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

함양 개평마을, 솔송주문화관

큰누리 2017. 7. 10. 23:28

<함양 개평마을>

함양의 중심에 위치한 개평마을은 '左안동 右함양'이라 불릴 정도로 많은 유학자를 배출한 영남지역의 대표적인 선비마을로 조선 5현 중 한 분인 일두 정여창 선생의 고향이기도 하다. 하동 정씨와 풍천 노씨, 그리고 초계 정씨 3개의 가문이 오래도록 뿌리를 내리고 살아오면서 마을을 이루고 있으며, 일두 정여창 선생, 옥계 노진 선생 등 역사적 위상이 높은 선생을 배출하였다. 개평마을은 일두고택(중요민속문화재 제186호)을 비롯한 많은 전통가옥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고, 선조들이 풍류를 즐겼던 교수정(문화재자료 제76호), 일두선생의 명상 장소였던 개평리 소나무군락지(도기념물 제254호) 등 조상의 의식주와 생활풍습 등을 알 수 있는 소중한 문화자원이 많이 남아있어 민속자료로써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

개평마을은 두 개울이 하나로 합쳐지는 지점에 마을이 위치해 '끼일 개(介)'자 형태인데서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100년이 넘은 한옥만 60여 채가 있으며 대표적인 한옥으로 일두고택, 풍천노씨대종가, 노참판댁 고가, 하동 정씨 고가, 오담고택 등이 있다. 일두고택은 정여창 선생 타계(1507) 후 한참 뒤인 1507년 후손들에 의해 중건되었다.                          --현지 안내문--

 

 

<함양 개평마을 체험관>

2011년에 처음 들렀을 때는 주택, 방앗간 등만 있었는데 이런 시설들이 당시와 달라진 점 중의 하나이다.

 

 

<함양 개평마을>

 

 

 

<함양 개평마을 일두고택 진입로의 박석과 아름다운 돌담들>

이 골목의 돌담과 골목길에 깔린 박석이 마을에서 가장 아름답다. 2011년에 들렀을 당시에도 마을 끝 우물쪽에 '어디에서 저렇게 많은 돌들이 나오나?' 싶을 정도로 돌덩이들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그 돌들은 마을 담장 어딘가를 새로 쌓거나 보수하는데 쓰였을 것이다. 

 

 

 

 

<함양 개평마을 일두고택 앞 골목>

왼쪽은 일두고택 솟을대문과 문간채, 오른쪽은 솔송주문화관이다.

 

 

<함양 개평마을 솔송주문화관>

솔송주문화관은 일두고택 대문과 마주하고 있다. 일두선생의 13세손인 눌재 정재범 선생이 제사상에 품질이 좋은 술을 올리기 위해 햅쌀, 솔잎, 소나무 순을 재료로 만든 가양주이다. 정여창 선생의 16대 손부인 박흥선은 경남 무형문화재 제35호로 지정되었으며, 2007년 남북정상회담 만찬주로 사용되기도 했다. 시음 및 문화관 관람 모두 무료이다.

일두고택에서 일행들과 헤어져 혼자 개평마을을 돌다가 솔송주문화관에 들렀는데 운영자께서 친절하게 이모저모를 설명해 주셨다. 가양주 빚는 곳에 들르면 기념 삼아 술 1병 정도는 꼭 챙기는데 카메라만 달랑 들고 내린데다 주변에 일행도 없어서(돈이 한푼도 없어서!) 술을 살 수 없었다. 개의치 말고 나중에라도 생각나면 들러달라며 솔송주 한잔을 따라주셔서 (제법 독하다!) 감사한 마음으로 마셨다. 

 

 

<함양 개평마을 솔송주문화관 내부 모습>

전시 겸 가양주 빚기, 시음 등을 하는 곳 같다. 문화관 안쪽으로 큰 한옥건물이 있는데 술을 빚거나 각종 체험을 그곳에서 할 것으로 추측한다.

 

 

 

 

 

 

 

 

 

<함양 개평마을의 이정표들>

 

 

<함양 개평마을 담장의 장치>

이 구멍은 어디에 쓰였을까, 배수?

 

 

<함양 개평마을의 이름 없는 한옥>

현재 거주자가 있는 듯 한데 상당히 오래된 집으로 보인다. 노둣돌로 보이는 대문 앞의 돌과 주변의 돌담들이 아름답긴 한데 당장이라도 보수를 안 하면 안 될 정도로 담장이 불안해 보였다.

 

 

 

 

 

<함양 개평마을 풍천노씨 대종가(비공개)>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43호

소재지 :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

풍천 노씨 대종가는 세조 때의 청백리 송재 노숙동(松齋 盧叔仝, 1403~1463) 선생께서 경남 창원에서 처가(일두 정여창 선생의 고모집 사위)인 이곳에 자리를  잡고 이사를 오면서 지은 집으로 70여년 전에 재목을 대부분 그대로 사용하여 중수하였다.  건물의 배치는 남부지방의 특징인 개방형으로 사대부집 답게 'ㅁ'자형으로 배치가 되었고 곡간은 초가였으나 기와로 보충하였다.

 

선생은 풍천 노씨로서는 처음으로 함양에 들어와 살게된 중시조이며 세종 때 벼슬을 시작한 이후 중국의 주나라에서 원나라에 이르기까지 역사와 기자조선에서 고려시대까지의 우리나라 역사 등 국가의 흥망성쇠와 군사, 교육, 외환 등 윤리와 도덕에 바탕을 둔 사실들을 엮은 '치평요람'을 지어 왕에게 올렸으며 고려사 저술에 참여하였다. 호조예서참판 등 수많은 벼슬을 지내면서도 조금도 민폐를 끼치지 않아 세조 때 청백리로 녹선(祿選)되었고 상호군으로 보하여졌으며 1701년 숙종 때 함양의 도곡서원에 재향되었다.

 

 

 

<함양 개평마을 풍천노씨 대종가와 앞 골목>

 

 

<개평마을에 들를 때마다 눈길을 잡은 이 건물>

사당 같은데 건물 벽을 가로지른 나무가 무척 인상적이다. 고택은 사라진 것 같고 안쪽에 있는 현대식 개량 기와집은 거주자가 있어서 입구에서 발을 돌렸다. 늦여름(9월쯤)에 들르면 이 건물 앞의 분홍빛 상사화 무리가 일두고택 석가산의 상사화와 더불어 아름다움을 뽐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