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21.01. 서귀포 이중섭미술관

큰누리 2021. 2. 26. 23:11

 

 

<1/21일, 제주에서 세째날 코스>

길을 잘못 들러 들리게 된 위미 동백나무 군락 - 제주동백수목원 - 서귀포 매일 올레시장 - 우연히 얻어 걸린 이중섭 문화의 거리와 이중섭미술관 - 이중섭 거주지 - 서귀포 용머리 해안 입구 - 모슬포항과 하모해수욕장이었다.

 

이중섭미술관이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이중섭 거리를 따라 걸어내려 오다가 이 골목에 다다랐다. 벽에 이중섭 그림을 벽화처럼 표현한 것만 보다가 위를 보니 '이중섭미술관 가는 길'이란 안내가 붙어 있었다. 정문은 이곳보다 한 골목 아래에 있다는 것은 미술관을 돌아보고 나오는 길에 알았다.

 

이중섭미술관은 14:00부터 연다고 해서 20분을 기다렸다. 개장 시간 14:00는 코로나 19로 인한 특별한 시간인 듯 했지만 확인은 못했다. 다른 곳도 그렇지만 제주도는 박물관이나 관광지에 가려면 반드시 사전에 입장이 가능한지를 확인해야 한다. 식물원조차 실내는 수시로 문을 닫는 경우가 있고, 성산일출봉, 용머리 해안 등 바닷가는 바람이 불면 입장금지이다그리고 이중섭미술관은 어른 1,500원-청소년 및 군인 800원-어린이 400원의 입장료 있다.

개관을 기다리는 동안 마당, 이중섭공원, 미술관 옆에 있는 정방동 동사무소 계단의 이중섭 그림 등을 보았다. 미술관에 소장된 작품은 기증 받은 몇 점 뿐이라 솔직히 빈약했다. 하지만 부인 이남덕씨가 기증했을 편지나 개인적인 문서 등은 상당히 귀하고 작품 못지 않게 볼만 했다. 

 

1시간 정도 미술관을 보고 옥상에서 조망을 한 후 이중섭 거주지 터에 들렀다가 산방산 용머리해안으로 갔다.

 

 

<이중섭미술관 후문으로 들어가는 골목과 벽의 그림들>

골목 양쪽 벽에 조건이 되는대로 표현한 이중섭의 그림도 좋지만 옛 모습을 간직한 집들이 있는 것도 좋았다.

 

 

 

<이중섭미술관 후문으로 들어가는 골목 안에서 본 입구>

 

 

<이중섭미술관 후문으로 들어가는 골목의 그림들>

이중섭이 일본에 있는 아들들에게 쓴 편지나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두 아들을 그리워하며 그린 그림이었을 것이다.

 

 

 

 

 

<이중섭미술관 후문으로 들어가는 골목 풍경>

 

 

<이중섭미술관과 이중섭의 시 '소의 말'>

미술관 건물은 2층 건물 1동인데 아담하고, 옥상으로 올라가면 서귀포 바다를 조망하기 좋다. 마당에는 이중섭 기념탑이라 할 수 있는 조형물이 있는데 왼쪽은 소로 추정되는 조각이, 그 옆에는 이중섭 초상과 그의 글이 들어간 비가 있다. 이중섭 초상 부조 밑에는 1916~1956이란 이중섭의 생몰 년과 이중섭이 쓴 시 '소의 말'새겨져 있다. 이 시는 이중섭 거주지(방)에도 있다.

 

<소의 말>  

李仲燮

높고 뚜렷하고 참된 숨결

나려 나려 이제 여기에 고웁게 나려

두북두북 쌓이고 철철 넘치소서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

아름답도다 여기에 맑게 두 눈 열고

가슴 환히 헤치다.

 

 

 

 

<이중섭미술관 아래에 있는 이중섭 공원>

'삶의 흔적'의 기준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생활과 밀접한 제주도의 사투리를 볼 수 있다. 공원 아랫쪽에 이중섭 거주지가 있다.

 

 

 

<이중섭미술관 마당의 임시 건물에 그려진 이중섭의 그림>

 

 

<이중섭미술관 미술관 및 관람 안내>

 

 

-≪화가 이중섭≫-

--현지 안내문을 요약 및 정리, 부제는 임의로 붙임--

 

<화가 이중섭의 작품 세계>

이중섭이 화가로서 작품 활동을 한 기간은 일본 문화학원 재학시절인 1938년 자유미술가협회(창작미술가협회)에 작품을 발표한 이후부터 1956년 사망할 때까지 약 20여 년간으로 볼 수 있다. 현재 남아있는 이중섭의 작품은 1951년~1956년 사이에 그린 작품들이다1951년 이전의 작품은 1950년 원산에서 피난을 나올 때 함께 피난하지 못한 어머니의 손에 맡기고 나왔기 때문이다. 일본 유학 시절 자유미술가협회(창작미술가협회) 등에 출품한 작품 등은 거의 도판으로만 전해온다.

그 외에 1940년~1943년까지 일본 유학 시절 문화학원 후배이자 연인이었던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 이중섭과 1945년 원산에서 결혼)에게 보낸 엽서화가 88점, 1952년 부인과 두 아들을 일본으로 보낸 이후 가족에게 보낸 절절한 그리움의 편지가 다수 남아있고, 그 중에서 편지에 그림이 그려진 편지화가 42점이다담배갑 속 은지에 그린 은지화는 현재까지 142점 남아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중섭의 엽서화>

엽서화는 이중섭이 1940년~1943년 연인 야마모도 마사코에게 글자 없이 오로지 그림만 그려 보낸 것으로 현재 88점이 전해온다. 엽서화는 1940년대 이중섭 작품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상황에서 당시의 이중섭 작품 세계를 가늠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이중섭의 부인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

이남덕이라는 이름은 이중섭이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에게 지어준 한국식 이름이다. 두 사람의 인연은 1930년대 말 일본 문화학원에서 시작되어 1945년의 극적인 재회와 결혼으로 이어졌지만 7년간의 짧은 결혼생활을 끝으로 이중섭은 병사하고 이남덕은 두 아들과 함께 일본에서 살고 있다.

1952년 그녀의 부친 사망 후 상속문제, 생활고 등으로 두 아들(이태현, 이태성)과 함께 일본에 들렀다가 눌러앉게 되었다. 1953년 시인 구상의 도움으로 선원증으로 일본을 방문한 이중섭은 일주일간의 상륙 허가 기간 동안 가족을 만났다. 하지만 이중섭이 생활고, 병마 등으로 1956년 사망함으로써 그 만남이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이중섭의 그리움, 편지가 되고 그림이 되어>

화가로서 이중섭의 탁월함과 그림에 대한 그의 의지력은 수많은 동료화가들에 의해 잘 알려졌다. 이중섭은 캔버스가 없으면 종이, 장판, 합판, 담배갑 속 은지에 그렸고, 물감이  없으면 페인트나 에나멜로 그림을 그렸다. 일정한 주거지가 없어서 부산, 통영, 대구, 서울, 진주 등을 전전하면서도 끊임없이 그림을 그려 우리에게 주옥같은 그림을 남겼다.

그림이 생애 전부였던 이중섭에게 가족은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이었다이중섭이 부인과 두 아들을 일본으로 보내고 한국에 홀로 남아 가족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 마음이 여실히 드러난다.

 

이번 이중섭미술관 상설전시실은 이중섭의 유화, 엽서화, 편지화, 이중섭 관련 자료 등 미술관 신소장품을 중심으로 전시를 구성하였다. 이중섭의 '아이들과 복숭아' 이중섭이 둘째 아들에게 보낸 으로서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이중섭은 이와 유사한 편지화를 첫째 아들에게도 보냈는데 두 아들이 서로 다투지 않고 사이좋게 볼 수 있도록 배려한 아빠 이중섭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엽서화 '앉아있는 여자' 1941년 이중섭이 당시 연인이었던 야마모토 마사코에게 보낸 으로 마사코가 발가락을 다쳤을 때 그녀를 지극히 보살핀 이중섭의 기억을 그린 것이다.   중략... 

 

 

<이중섭미술관 기념품 코너의 '황소'와 이중섭 자화상>

'황소'는 원본이 아니라 기념품점에 있는 판매용 카피본이고, 자화상은 미술관에 걸린 진품이다.

 

 

 

<이중섭의 그림 연보와 관련 문서, 작품들>

왼쪽의 1장으로 된 판넬은 이중섭의 그림 연보이고, 오른쪽은 이중섭과 가족 관련 각종 증명서, 편지들이다. 두 번째 사진은 이중섭 그림 연보를 확대한 것.

 

 

 

<이중섭이 부인에게 보낸 편지들과 이중섭 관련 기사>

이중섭은 부인 야마모토 마사코를 이남덕이란 이름으로 불렀다. 부인을 남덕군, 발가락을 아스파라가스 등으로 표현하고 편지에 작은 그림들을 그려 넣는 등 곳곳에서 이중섭의 다정다감한 성격이 보이고, 사무치게 가족을 그리워하는 내용이 절절해서 보는 내가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유학시절 친구와 찍은 사진과 피난 시절 주변 사람의 초상화>

이 글을 쓸 때까지도 유학시절에 친구와 찍은 사진으로 알았는데 제목을 보려고 확대를 하니 '25×30cm, 종이에 유채, 1940년경'이라는 제목의 유화였다, 헐~~~ 이전(바로 위의 자화상과 아래의 초상화도 포함)까지는 이중섭 화가는 유명세에 비해 사생 능력은 좀 떨어진다고 생각했었다.

 

 

 

<이중섭의 수채화 '앉아있는 여자'와 '닭과 게'>

윗 사진 왼쪽은 이중섭 화가의 그림을 논할 때 독립된 한 장르처럼 다루는 엽서화이다. 오른쪽은 작품 이름을 놓쳤고, 두 번째 사진은 유채화 '닭과 게'이다. '닭과 게'는 시인 초정 김상옥의 시집 출판기념회 방명록에 그려놓은 것이라고 한다.

이중섭 화가를 논할 때 자주 등장하는 내용은 강렬한 표정의 소들, 종이 살 돈이 없어 담배갑 속지에 그렸다는 은지화 등이 있다.

 

 

 

<이중섭 일가와 관련된 각종 증명서들>

사진 맨 오른쪽 끝의 서류는 시인 김광균이 일본에 있는 이중섭의 큰 처형에게 보낸 이중섭 사망 전보이다.

 

 

<이중섭이 큰아들에게 보낸 편지화와 이중섭 사망 전보>

♣ 이중섭의 사망 전보 내용: 6일 이중섭 사망, 오늘 화장,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

 발신일: 1956년 9월 11일

 발신인: 김광균(시인)

 수신인: 야마모토 후사코(부인 야마모토 마사코의 큰 언니)

 발신: 일본전신전화공사

 

 

 

<이중섭의 은지화>

은지화는 담배갑 속 은지에 날카로운 송곳과 같은 것으로 홈이 생기도록 드로잉을 한 다음 선을 중심으로 은지 위에 물감 등을 칠한 후 마르기 전에 닦아내면 선에 색이 입혀져서 완성되는 것이다. 첫 번째 은지화는 '복숭아 밭에서 노는 가족', 두 번째 그림은 '가족'이다은지화에 자주 등장하는 가족, 게, 물고기, 어린이 등의 소재는 이중섭이 가족과 함께 피란 이후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 서귀포와 관련이 깊다. 이 은지화는 서귀포시 비오토피아 주민회에서 기증한 것이다.

--현지 그림 안내문--

 

 

 

<이중섭미술관의 '황소인상'> 2008년 유종욱 作

이 작품은 이중섭의 <황소> 그림을 새롭게 재해석하여 입체화한 것으로 한국인의 역동적이고도 강인한 정신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