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아일랜드

영국일주33 - 더블린의 크라이스트 처치, 성 스테판 그린공원의 1916년 4월 부활절 무장봉기

큰누리 2017. 11. 15. 23:25

<8/8. 9일차 코스3>

기네스 맥주 양조장(홍보관, 기념품점) - St Patrick's Cathedral(성 패트릭 대성당) -  더블린 벨베데레 호텔에서 점심크라이스트 처치 대성당(성공회 교회) - St 스테판 그린공원 아일랜드 최고 명문 트리니티 대학(켈스의 서, 해리 포터 박물관) - 중식당 好世界에서 저녁 - 더블린 씨티 노스호텔 투숙.

 

 

<크라이스트 처치 교회(Christ Church Cathedral)>

1030년 아일랜드에서 최초로 생긴 성당이었으나 헨리 8세의 강압에 의해 성공회 교회 바뀌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더블린 벨베데레 호텔에서 점심 식사 후 크라이스트 처치 카테드랄(성공회 교회) 외관을 관람했다.

 

교회와 육교로 이어진 맞은편의 전시관 Dublinia에서는 1,100년부터 1,600년까지 100년 단위로 아일랜드 역사를 나누어 특징을 살린 이름을 붙여 전시하고 있었다. 노르만인(바이킹)들이 서서히 물러가고 잉글랜드의 헨리 2세가 점령한 후 헨리 8세에 의해 종교적인 분야까지 점령 당하는 험난한 아일랜드인의 역사로 보였다. 살짝 구경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우리의 목표인 크라이스트 처치 관람 시간이 20분도 안 되었기 때문에 지나쳐야 했다.

크라이스트 처치 교회는 가톨릭 국가인 아일랜드에서 신자가 줄어 경영이 어렵기 때문에 6.5유로의 내부 입장료를 받아 운영 및 수리에 이용한다고 한다. 돈도 좀 보태고 내부 구경을 하고 싶었으나 주어진 시간이 외관만 보기에도 빠듯해서 안쪽 입구만 보고 포기했다. 아일랜드의 교회 건축의 특징적인 외관(고딕양식)은 꽤 눈요기가 되었지만 규모가 작은 교회 내부는 입구에서 얼핏 보아 크게 구경할 거리가 없어 보였다.

 

 교회 마당 벤치의 걸인 같은 이의 와상이 눈에 들어왔고주 건물에 궁륭 지지대가 4개 있었다. 교회 건물 옆에 큰 수조 같기도 하고 관을 안치한 별도의 공간 같은 사각형이 있었는데 특별히 안내문이 없어서 용도를 알 수 없었다.

 

더블린의 교회, 성당을 들르면서 기네스 맥주사를 제외한 역사적인 건물, 인물 안내문에서 우리에게 낯선 아일랜드 문자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영어도 버벅거리는데 아일랜드 문자는 영어와 확연히 어감이나 문자가 달라서 당혹스러웠다. 대부분 옆에 영어를 병기하긴 했지만 안 된 곳도 제법 있었다.

 

 

<더블리니아(Dublinia)의 전시 내용>

전시장 더블리니아 크라이스트 처치 교회와 자그맣고 예쁜 육교로 연결되어 있으며, 1100년부터 1600년대까지 유물을 전시한다.

 

 

 

 

<더블리니아(Dublinia)와 크라이스트 처치 교회(Christ Church Cathedral)를 연결하는 예쁜 통로>

통로 너머 건물이 크라이스트 처치 카테드랄이다.

 

 

<크라이스트 처치 교회(Christ Church Cathedral) 외관>

규모는  작지만 오밀조밀한 외관이 아름답다. 건물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다소 음침하다.

 

 

<크라이스트 처치 교회(Christ Church Cathedral) 입구의 인물과 교회 내부>

다른 곳은 영어와 병기되어 있는데 이곳은 모두 아일랜드어로 적혀 있어 무슨 내용이고, 누구인지 알 수 없다. 교회 내부는 입구만 보아서인지 밀도 있는 다른 성당에 비해 허전한 느낌이 든다.

 

 

 

<용도를 알 수 없는 크라이스트 처치 교회 마당의 사각형 공간>

 

 

<전시관 더블리니아(Dublinia)와 크라이스트 처치 교회(Christ Church Cathedral)>

왼쪽은 더블리니아, 오른쪽(근경)은 크라이스트 처치 교회이다. 더블리니아가 언제 지어졌는지 알 수 없으나 두 건물은 서로 닮았다.

 

 

<크라이스트 처치 교회에서 가장 오밀조밀한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각도>

 

 

<크라이스트 처치 교회 마당 벤치의 걸인(?)상>

 

 

≪세인트 스테판 그린공원(St Stephen's Green)≫

세인트 스테판 그린공원(St Stephen's Green)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 중심지에 있는 더블린을 대표하는 자연공원이다1663년 이전까지는 가축을 방목하던 늪지였으나 1663년 주택지와 방문자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곳으로 분할되었다1877Lord Ardilaun이 이 땅을 강제 수용하였다.

그 후 정원과 폭포, 호수 등을 포함한 조경 사업을 위한 자금을 모금하여 오늘날과 같은 공원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현재 109,265의 공원에는 넓은 잔디밭, 호수, 폭포, 분수, 동상, 벤치, 공연무대 등이 설치되어 있다

호수에는 백조, 비둘기, 청둥오리 등이 살고 있고, 오래된 숲과 넓은 잔디밭 등은 더블린 시민들의 여가와 휴식을 위한 공간으로 사랑받고 있다공원 산책로에 1916425, 부활절 봉기 당시 무장투쟁을 벌인 사람들의 사진과 당시의 긴박하고 영국군의 총부리 앞에 무방비로 당하는 시민들의 모습을 그린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고, 영국으로부터 아일랜드 독립을 위해 싸운 이들의 동상이 있다

 

 

세인트 스테판 그린공원과 1916. 4.24. 부활절 무장봉기

'1916년 4월 24일 부활절 봉기  본부는 중앙우체국이었다고 하는데 공원의 아서 에드워드 기네스卿 동상 맞은편의 Royal College 부근 같다. 아일랜드인 2,000여명은 중앙우체국을 총사령부로 삼고 무장투쟁을 벌였다이들은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며 피의 희생을 통한 민족적 부활 부르짖었으나 1주일 만에 진압되고 말았다 500여명이 죽고 2,500여명이 부상당했으며, 지도부 14명은 처형됐다.

봉기에 참여하지 않았던 시민들은 영국군의 무차별 사격에 희생자가 잇따르자 분노하여 봉기에 참여했다이후 독립에 대한 염원이 전국으로 퍼져 나갔고, 실패한 듯 보였던 부활절 봉기1922년 아일랜드가 독립국가로 거듭나는 원동력 되었다공원 산책로의 사진이나 그림에는 1916. 4.25, first day of the Easter Rising, as part of the Easter Rising of 1916이란 글귀가 많이 등장했다.

 

안내판에 있는 인물 중 여성인 Countess Constance Markievicz(콘스탄스 마르키에빅스 백작부인)가 많이 등장했는데 저항군의 중심인물 추정되며, 잔인했다고 알려진 영국 진압군들에게 상당히 적극적으로 대항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나키스트적인 성향도 가지고 있었던 여성이 아닐까 짐작해 보았다. 그 외에 이 부근을 지나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죽은 이, 적극적으로 투쟁에 가담한 이, 총격전 장소로 이용되거나 날벼락을 맞은 주변의 집에 대한 내용이 있었다. 

 

세인트 스테판(스티븐) 그린공원은 넓고 아름다운 공원으로만 소개되는데 이면에는 우리나라의 3.1운동과 비슷한 '부활절 봉기'가 일어난 비극의 현장이었다. 부활절 봉기는 특별한 계획도 없었고 대중의 지지도 받지 못했다고 소개되는 글이 많으나 분명히 1922년의 독립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나라의 3.1운동과 다른 점이라면 폄하하는 측에서 말하는 전국적인 봉기로 이어지지 못하고 아쉽게 더블린에서, 소수 지도자들의 저항으로 끝난 점이다. 군대가 지휘하는 것이 아닌 이상 민중봉기는 치밀하지 못할 수밖에 없는데 '부활절 봉기'에 대해 아일랜드 외의 나라에서는 많이 폄하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자신을 희생하면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애쓴 사실만으로도 희생자들은 충분히 존경 받을 가치가 있으며, 공원의 여러 안내문들에서 그들을 존경하고 봉기를 기억하려 애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막간을 이용한 아일랜드 小史

켈트족인 아일랜드 사람들은 800여년간 앵글로 색슨족(영국)의 지배 하에서 고통을 겪었다1845년부터 6년 이상 계속된 '감자 기근으로 800만 인구 중 200만명 이상이 죽거나 신대륙을 향해 먹을 것을 찾아 이민선을 타야 했다아직도 '신사의 나라'로 불리는 영국(잉글랜드)인들의 그들에 대한 핍박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독립 후 영국의 도움을 받았으나 2000년대에 들어서 아일랜드는 영국의 국민소득을 앞지르는 선진국으로 거듭나고 있다. 

미국 대통령 43명 중 22명이 영국의 핍박을 피해 신대륙으로 이주한 아일랜드 혈통이다아일랜드 예술의 장르 중, 가장 두드러진 분야가 문학이다노벨문학상 수상자는 시인 예이츠, 셰이머스 히니, 극작가 사무엘 베케트, 조지 버나드 등 4명이며, 그 외에도 오스카 와일드, 션 오케이시 이 있다.

 

켈트족이 기원전 5세기경에 아일랜드로 건너와 아일랜드에서 국가를 처음으로 세운 것이 역사적인 출발점이다. 그 직후 잉글랜드 출신의 사제 성 패트릭이 아일랜드에 기독교를 전파했다아일랜드는 8세기부터 11세기 초에 걸쳐 바이킹족(노르만인)의 침략으로 오랜 기간 시달렸다. 바이킹족의 세력이 약해질 무렵인 1172년 헨리 2세의 잉글랜드군이 침략수도인 더블린이 함락 당하면서 다시 잉글랜드의 식민지가 되었다그러나 켈트족은 끈질기게 저항하여 잉글랜드 세력을 서서히 몰아냈다이 때 일부가 스코틀랜드 고지대로 이주하였다.

 

1534년 헨리 8세가 다시 대대적으로 아일랜드를 침략했다. 이 침략으로 인해 아일랜드는 1937년 정식으로 독립 될 때까지 약 400년 동안 잉글랜드의 식민지 통치를 받았다1172년 헨리 2세의 침략 이후 아일랜드는 약 800년간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위해 싸운 말 그대로 저항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헨리 8세는 앤 볼린(엘리자베스 1세 모후)과 결혼하기 위해 로마 교황과 다툰 후 파문을 당하자 영국 국교회(성공회)를 독립시켰다그 후 잉글랜드 내의 가톨릭을 금지하고 성공회를 강요하기 시작했으며, 이어 국민 대부분이 가톨릭 신도인 아일랜드인에게 성공회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그 뿐 아니라 아일랜드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성공회 신자들(스코틀랜드인 15만명, 잉글랜드인 2만명)을 이주시켰다. 이 지방이 바로 얼스터이다. 

  

이때부터 아일랜드 내의 성공회 교도와 가톨릭 교도간의 싸움이 시작되었고, 이 싸움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1916년 부활절 봉기와 영국과 아일랜드 전쟁을 거쳐 1921년 영국과 아일랜드 간에 조약이 체결되었다. 아일랜드의 32개주 중 북아일랜드 6개 주는 영국령으로 남고, 남부 26개주는 아일랜드 자유국으로 독립했으나 1년 후 아일랜드 내전이 일어났다1949년에 아일랜드는 영국 연방을 탈퇴한 후 아일랜드 공화국으로 완전 독립하였다.

 

 

<세인트 스테판 그린공원(St Stephen's Green)>

공원 보도쪽에는 사람 아름보다 더 큰 영국(여기서는 아일랜드) 플라타너스가, 호수 주변에는 다양한 고목들이 우거져 운치가 있다.

 

 

<세인트 스테판 그린공원(St Stephen's Green)의 James Joyce(제임스 조이스) 동상>

James Joyce(제임스 조이스, 1882-1941) 20세기 소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 중 하나로 불리는 소설 <율리시즈(Ulysses)>의 작가이다.

 

 

<세인트 스테판 그린공원(St Stephen's Green)의 녹지>

호수와 화단이 있는 이쪽은 평화로운 곳(!)이다. 호수 건너 맞은편 쪽은 1916년 부활절 무장봉기 당시에 피로 물들었던 곳이다.

 

 

<세인트 스테판 그린공원(St Stephen's Green)의 유일한 분수>

내가 본 중에서 유일한지, 실제로 유일한 분수인지는 모르겠다. 다 돌아보았다고 생각했는데 개선문 같은 문이 있는 정문 쪽, 영화 촬영지로 유명한 곳이 더 있었다.

 

 

 

<세인트 스테판 그린공원(St Stephen's Green)의 남자와 백조>

 

 

<세인트 스테판 그린공원의 넓은 호수>

구불구불 이어지는 호수가 상당히 넓고 그 주변에 비둘기, 청둥오리, 백조, 갈매기 등이 사이좋게 어울려 산다. 새 뿐 아니라 식물들도 서로 어울려 무성하다. 호수에 작은 홍예교도 하나 있었지만 사진 상태가 나빠서 게재 생략...

 

 

 

 

 

<우리가 입장한 반대편의 세인트 스테판(스티븐) 그린공원의 비둘기떼>

아랍계로 보이는 가족들이 비둘기에게 모이를 주며 사진을 찍고 있다. 이곳부터 로열 칼리지(아서 에드워드 기네스경 동상 앞)까지의 구간에는 부활절 무장봉기, 영국과의 투쟁에 관련된 인물들 동상이나 사진, 그림이 있다.  

 

 

<우리가 입장한 반대편의 세인트 스테판(스티븐) 그린공원의 인물상>

아일랜드어로 쓰여 있어 누구인지 모르겠다.

 

 

<성 스테판 그린공원의 Countess Constance Markievicz(콘스탄스 마르키에빅스 백작부인), 1868~1927>

영국군과의 투쟁에서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는 여성이다. 공원 안내문에 이름이 가장 많이 등장한다. 나이별로 게시된 사진 속의 우아한 백작부인부터 전사, 강인해 보이는 노년 사진 등 역사에 휩쓸린 한 인간의 다양한 변화를 볼 수 있다. 1927년(59세)에 죽은 것으로 보아 부활절 봉기 당시에 체포되지 않았거나 봉기 주동자로 사형 당한 14명에는 포함되지 않았던 것 같다.

 

 

<세인트 스테판 그린공원의 Michael Mallin(1874~1916)>

 

 

<세인트 스테판 그린공원의 Robert Emmet(1778~1803) 동상>

 

 

<세인트 스테판 그린공원의 Sir Arthur Edward Guinness>

 

 

<세인트 스테판 그린공원의 Sir Arthur Edward Guinness 동상과 Royal College>

1916. 4. 25에 이 부근에서 가장 치열한 접전이 있었거나 영국군의 일방적인 검거 과정과 그에 따른 무고한 희생자가 발생한 장소로 보인다. 두 번째 사진의 영국군이 총을 들고 뛰는 그림만으로도 사태의 심각성과 급박함을 느낄 수 있다.

 

 

 

<세인트 스테판 그린공원 Sir Arthur Edward Guinness 동상 맞은편의 Royal College>

 

 

<세인트 스테판 그린공원의 Constable Michael Lahiff>

콘스탄스 백작부인이 쏜 총과 관련되어 죽은 경찰 5년차로 보이는 젊은이이다.

 

 

 

<세인트 스테판 그린공원 밖의 1916. 4. 25 당시와 오늘날의 Superintendent's lodge>

아서 에드워드 기네스경 동상 맞은편(세인트 스테판 그린공원 밖)에 있는 사진 속의 붉은 집에서 1916. 4. 25에 저항군과 영국군 간에 총격전이 벌어졌고, 이 집의 유리가 깨지고 이곳에 살던 James Kearney와 그의 가족들이 봉변을 당한 내용인 듯 하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붉은 집 창에서 밖을 향해 총을 쏘는 아일랜드 저항군으로 보이는 이들이 있다.

영국이나 아일랜드에서는 당연한 일이지만 70년이 넘은, 그것도 당시에 총알받이였을 집이 이렇게 똑같은 모습으로 남아있는 것이 신기하다.

 

 

 

<세인트 스테판 그린공원의 1916. 4. 25. 관련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