로 보이는 기둥은 헤라클레스 신전이고, 그 앞의 돌담은 방어벽이다.

 

 

<암만 성채(Amman Citadel)의 남문쪽 유적과 구시가지의 원형극장>

암만 성채(Amman Citadel)에서는 암만 시가지가 360도 속속들이 다 보인다. 그 중에서도 로마 시대의 원형극장은 모양과 크기 때문에 가장 눈에 띄는 건물이다. 당시에는 이곳에서 본 원형극장과 이어 투어한 평지의 암만 재래시장 님페온 뒤에 있는 원형극장은 서로 다른 존재로 알았다. 

 

조망한 것과 평지에서 보는 차이를 이번 여행 만큼 절실히 느낀 적이 없었고, 그것을 즉시 알아채지 못하고 헤맨 내가 신기할 지경이었다. 우리는 암만 성채와 고고학박물관을 1시간 30분 정도 둘러본 후 성벽을 따라 평지로 내려가 암만 성채 바로 아래부터 원형극장에 이르기까지에 펼쳐져 있는 구시가지와 재래시장을 투어한 것인데 당시엔 그 둘을 묶어 판단하지 못한 것이다. 우습게도 사진을 정리하면서 암만 구시가지와 암만 성채, 그 사이에서 본 건물들을 제대로 이해했다.

 

 

<암만 성채(Amman Citadel) 헤라클레스 신전 영역의 유적들>

가장 위쪽에 보이는 유적부터 사진 오른쪽 밖으로 이어진 높은 기둥들까지가 헤라클레스 신전이므로 규모가 상당히 크다. 암만 성채(시타델)의 유적은 우마야드 궁전을 빼고는 폐허 같은데 묘하게도 용도나 규모 등을 유추할 만큼은 남아있다. 그것도 한 시대의 유적이 아니라 청동기 시대 동굴부터 현대의 공동묘지로 독자적인 형태, 혹은 재활용하는 형태로 남아있다. 

 

 

<암만 성채(Amman Citadel)의 헤라클레스 신전과 방어벽>

헤라클레스 신전(161-166)은 당시 인기 있는 영웅이자 신이었던 헤라클레스에게 헌정되었는데 신전 부근에서 발견된 거대한 대리석 팔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헤라클레스는 당시 필라델피아라고 불렸던 이곳에서 발견된 로마 동전에도 모습이 새겨져 있다.

이 신전은 성채 북쪽의 포르티코로 둘러싸인 거대한 성역 안에 세워져 있다. 당시 아라비아 지역의 총독이었던 Geminius Marcianos 시기에 세워져 로마 2두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루시우스 베루스에게 헌정되었다. 6세기에 비잔틴 교회, 8세기에 우마야드 궁전을 건축할 때 석재를 재료로 사용하고 지진으로 파손되어 폐허가 된 것을 1933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암만 성채(Amman Citadel) 8세기(우마야드 시대)의 수로>

암만은 강수량이 부족했기 때문에 빗물을 큰 저수조에 모은 후 이런 수로를 만들고 성채 곳곳으로 물을 공급했다.

 

 

<암만 성채(Amman Citadel)의 방어벽>

성채의 초기 거주자들은 외부로부터 침입을 막기 위해 경사진 벽을 만들었다. 청동기 시대 말기에는 성채의 외벽에 딱딱한 석회를 발라 적이 기어오르지 못하게 했다. 로마 시대와 우마야드 시대에는 방어벽을 건축하여 방어를 더욱 공고하게 했는데 요새를 둘러싼 방어벽의 길이가 1.68km였다고 한다.

 

 

<암만 시타델(암만 성채) 정상쪽에서 본 유적과 남문쪽>

두 번째 사진에 보이는 암만 성채(시타델)와 원형극장 사이에 구시가지와 재래시장이 있다. 이날 가랑비가 오는 것처럼 안개가 짙게 끼고 이스라엘, 요르단 여행 중 가장 우중충하고 조금 춥게 느꼈던 날씨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채가 시내 중심의 가장 높은 언덕에 있기 때문에 구 시가지 건물 하나하나를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전망 상태가 좋다.

 

 

 

<암만 성채의 헤라클레스 신전(161-166년)>

지진과 후대에 건물을 신축하면서 석재를 빼다 썼기 때문에 폐허 수준이지만 어마어마한 규모를 짐작하기엔 무리가 없다. 

 

 

 

<암만 성채 헤라클레스 신전의 손과 팔꿈치 조각의 잔해>

손이 이 정도 크기면 도대체 얼마나 큰 인물 조각이었을까? 가이샤라의 원형극장 앞에도 대리석 조각 파편을 모아 놓았는데 이 정도는 아니었다.

 

 

<암만 시타델(암만 성채) 어디에서도 눈에 두드러지는 나무(동쪽)>

 

 

<암만 시타델(암만 성채)의 헤라클레스 신전과 석회가마(800년)>

석회석은 유사 이래 건물을 짓는 기본 요소였다. 건물을 지을 때 석회로 만든 여러 종류의 몰타르나 석고 등이 사용되었는데 강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가열이 필요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가마에 석회석을 가득 채워 사흘 동안 불을 땐 후 가마가 식으면 석회석을 석회가루로 만들어 건축에 사용했다. 749년 대지진 이후 압바시드 왕조 때 이 지역에 많은 건물들이 신축되면서 석회가 많이 생산되었다.

 

 

<암만 시타델(암만 성채) 비잔틴 교회 터>

정상 부근의 우마야드 궁전 주변에 있는 6세기(550년)의 비잔틴 교회 터이다. 이 교회는 중앙 회당과 2개의 회랑으로 구성된 바실리카였다. 아칸서스 잎으로 장식된 코린트식 기둥머리는 이 교회를 짓기 위해 헤라클레스 신전으로부터 가져온 것이며 통로는 판석으로 포장되어 있다.

 

 

<암만 시타델(암만 성채) 우마야드 궁전 기념문>

위 사진은 우마야드 궁전 기념문 남쪽, 아래 사진은 북쪽이다.

 

 

 

<암만 시타델(암만 성채) 우마야드 중정, 모스크 터>

윗 사진의 우마야드 궁전 기념문을 중심으로 문 북쪽에는 통치기관과 그곳에 근무하는 지배층의 주택단지, 로마 시대 열주도로가 있고, 남쪽에는 아래 사진처럼 커다란 중정과 터만 남은 모스크, 현재 고고학박물관으로 사용되는 건물, 헤라클레스 신전이 있다.

 

 

<암만 시타델(암만 성채) 우마야드 목욕탕(Hammam. 730>

우마야드 전통에 하만(Hammam. 목욕탕)에서 사람들이 모여 몸을 씻는 것은 도시생활의 아주 중요한 부분이었다목욕탕은 여러 개의 방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목욕을 하러 온 사람들은 맨 처음 탈의실에서 옷을 벗고 냉탕, 온탕, 열탕 순으로 차례로 이동했다.

욕실 내부는 광을 낸 석재나 대리석으로 만들고 프레스코화나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었다고 하나 실제로 남아있는 것은 없다의식을 행하는 북쪽 입구의 홀과 연결되어 있는 이 욕실은 총독이나 그의 가족들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대중들은 남쪽에 있는 목욕탕을 이용했으며 Rahbah라 불리는 커다란 정원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암만 시타델(암만 성채) 우마야드 Hammam Birka(저수조, 물탱크. 730)>

아랍어로 Birka, Sahrij라고 불리는 뚜껑 없는 물탱크는 지름 17.5m, 벽 두께 2,5m이다내부는 방수된 석회로 겹겹이 쌓은 흔적이 있다이 물탱크는 1370의 물을 저장할 수 있었으며 주변의 건물과 목욕탕, 화장실 등 여러 곳으로 물을 공급했다물탱크의 규모로 보아 이곳에 거주하는 인구가 상당했을 거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물탱크의 위쪽 중간에 있는 구멍은 동쪽 성벽을 따라 물을 흘려보내는 통로이다바닥은 약간 비스듬히 되어 있어 외부로부터 유입된 토사가 바닥에 고이도록 되어 있다

 

 

<암만 시타델(암만 성채) 우마야드 궁전 기념문>

우마야드 궁전(The Umayyad Complex)은 완벽하게 이슬람식 도시의 기본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다모스크, 시장, 목욕탕, 리셉션룸, 왕좌가 있는 방 등이 있으며 여러 개의 거주지도 있다.

우마야드 궁전은 로마 신전 성역의 잔해 위에 세워졌는데 이 언덕을 뒤덮고 있는 지역의 대부분이 메디나(무슬림지구)이다궁전 기념문 북쪽 앞에는 열주도로가 있고 열주도로를 기준으로 동쪽 앞부터 북쪽 끝은 통치자의 그의 가족들, 수행원들, 고용인들이 거주하는 주택단지였다서쪽에도 주택단지가 있고 북쪽 끝에는 통치기관인 왕좌 회의실, 리셉션실, 공식 알현실(Iwan) 등이 있었다. 기념문 북쪽 바로 앞에는 목욕탕과 대형 물탱크가 있다. 시민들은 오늘날 암만 시내의 중심지인 아래 구역에 살았다.

 

749년 대지진으로 이곳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1년 후 우마야드 왕조는 압바시드 왕조에게 멸망 당했다. 압바시드 왕조는 이 지역을 재건하면서 거주 지역을 더 잘게 쪼개어 방들을 만들었는데 이전보다 못한 상황이 되었다

사원의 북쪽에는 ‘Rahbah’라 불리는 중정이 있었는데 이 중정 동쪽에서 서쪽으로 측면에 11개의 작은 방과 가게를 만들어 수크(시장)로 사용했다중정에는 3개의 작은 길이 있는데 이것은 성채를 둘러싼 요새의 성벽에 있는 문들로 이어져 있다.

 

 

 

 

<암만 시타델(암만 성채) 열주도로>

열주도로는 로마 시대의 유적이지만 열주도로 왼쪽부터 시타델 북쪽 끝까지 구역은 이슬람 왕국(우마야드)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건물들이 있었던 곳이다. 왕좌 회의실, 리셉션실, 공식 알현실(Iwan), 고위층의 주택단지가 있었다.

 

 

<암만 시타델(암만 성채) 왕좌 회의실, 리셉션실 주변>

공식 알현실과 더불어 암만 시타델(암만 성채)의 가장 북쪽 지점이다.

 

 

<암만 시타델(암만 성채) 공식 알현실(Iwan)>

 

 

<암만 시타델(암만 성채) 북쪽 주택단지>

암만 시타델에서 가장 온전(!)한 모습인 우마야드 궁전 기념문을 중심으로 북쪽에 열주도로가 있고 그 끝에는 왕좌 회의실, 리셉션 실 등의 건물이, 우마야드 궁전 기념문을 등지고 도로 오른쪽에는 아래처럼 궁전, 사원과 관련된 고위층들이 거주하던 대규모의 주택단지가 있다.

암만 성채는 거의 폐허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볼거리가 많고 용도도 짐작할 수 있는 유적들이 많다. 특히 우마야드 궁전 기념문 주변과 앞에 있는 이 부근의 건물 터들이 아기자기하고 밀도가 높다.

 

 

<암만 시타델(암만 성채) 서쪽 거주지>

 

 

<암만 시타델(암만 성채) 청동기 시대 동굴>

암만 성채에서 인간이 거주한 시기가 오래 되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유적이다.

 

 

<암만 구 시가지>

암만(구 시가지)은 역사가 긴 도시가 흔히 그렇 듯 건축 규제를 받는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우리에게 흔히 미색이라고 불리는 노란 기가 도는 베이지색을 제외하고는 도시에 특별한 색깔이 없고, 초고층 빌딩도 없다. 그래서 암만은 특별하게 old한 도시로 각인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가 묵은 호텔(Amman Liwan Hotel)은 신시가지 쪽인지 주변에 주로 고급 빌라와 호텔, 고층건물들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