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

거창 구연서원과 주변의 정려각, 청송당

큰누리 2017. 7. 21. 23:08

<거창 구연서원(龜淵書院)>

구연서원은 요수 신권, 석곡 성팽년, 황고 신수이 세 분의 행의와 학덕을 경모하고 계승하기 위하여 사림들이 세운 서원으로 1540년 신권이 구연재를 완성하였고 1694년 구연서원으로 개칭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사당이 훼철(1868년)되었으나, 강당과 문루인 관수루는 그대로 남아 있다.   --현지 안내글--

 

건물은 작은 강당과 사당, 개량한옥 같은 전사청만 남아있고, 유적비 등의 커다란 비가 마당에 5개나 서 있어서 서원이란 느낌이 들지 않는다. 구연서원의 특이한 점은 정문 용도로 사용되는 관수루와 관수루 활주 기둥이 세워진 바위, 그 바위의 각자 등일 것이다. 서원주변에 있는 4개의 효자, 열부 정려각과 1987년에 이건한 청송당도 서원 못지 않게 눈여겨 볼만 하다. 이렇게 많은 정려각, 정려비가 모여 있는 것을 본 것은 전라북도 군산시 임피면 상갈마을 이후 처음이다.

서원은 기본 골격만 남아 있지만 바로 앞에 거창 관광의 백미인 수승대(거북바위)가 있고, 맑고 주변경관이 빼어난 위천은 최근에 가족단위로 피서를 즐기는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으며, 바로 옆의 수승대축제극장에서는 해마다 국제연극제가 열린다고 한다.

 

 

<거창 구연서원 관수루(龜淵書院 觀水樓)>

지정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22호

소재지 :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 769.

관수루는 요수 신권(樂水 愼權), 석곡 성팽년(石谷 成彭年), 황고 신수이(黃皐 愼守彛) 선생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하여 사림이 세운 구연서원의 문루로 1740년(영조 16)에 건립하였다. 관수(觀水)란 <맹자(孟子)>에 '물을 보는데(觀水) 방법이 있으니, 반드시 그 물의 흐름을 봐야 한다.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다음으로 흐르지 않는다'고 한 말을 인용한 것으로 군자의 학문은 이와 같아야 한다는 뜻으로 이름 지었다. 

누각은 일반적으로 군현 관아 소재지의 경치가 수려한 곳에 세워서 고을의 현감이나 중앙의 관리들이 일정한 날을 택해 인근의 선비들을 불러 시회(詩會)나 연회를 열기도 하고, 평소에는 고을 사람들이 올라 쉬거나 더위를 피하는 장소로 이용하였다. 따라서 누각은 고을을 상징하는 대표적 건물이기 때문에 사찰의 대웅전 앞이나 향교와 서원의 입구에 세워 그 건물의 격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 이 누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계자난간 팔작지붕이고, 커다란 거북이 형상을 한 자연석 위에 세운 활주와 휘어지고 굽어 용트림한 형태의 기둥이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하는 거창지역 누각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

 

 

<거창 구연서원 관수루(龜淵書院 觀水樓) 활주 지지대인 바위와 바위의 각자>

커다란 바위 위에 활주를 세울 생각을 한 것도 대단하고, 규모가 크고 이끼가 카페트처럼 깔린 바위 자체도 볼만 하다. 함양이나 거창의 정자들은 높이가 다른 자연석 위에 기둥 높이를 조절하여 세운 특징을 보이지만 관수루의 활주 지지대인 이 바위를 따라갈 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그 위에 뿌리를 내리고 누각과 같이 나이를 먹어가는 참나무도 누각의 운치를 한껏 높인다. 바위에 '요수신선생장수동(樂水愼先生藏修洞)'이라 새겨져 있다.

 

 

 

<거창 구연서원 관수루(龜淵書院 觀水樓) 앞 모습과 누하, 출입문>

 

 

 

<안쪽에서 본 구연서원 관수루 누하 출입문>

 

 

<안쪽에서 본 거창 구연서원 >

안쪽 누하 기둥은 거의 용트림 수준이고, 짧달막한 모양이 귀엽기조차 하다. 오른쪽의 활주가 바위에 박힌 상태도 제대로 관찰할 수 있다.

 

 

<거창 구연서원(龜淵書院)과 山高水長비, 유적비 등>

구연서원에서 현존하는 유적의 중심이 되는 것은 강당과 전사청, 마당 앞의 비석들, 북쪽의 사당(龜淵祠)이다. 사진상의 동쪽 비는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山高水長비, 석곡 성(팽년)선생 유적비, 황고 신(수이)선생 유적비, 야천 신선생 유적비이다.

 

 

 

<거창 구연서원(龜淵書院) 서쪽의 '거창신씨황산입향조 승훈랑휘우맹택리비'>

 

 

<거창 구연서원 전사청(典祀廳)>

'서기 1694년에 구연서원과 함께 세우고 춘추제향(春秋祭享) 시에 제수를 차리는 곳이다.'라고 누군가 목판에 써서 보에 걸었다.

 

 

<거창 구연서원 강당과 '龜淵書院' 편액>

 

 

 

<거창 구연서원 강당의 현판들>

 

 

<거창 구연서원 강당 옆모습과 마루>

정면 4칸, 측면 2칸의 단아한 건물이지만 측면에서 보면 당당하고 실제보다 훨씬 커보인다. 모나지 않고 자연스럽게 앞마루와 옆마루를 연결한 센스도 돋보인다.

 

 

 

<거창 구연서원 사당 구연사(龜淵祠) 내삼문>

요수 신권 선생의 위패를 안치했다.

 

 

 

<거창 구연서원 사당 구연사(龜淵祠)>

문이 잠겨 있어 까치발을 하고 담 너머로 한 컷...

 

 

<구연서원 사당 구연사(龜淵祠)에서 내려다 본 강당과 전사청(좌)>

 

 

<거창 구연서원 앞 신성열(愼性烈) 효자비(좌), 신성열 妻 강씨 열녀비(우) 정려각>

 

 

 

 

<거창 구연서원 앞 신성진(愼性眞) 효자(좌), 신재주(愼在周) 妻 안동 권씨 열부(우) 정려각>

 

 

<거창 구연서원 앞 신성진(愼性眞) 효자 정려각>

 

 

 

<거창 구연서원 앞 신재주(愼在周) 妻 안동 권씨 열부 정려각>

 

 

 

<거창 청송당(聽松堂)>

위치 :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 구연서원 옆.

청송당(聽松堂)은 요수 신권의 3자인 청송당 신복행(愼復行. 1533~1614)의 호이자 강학지소로 1610년 거창군 북상면 농산리 사라산 아래에 손수 지은 것을 유지관리가 어려워 1987년에 수승대로 이건했다고 한다. 선생은 효와 예를 중시하며 외숙 갈천 임훈에게 사사를 받기도 했다. 경서에 통달하고 성리학을 연구하는 등 학문과 덕망이 높았으나 평생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초야에 묻혀 후학을 양성했다.

 

 

<거창 청송당(聽松堂) 대문 안쪽의 앙증맞은 거북이 모양의 빗장>

 

 

<거창 청송당(聽松堂) 내부>

 

 

 

<거창 청송당(聽松堂) 마당의 청송신선생기적비(聽松愼先生紀蹟碑)>

 

 

<거창 청송당(聽松堂) 옆 효자 신동건(愼東建) 정려비>

내용은 '효자 증통훈대부사헌감찰 신동건지려 고종29년 임진 4월 정려를 명한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