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

함양 승안사지, 정여창 묘, 안의면 광풍루, 거창의 숙소

큰누리 2017. 7. 14. 20:45

<함양 승안사지(昇安寺址) 삼층석탑>

지정 : 보물 제294호

소재지 :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 263.

이 탑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졌으나, 전체적으로는 통일신라시대 석탑을 계승하고 있다. 상층기단에 불(佛), 보살(菩薩), 비천(飛天)을 조각하였으나 조각수법은 다소 떨어지며 격식에도 벗어나 있다. 1층 탑의 몸돌에는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다. 그러나 일부 특수한 수법을 구사하고, 장엄한 구성미 조형에 힘쓴 점에서 고려초기의 주목할 만한 작품이라 하겠다.

1962년에 현재의 장소로 탑을 옮길 때, 홍치(弘治) 7년(1494)의 중수에 관한 내용이 한지에 먹으로 쓴 문서(韓紙墨書重修記)에서 발견되어 조선시대에 탑이 옮겨졌음이 확인되었다. 1층 몸돌 위에 만들어진 사리구멍에서는 원통형사리함, 녹유사리병, 비단조각과 주머니, 유리구슬 등이 발견되었다. 현재 탑의 높이는 4.3m로 길쭉한 모습에 지나치게 두꺼워 균형을 잃고 있다.   --현지 안내문--

 

 

<함양 승안사지(昇安寺址) 삼층석탑을 서로 다른 각도에서 본 모습>

첫번째 사진을 기준으로 왼쪽 평지에 승안사지 석조여래좌상이 있고, 오른쪽 산 중턱에 일두 정여창 선생 부부 묘가 있다.

 

 

 

 

<일두 정여창 선생 묘역으로 가며 되돌아본 승안사지 석조여래좌상 비각과 삼층석탑>

 

 

<함양 승안사지 석조여래좌상>

지정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3호

소재지 :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

불상이 있는 현재의 위치는 통일신라 때 번창하였다고 전해지는 승안사의 옛 절터이다.  승안사는 1481년(성종 12)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지만, 약 300년 뒤인 1799년(정조 23)에 간행한 범우고(梵宇攷)에 이미 절이 없어졌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그 사이에 어떤 연유에서이든 절이 소멸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반신이 땅에 묻힌 채 상반신만 남아있는 이 불상은 현재의 크기만으로도 280cm나 되는 거대한 불상으로써, 오른팔이 떨어져 나가고 없다. 마모가 심해 자세한 모습을 알아보기 곤란할 정도인 머리는 몸체와 비례가 맞지 않아 매우 어색한 느낌을 준다. 다소 좁은 어깨로 인해 왜소해 보이는 체구, 유난히 큰 코와 일자로 다문 입 때문에 엄격하다는 인상을 준다. 또 선에 가까운 옷주름과 직선적인 신체의 윤곽선으로 인해 불상은 생동감이 없어 보인다. 이것은 고려시대의 거대한 불상에서 나타나는 조형적 특징을 잘 보여주는 석불 좌상이다. 이 불상에서 20m 가량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승안사지(昇安寺址) 삼층석탑은 보물 제294호이다.   --현지 안내문--

 

 

<함양 승안사지 석조여래좌상 정면과 측면>

 

 

 

<승안사지 삼층석탑에서 일두 정여창 선생 묘역으로 오르는 계단>

 

 

<일두 정여창 선생 묘>

안내문이 없고 석물들에 이끼가 많이 끼어 있지만 대신 비석을 재정비해서 그나마 구분이 쉽다. 신도비를 받친 거북이가 짤막하지만 튼실해 보이고, 비석 역시 다른 묘비에 비해 상당히 넓고 큰 편이다. 비문은 동계 정온 선생이 지었다고 하나 자세히 보지는 못했다. 상석도 특이하다.

위쪽은 부인인 정경부인 완산(전주) 이씨의 묘이다. 부인이 왕족이었기 때문에 일두고택 사랑채에 원기둥 (3개)을 쓸 수 있었다고 한다. 

 

 

 

 

<뒤(부인 묘 앞)에서 본 일두 정여창 선생 묘>

 

 

<정여창 선생 부인인 정경부인 완산(전주) 이씨의 묘>

 

 

 

<정여창 선생 부인인 정경부인 완산(전주) 이씨의 묘에서 본 정여창 선생 부부묘>

 

 

 

<안의 광풍루(安義 光風樓)>

지정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92호

소재지 :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금천리.

이 누각은 1412년(태종 12)에 당시 이안(利安, '안의'의 옛 이름) 현감이던 전우(全遇, 생몰 연대 미상)가 건립하였는데, 당시의 이름은 선화루(宣化樓)였다. 그 후 1425년(세종 7)에 김홍의가 지금의 자리로 옮겼으며, 1494년(성종 25)에 안의현감이던 정여창 선생이 중건하면서 이름을 광풍루(光風樓)로 바꾸었다. 이후 정유재란(丁酉再亂)으로 불타는 등,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광풍루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으로, 기둥의 주춧돌은 둥글게 깎아 만들었다. 지붕의 경사면에 처마를 하나 덧댄 팔작지붕을 연출하였으나, 처마 돌출이 작기 때문에 호방하고 시원한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전체적으로 화려한 장식을 배제한 소박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함양 읍내의 학사루(學士樓)와 유사한 건축양식이다.

광풍루는 금호강을 앞으로 하고 안의읍을 뒤로 하면서 풍광을 즐길 수 있도록 지었다. 그러나 오늘날 강은 하천 개발로 그 모습을 잃어버렸고, 후면에 상가와 민가가 빼곡히 들어서 있어 조선시대 선비들이 즐겼을 풍류를 찾을 길이 없다. 누각 위에 걸린 옛 시인의 글귀만이 옛 금호강변의 아름다운 '빛과 바람(光風)'의 느낌을 전해줄 뿐이다.   --현지 안내문--

 

 

<안의 광풍루(安義 光風樓)의 앞, 옆, 뒷모습>

 

 

 

 

<안의 광풍루(安義 光風樓) 누각으로 오르는 계단>

당시의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누각 계단에 잠금 장치(문)가 있는 것은 처음 본 것 같다.

 

 

<안의 광풍루(安義 光風樓) 누각의 모습>

현판이 즐비한 다른 정자와 달리 중앙 대들보 양쪽에 각각 1개씩 걸려 있으나 날이 흐려 사진이 흔들린 탓에 글의 내용 파악이 어렵다.

 

 

 

 

<의병대장 문태서 기공비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의병대장 문태서 기공비는 안의면에서 거병한 의재 문태서(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 1963) 의병장의 공적을 기려 1970년 3월에 기공되었다. 장군은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 장구지동에서 출생하였으며, 1904년에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금강산에 들어가 병법을 연구하던 중 1905년에 일본이 외교권을 강탈하자 금강산을 나와 최익현 선생의 의병에 참가하였으나 선생이 체포되자 뒤를 도모하였다. 

1907년 일제가 헤이그밀사사건을 계기로 고종의 양위와 군대해산을 강요하자 해산된 군대가 모두 의병에 투신하여 의병운동이 전개되었고, 장군은 덕유산을 근거지로 부하 약 200명을 거느리고 경상도, 전라도 등을 넘나들며 일본군을 습격하고 타격을 주었다. 이후 전국적 의병의 서울 진공작전에 참여했다가 진공이 중지되자 옥천군 이원역을 폭파하기도 했다. 1910년일제의 강제병합 이후 대대적인 공세에 몰린 장군은 유격전을 벌이다 1912년 8월 본가 방문 중 왜국 밀정의 계략에 빠져 체포되었고, 1913년 서울에서 34세의 나이에 옥사하였다.   --현지 안내문--

 

수 없이 많은 안내문을 보았지만 익숙치 않은 단어('피체' 등)가 등장하고, '유격전'을 '유격적'으로 오기하는 등 안내문에 문제가 많았다. 선생의 행적을 보니 일제와 한치의 타협 없이 일생을 몸 바쳐 싸우다 돌아가신 분인데 기공비는 왜 그리 엉성한지... 이 분 동상이 함양 상림 안의 역사인물공원에 세워져 있다.

 

 

<안의 광풍루 뒤편의 상무좌우사 접장 하경순 포선불망비(左)와 의병대장 문태서 기공비(右)>

 

 

<상무좌우사 접장 하경순 포선 불망비(商務左右社 接長 河璟詢 褒善 不忘碑>

지정 :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65호

소재지 :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당본리.

안의(安義)를 중심으로 한 상무좌우사의 접장 하경순(河璟詢, 1875~1946)의 공적을 기려 안의 상인들이 1911년에 세운 비석. 상무사(商務社)는 1899년(광무 3)에 설립된 상업 관장 기관이다. 이보다 앞서 1883년(고종 20)에 설립된 혜상공국(惠商工局)이 2년 뒤 상리국(商理局)으로 개칭되면서 등짐장수인 부상(負商)의 단체를 좌단(左團), 봇짐장수인 보상(褓商)의 단체를 우단(右團)으로 불렀다. 상무사는 좌단을 좌사(左社), 우단을 우사(右社)로 고쳐 불렀다. 지역경제사 연구의 자료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현지 안내문--

 

 

<안의 광풍루 앞 금호강(남강)과 오리나무 숲>

 

 

<답사 첫날 저녁을 먹은 거창 '검정소 무한리필'>

고기는 무한리필이 가능하나 밑반찬이 단출하고 쇠고기이기 때문에 고기를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면 질려서 마냥 먹는 것이 불가능하다그래도 무한리필집 치고는 밑반찬이나 고기의 질 모두 괜찮은 편이었다. 쇠고기 외에 장어도 있다.

 

 

 

<답사 첫날밤을 묵은 거창의 호텔 WHO>

삭막해 보이는 고층 시멘트 외관에 비해 방이나 화장실 시설이 깨끗하고 구조도 편리하다. 이 업체에서 뭐라 부르건 분명한 모텔이다. 문제는 나와 짝꿍이 모텔에 익숙치 않아서 방 전체 조명이 가능한 걸 몰랐다는 것이다. '모텔은 의례 컴컴한가 보다' 하고 몹시 힘들어 하며 부분 조명 아래에서 다음 날 답사 자료를 읽고, 몸펴는 운동을 하다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다른 방을 쓴 일행에게 '모텔은 꼭 그렇게 컴컴해야 하느냐'고 푸념을 했더니 그쪽은 직원을 불러서 제대로 밝게 썼다는 것이었다. 우리도 분명히 조명 조절할 만한 장치는 둘이서 열심히 찾았는데, 아놔!!!

호텔(모텔) 직원분들, 우리처럼 러브호텔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조명을 밝게 해주세요! 답답하고 불안해서 아주 힘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