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인천

이천 영월암 마애여래입상, 석조광배 및 연화좌대

큰누리 2020. 10. 6. 11:07

<2015년 여름 답사를 추억하다 10>

 

<이천 영월암(映月庵)>

지정별 : 향토유적 제14호.

소재지 : 경기도 이천시 관고동 438번지.

이천의 진산인 설봉산(雪峰山) 주봉 기슭에 자리 잡은 영월암(映月庵)은 이 고장의 대표적인 유서 깊은 고찰(古刹)이다. 문헌상으로는 조선 영조 36년(1760) 이후에 편찬된 <與地圖書> 이천지와 광무(光武) 3년(1899)에 나온 <이천군읍지>에는 모두 '북악사(北岳寺)' 란 이름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그 이후로 '영월암' 이라 불려오고 있으며 현재는 조계종에 소속되어 있다. 영월암 중건기에 의하면, 지금부터 1,300년 전 신라 제30대 문무왕 때 海東 華嚴宗의 개조인 의상조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이를 뒷받침할 만한 문헌이나 금석문 등 신빙자료가 없어서 그 사실 여부는 확인하기가 어렵다.

 

경내에는 고려 중기 작품으로 추정되는 마애여래입상(보물 제882호)통일신라 말 ~ 고려 초기 작품으로 추정되는 석조광배(石造光背) 및 연화좌대(蓮花座臺), 그리고 석조, 3층석탑 등의 유물. 유적들이 남아 있어서 이 절이 유서 깊은 고찰임을 입증해 주고 있다. 이러한 유적, 유물 등의 조성연대로 미루어 영월암의 창건연대는 대략 통일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기까지로 추정할 수 있다. 다만 조선 후기인 영조 50년(1774)에 이르러서야 영월(映月) 낭규대사(郎奎大師)가 사찰의 면모가 일신하여 큰 불사를 일으켜 중창하였다. 그 뒤 1911년 普恩 스님이 다시 중건하고, 1920년에는 당시 주지인 劉信庵 스님이 극락전을 옮겨 세웠으며, 1937년에는 조언우 스님이 산신각과 누각인 丹霞閣을 중건하였다.

 

지금의 대웅전 건물은 1949년 淸庵 金明七 스님이 이천향교 명륜당 앞에 있었던 퇴락한 풍영루(風詠樓) 목재로 옮겨 짓다가 6.25 동란 발발로 중단된 것을 1953년 11월 당시의 주지인 金海翁 스님이 준공하였다. 현재의 영월암은 대웅전과 부속건물 3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3층석탑, 석조광배 및 팔각연화좌대 등의 유물들은 무너진 채로 방치되어 오다가 1981년 주지 宋正海 스님이 사계의 고증을 받아 수습 복원해 놓은 것이다. 그리고 1989년 8월 14일 소실된 서편 요사채를 1991년 여름에 法淨 姜鐘萊 스님이 전통한옥으로 복원하여 명실공히 전통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절 앞에 있는 두 기둥의 아름드리 은행나무 수령이 약 600 여년을 헤아리는데, 이는 고려 말의 고승 나옹대사가 이 절에 머물 때 꽂아놓은 지팡이가 자란 것이라는 신비한 전설을 가지고 있다.

--현지 안내문--

 

 

<영월암 보호수 은행나무>

지정번호 : 경기-이천-01

소재지 : 이천시 경충대로 2709번길 388(관고동438)

수령 : 640년, 수고 : 37m, 나무둘레 : 5m.

은행나무에 얽힌 사연 : 고려 공민왕 때 나옹대사는 풍수지리에 밝은 고승으로 조선의 수도를 한 무학대사의 스승이라고 한다. 나옹대사가 영월암에 머물던 어느 날, 가지고 다니던 지팡이를 이 은행나무가 서 있는 자리에 꽂았다. 스님들과 신도들은 그 까닭을 알 수 없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며칠 뒤 나옹대사는 절을 떠났고, 지팡이에서 싹이 나와 지금의 은행나무가 되었다.

 

 

<영월암 대웅전>

왼쪽은 요사채, 오른쪽은 아미타전이다.

 

 

 

<영월암 대웅전 앞의 석조(石槽)>

당시엔 이 석조가 유물급이란 것도 모르고 운치 있어서 무조건 촬영했다. 

 

 

<영월암 아미타전과 내부, 옆벽>

 

 

 

 

<영월암 3층석탑>

너무 비루해 보여서 역사적인 유물이란 생각을 안 했는데 이 3층석탑도 석조와 더불어 유물에 포함되었다.

 

 

<영월암 3층석탑에서 내려다 본 영월암>

왼쪽부터 아미타전, 대웅전, 요사채, 가장 오른쪽 위 모서리에 있는 것은 삼성각이다. 삼성각 뒤에 마애여래입상과 석조광배 및 연화좌대가 있다. 

 

 

<영월암 3층석탑 주변에서 목격한 딱따구리>

 

 

<영월암 마애여래입상>

지정  : 보물 제822호.

소재지 : 경기도 이천시 관고동 산64-1.

이 불상은 자연 암석을 다듬어 머리와 두 손만 얇게 부조하였고 옷 주름 등은 선각으로 처리한 높이 9.6m의 입상이다. 둥근 얼굴에 눈, 코, 입을 크고 뚜렷하게 조각하였는데 지그시 감은 눈, 넓적한 코, 두툼한 입술 등은 온화한 인상을 준다. 머리는 지혜를 상징하는 육계가 없는 민머리이며 목에는 번뇌, 업, 고통을 상징하는 三道가 있다.

두 손은 가슴에 모아 모두 엄지와 약지를 맞대고 있는데 오른손은 손바닥을 바깥으로, 왼손은 안쪽으로 향하고 있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우견편단(右肩偏袒) 형식의 은 몸 전체에 유연한 사선으로 흐르고 왼팔을 돌아 내려간 가사 끝단은 지그재그 모양으로 마무리되어 있다. 이러한 옷의 모양과 오른쪽 팔꿈치가 직각으로 표현된 것은 고려시대 조각상의 특징이다.

 

이 마애상은 지정 당시 마애여래입상으로 되었으나 머리가 민머리인 점과 옷의 형식으로 보아 나한상이나 조사상으로 확인되었다. 나한(羅漢)은 아라한(阿羅漢)의 줄임말로 소승불교의 수행자 중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聖者 뜻하고 조사(祖師)는 한 종파를 세우고 중심이 되는 가르침을 준 승려뜻한다. 이 불상은 유래가 드문 마애조사상으로 양식과 영월암에 전하는 석불대좌와 광배, 석탑재 등을 볼 때 조성연대는 고려 전기추정된다.

--현지 안내문--

 

 

<영월암 마애여래입상>

 

 

 

 

 

<마애여래입상 쪽에서 내려다 본 영월암>

 

 

<영월암 삼성각과 뒤편 바깥 바위 감실의 신선상>

영월암 삼성각은 특이하게 전각 안에 삼성을 모시지 않고 전각 뒤의 바위에 감실을 파고 그 안에 신선 한 분을 봉안한 후 안에서 유리를 통해 보게 되었는데 양식도 워낙 독특한데다 신선의 인상도 부드럽고 사실적이었다.

 

 

 

 

 

<영월암 삼성각 밖 백일홍 꽃길>

전면의 건물은 삼성각이고 이편으로 나오면 석조광배 및 연화좌대를 볼 수 있다.

주변의 백일홍이 무척 아름다웠다.

 

 

<영월암 석조광배 및 연화좌대>

지정 : 향토유적 제3호.

소재지 : 이천시 관고동 438.

영월암 창건 당시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진 석조광배(石造光背)와 연화좌대(蓮花座臺)로서 그 중심에 안치했던 불상은 없어진 채 도괴되어 있던 것을 대웅전 앞에 복원해 놓았다. 중앙의 불상은 1980년에 새로 조성해 안치한 것이다.

 

화강암 1석으로 조성한 광배 끝이 뾰족한 주형거신광(舟形擧身光)의 형태로 다듬어져 있다. 표면에는 2조로 된 융기선으로 두광과 신광을 나타냈고, 두광 복판에 원을 중심으로 단엽8판의 연잎을 둘렀으며 주위에는 화염문과 당초문이 있다. 두광의 상부와 신광 좌우로 삼존의 화불좌상이 있고 복판에 홈이 나있어 불상 뒤에 부착했던 흔적이 있다. 전체 높이 156cm, 폭 118cm, 두께 45cm이다.

 

연화좌대는 정방형의 지대석 위에 8각의 하대석과 역시 8각의 안상(眼象), 앙련좌(仰蓮座), 복련좌(覆蓮座)의 4부분을 1석씩으로 조성, 연결해 놓았다. 섬세하고 유려한 조각 솜씨는 뛰어나며 특히 불신을 떠받고 있는 앙련좌에 새겨진 연잎들은 방금 피어오르는 듯 생동감이 넘친다. 전체 높이는 107cm이다. 전체적으로 조화와 섬세하고 세련된 조각 솜씨로 미루어 불교미술 전성기였던 통일신라 ~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현지 안내문--

 

 

 

 

 

 

 

 

<워낙 값진 유적이 많다 보니 유적으로 착각한 그냥 통바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