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마니아·불가리아·세르비아·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루마니아 - 브란 성(드라큘라 성) 2

큰누리 2019. 10. 5. 01:08

<발칸 7개국 1일 차 일정>

11:30. 부카레스트 국제공항 도착 - 14:20 시나이아의 펠레슈 성 도착, 1시간 30분 정도 투어 - 16:20~17:20 트란실바니아의 브란 성으로 이동 - 1시간 30분 정도 브란 성 투어 - 20:00 시나이아의 식당에서 루마니아  전통식 식사 - 21:00 시나이아의 Mara호텔 투숙.

 

루마니아 브란 성(Castle Bran) 1에서는 브란 성과 관련된 내용들을 짚었다. 아래의 내용은 루마니아라면 차우세스쿠의 독재밖에 모르는 나 자신을 위해 네이버 지식백과(두산백과)의 '루마니아 역사'요약해 본 것이다.

 

♣ 기원 전 1세기 경에 루마니아 지역에 살던 다치아인들이 트란실바니아, 왈라키아, 몰다비아를 통일하고 다치아 왕국을 건설했다.

 1세기 중반에 도나우강을 넘어 진출한 로마제국에게 점령 당한 후 로마의 속국이 되면서 역사에서 사라졌다.

 13세기경 헝가리에 의해 트란실바니아를 점령 당한 후 제1차세계대전 이후까지 헝가리,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았다.

 14세기에 몰다비아와 왈라키아 공국이 수립되었으나 바로 오스만투르크에게 정복 당해 19세기 후반까지 지배 받았다.

1800년대 중반 투르크로부터 독립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러시아의 간섭을 받게 되었다.

 크림전쟁의 결과로 러시아로부터 독립하여 통일을 이루고 1859년 알렉산더 쿠자 왕의 주도로 근대화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877년 러시아-투르크 전쟁 기간 중 오스만투르크로부터 독립하였다.

 1881년 독일 출신의 카롤 1세가 루마니아 세습군주로 추대된 후 1947년 공산당에 의해 군주제가 폐지될 때까지 이어졌다.

제1차세계대전 때 연합국으로 참전했다가 초반에 독-오-헝에 점령 당했으나 연합국의 승리로 트란실바니아와 도브루자 지역을 획득했다.
 1930년대에 독일, 이탈리아와 손 잡고, 1940년대에는 안토네스의 파시스트 정권이 수립되었다.

 1944년 소련의 발칸 진출 후 공산화되었고, 1947년 1월 왕정 폐지, 루마니아 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다.

 1958년 주둔 소련군 철수 후 탈소련화 정책, 대외 독자 외교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1965년 차우세스쿠가 집권, 루마니아 사회주의공화국으로 개명하고 자주적 외교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1966~70년에 국내 공업화 기반을 확충하고 1968년 루마니아 공산당이 권력을 장악했다.

 1974년 차우세스쿠의 1인 지배체제, 1980년부터 족벌독재체제가 이루어졌으며 강압정치, 인권탄압이 이어져 국제적으로 고립되었다.

 1989년 12월 시민중심의 민주혁명이 일어나 차우세스쿠 공산정권이 축출되고 국명이 루마니아로 환원되었다.

 1990년 총선거 실시 후 일리에스쿠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나 1996년까지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상황이 악화되었다.

 1996년, 2000년, 2004년 총선에서 정당과 지도자는 바뀌었으나 크게 상황이 나아지지 않았다. 

 

 

아래의 내용은 현지 가이드 신철민씨로부터 들은 루마니아에 대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루마니아는 동유럽 국가 중 유일하게 라틴어를 사용하는 나라이다.

 차우세스쿠는 공업화 이후 북한을 방문하여 북한의 자립적인 경제체제를 모방했고, 김일성은 3번이나 루마니아를 국빈 방문했다.

 차우세스쿠는 북한의 인민궁전을 모방하여 혁명궁전을 지었으나 본인은 정작 입성하지 못했고, 미국의 가수 마이클 잭슨이 최초로 입성했다. 마이클 잭슨은 혁명궁전에서 '(헝가리의 수도와 착각하여) 부다페스트 시민 여러분!'이라고 외쳤다.

 부카레스트 지진 후 경제 재건에 실패하고 정치적인 불만까지 누적되어 공산체제가 붕괴되고 차우세스쿠는 부인과 함께 총살 당했다.

부카레스트 1달 생활비는 한화로 50만원 정도 이내이고, 월급은 적으나 소비수준은 높다.

 땅값은 부카레스트에 이어 트란실바니아 순으로 높지만 유럽 최저 수준이며, 루마니아 발전의 발목을 잡는 것은 열악한 도로사정이다.

 예전에는 유럽의 대표적인 좀도둑 국가였으나 2007년 이후 소매치기들이 라틴국가로 수출(!)되어 정화되었다.

 2007년 EU 가입 후 사회,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현재 평균 GDP는 1만 유로, 수도인 부카레스트는 그보다 훨씬 높다.

한국은 대우자동차가 처음 진출했고, 한국 기업이 기술을 가르쳐주면 선진 유럽으로 나가버린다.

 심한 인구 유출로 동남아에서 인력을 수입한다.

 상당한 IT 선진국이며 교육제도는 EU 시스템을 적용하며 자격증이나 졸업 후 학력 등 모든 면에서 유럽과 동등한 대우를 받는다.

 손님을 태우는 모든 차량은 4시간 운전하면 운전기사는 무조건 45분을 쉬는 타코미터법 적용을 받는다.

 놋다리(로타리?) 사무실이 있어 외국인이 사업을 하고자 할 때나 자녀가 외국인일 경우 부모 보증 등 사무적인 문제를 해결해 준다.

 

 2007년 EU 가입 루마니아가 가장 많이 투자하고 주력한 부문은 교육이었고, 학생이나 어린이를 위한 시스템이 아주 훌륭하다.

 학제는 4-4-4년제이다.

 최저임금 가정이나 부모가 장애인인 가정은 국가에서 우등생에 해당하는 장학금을 준다.

돈은 나누는 법이 없고 페이는 철저히 더치 페이이다.

 성이나 마약에는 무방비 상태이다.

 

 

  <브란 성(Castle Bran) 3층 복도>

이곳에도 페르디난도 1세 부인이자 성주인 마리 여왕의 사진이 걸려있다. 두 번째 사진은 계단 쪽에 걸린 성모자상 부조화와 세라믹이 주재료인 전등이다.

 

 

 

  <브란 성(Castle Bran) 2층의 방>

차를 마시거나 쉬는 용도의 방인 듯 하다. 브란 성의 가구는 마리 여왕의 취향이 철저히 반영된 최근(!)의 제품일 거란 생각이 든다. 건물도 요새에서 별장 형식으로 상당 부분을 고쳤고...

 

 

  <브란 성(Castle Bran) 2층의 Ferdinand 1세의 방>

왕관이 별도로 진열되어 있고 난로의 타일이 세련된 점을 제외하면 국왕의 방 치곤 상당히 검소하다. 페르디난드 1세와 마리 여왕은 취향도 다르고 사이도 좋지 않았으며 각자 연인들이 있었다. 그런데도 자녀는 6명이나...

 

 

 

 

  <브란 성(Castle Bran) 2층의 Royal Dining Room과 방안의 페르디난드 1세 부부 사진>

페르디난드 1세는 초대 루마니아 왕인 카롤 1세가 자녀가 없었던 덕분에 같은 집안에서 2대 왕으로 추대되었고, 왕비인 마리는 빅토리아 여왕의 손녀 루마니아로 시집 온 것이다. 사진 속의 그녀는 때로는 당당하고 때로는 우아하다. 왕비라는 틀에 매이지 않고 연애도 노골적으로 하고, 특히 왕이 죽은 1927년 이후에는 자기생활도 꽤 누린 것 같다.

 

 

 

  <페르디난드 1세와 마리 여왕의 3녀, Ileana 공주의 동상과 약력>

페르디난드 1세와 마리 여왕 사이에는 6명의 자녀가 있다. 카롤 2세(3대 루마니아 국왕), 엘리사베트(그리스 왕국의 요르요스 2세 왕비), 마리아(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알렉산다르 1세 왕비), 니콜라에, 일레아나(브란 성 후계자, 1909. 1~1991. 1.), 미르체아이다.

카롤 2세는 망나니 수준, 언니 2명은 외국의 왕비로 수출(!), 니콜라에는 평민과의 결혼문제로 왕족지위까지 박탈 당한 반면 Ileana는 국민들로부터 신망이 두터웠다고 한다. 그러서인지 어머니 마리 여왕(왕비)은 그녀가 아꼈던 브란 성을 Ileana 공주에게 물려주었다.

세 번째 사진은 2층 입구 통로에 있던 드레스인데 마리 여왕의 옷인 듯 하다.

 

 

 

 

  <브란 성(Castle Bran) 2층, 테라스>

테라스라기 보다 성 안쪽 4면에 설치된 통로, 혹은 복도로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브란 성(Castle Bran) 2층 테라스에서 내려다 본 1층 마당>

우물이 있는 북동쪽 모서리이다.  

 

 

  <브란 성(Castle Bran)에서 가장 높은 서쪽의 종탑이 있는 건물>

 

 

  <브란 성(Castle Bran) 북쪽면>

다양한 건축 스타일이 융합된 모습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으로 오묘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브란 성(Castle Bran) 2층 북쪽의 대포>

 

 

  <브란 성(Castle Bran) 2층 복도>

 

 

  <브란 성(Castle Bran) 안의 유일한 우물>

왜 꽃을 장식한 것일까? 이렇게 예쁘게 장식한 우물을 보기 쉽지 않을 것이다. 우물 바닥에는 물 대신 관광객들이 던진 지폐가 수북하다.

 

 

 

  <브란 성(Castle Bran) 서쪽면, 출(입)구>

 

 

  <브란 성(Castle Bran) 서쪽면의 터널 그림>

마리 여왕이 원래 있던 구조물을 손을 본 후 엘리베이터를 설치한 곳으로 정원에서 절벽같은 성을 쉽게 오르기 위해서였던 듯 하다.

 

 

  <브란 성(Castle Bran) 북쪽면의 부엌>

 

 

  <브란 성(Castle Bran) 시설 안내도>

 

 

  <저녁을 먹은 시나이아의 식당>

브란 성에서 시나이아까지 갈 때는 1시간 남짓 걸렸으나 올 때는 길이 많이 막혀 시간이 지체되었다. 루마니아의 성장을 막는 것이 도로사정이라더니 루마니아에서 2차선 이상의 도로를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저녁 8시쯤 시나이아의 식당에서 처음으로 식사를 했는데 시큼하지만 순한 김칫국 같은 전통 스프를 발칸반도 여행 중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먹었다. 이후엔 거의 스프는 커녕 촉촉한 음식조차 별로 없었다. 발칸반도 여행 중 가장 불편했던 것이 바로 밋밋하고 야채가 거의 없는 육류 위주의 식사였다.

 

 

  <저녁을 먹은 시나이아의 식당의 곰가죽과 박제한 삵(?)>

이곳에서 곰 가죽을 무려 4개나 보았다.

 

 

 

  <시나이아의 식당의 저녁 메뉴>

콩, 감자 등의 야채와 토마토 소스를 넣어 요리한 스프는 보기엔 밋밋하지만 맛은 김칫국 비슷하고 괜찮았다. 메인 요리는 닭튀김과 생쌀이 씹히는 리조토, 소금과 올리브 오일로 무친 양배추였다. 리조토는 한 입 먹다 만 정도로 식감이 엉망이었고, 닭튀김은 거의 간이 안 되어 먹기가 힘들었다. 그나마 이 식당의 요리는 앞으로 겪을 상황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첫째 날 저녁 숙소인 시나이아의 Mara Hotel>

발칸반도 여행 중 음식은 항상 먹기 힘들었으나 숙소는 모두 양호한 편이었다. 식당에서는 보기 힘든 에어컨도 있고, 방 크기는 모두 넉넉했으며 목욕탕의 온수나 수압도 모두 양호한 편이었다. 호텔 외관은 다음 날(19.7/29) 아침에 촬영한 것이다.

딱 한 곳,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Sv Mihovil호텔은 식사나 시설 등 모든 면에서 최악이었다. 욕조 경사가 심해 주의를 했음에도 미끄러져서 하체가 온통 피멍이 들었고, 귀국 후 일주일 정도가 지난 후에야 정상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