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21.01. 이중섭미술관 3층 전망대, 이중섭 거주지

큰누리 2021. 3. 1. 10:38

 

 

 

<이중섭미술관 3층 전망대에서의 전망>

이중섭미술관에서 기획전까지 모두 보고 3층 전망대로 올라갔다. 후문으로 미술관에 들어갈 때부터 과거의 모습이 남아있는 주변의 집들과 주변경관이 좋았는데 미술관 전망대에서는 주변은 물론 정면의 서귀포 앞 바다까지 두루 볼 수 있었다. 지도로 대조를 해보니 그동안 관광하러 제주에 들렀을 때 프로그램으로 묻어 들린 여러 곳들이 근처에 있었다. 정방폭포, 천지연폭포, 외돌개처럼 유명한 관광지는 물론 당시에 석부작테마공원으로 불린 석부작박물관까지...

 

이중섭박물관에서 서귀포항에 이르는 부두쪽 풍경은 월명공원에서 내려다 보는 군산항 같기도 하고, 유달산에서 조망한 (바다가 멀기는 하지만) 목포항 같기도 했다. 분위기로만 따지자면 별영창을 비롯해 담담정, 정무총감 별장 등이 즐비하게 들어섰던 마포 같기도 했다.

 

 

-≪이중섭 거주지≫-

미술관 내부를 둘러본 후 아래의 이중섭 공원은 패스하고 거주지를 둘러보았다. 세 곳 모두 낮은 언덕을 따라 미술관-공원-거주지 형태로 거의 붙어있다. 이중섭은 현재에도 할머니가 거주한다는 초가집 귀퉁이의 방 한 칸에서 1년간 살았다는데 그곳만 공개했다. 집 주인은 미술관에 있던 4명의 남자 초상화 중 한복을 입은 단아한 모습의 송태주였고, 현재 거주자는 그분의 부인이라고 한다. 피난 와서 오갈 곳 없는 그에게 당시 반장이었던 송태주가 작은 방 한 칸을 내준 것이라고 했다.

겨우 사람 한 명이 통과할 수 있는 좁은 곳에 작은 가마솥 2가 걸려 있고, 곰팡이 피고 푸석하며 남자는커녕 성인 여자 1명도 드러눕기 어려운 없는 쪽방에서 이중섭은 아내, 아들 둘과 함께 살았다고 한다. 방은 중앙 벽에 이중섭 사진이 영정사진처럼 놓여있고 특이하게 그 아래에 수납공간이 있는 구조였다. 집 마루 벽에도 벌겋게 녹이 슨 이중섭 부조 걸려 있었다.

 

 

-≪현지의 이중섭 거주지 안내문≫-

여기는 화가 이중섭과 아내 이남덕(李南德: 일본명 야마모토 마사코), 장남 태현, 차남 태성과 함께 1951년 1월부터 그 해 12월까지 살면서 작품활동을 하였던 곳입니다방 : 4.7㎡(1.4평), 부엌 6.39㎡(1.9평)

 

불운한 시대의 천재화가로 일컬어지는 대향 이중섭 화가 가족이 피난을 와서 거주하였던 이곳은, 이 마을 반장 송태주와 김순복 부부가 방을 내주어 생활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이중섭 가족은, 1.4평 정도의 작은방에서 서로의 숨소리를 느끼며 찬 없이 밥을 먹고, 웃으면서 살 수 있었던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초상화 그리기를 좋아하지 않았던 화가는 이곳에서 이웃주민과 집주인을 위해 마당에 쌓아놓은 땔감 위에 작은 사진을 올려놓고 초상화를 그리는 등 작품 활동을 하며 1년 여를 이곳에서 생활하다 부산으로 거처를 옮긴 후, 여러 도시를 전전하며 작품활동에 몰두하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술로 달래다 1956년 9월 서울적십자병원에서 타계하였다.

 

 

<이중섭미술관 3층 전망대>

순서대로 후문쪽, 동북쪽(중앙 쯤에 섶섬이 살짝 보인다!), 북쪽이다. 세 번째 사진의 흰 의자 같은 물건은 사진을 찍으라고 놓은 의자 같긴 한데, 정확한 용도가 무언지 궁금...

 

 

 

 

<이중섭미술관 3층 전망대에서 본 남쪽과 안내도>

 

 

 

<이중섭미술관 3층 전망대에서 본 바다쪽>

남쪽의 문섬에서부터 서쪽으로 차례로 둘러본 모습이다. 윗 사진은 파노라마, 두 번째부터는 섶섬 직후부터 이중섭 거주지, 서귀포 관광극장까지의 모습이다.

 

 

 

 

 

<이중섭 거주지와 서귀포관광극장>

이중섭 거주지는 이중섭미술관 남서쪽 바로 아래(첫번째 사진 중앙의 초가)에 있고, 두 번째 사진은 서쪽에 있는 서귀포관광극장이다. 현재의 이중섭미술관은 바로 거주지 때문에 위치 선정이 되었을 것이다. 계단식으로 된 서귀포관광극장은 생김새가 독특해서 지도에서 일부로 찾아보았다. 나와 동생은 극장 오른편의 골목으로 해서 후문으로 미술관에 들어왔다.

 

 

 

<이중섭 거주지 외관>

첫번째 사진 왼쪽에 아담한 크기의 이중섭공원이 있다. 공원에 들르지 않고 미술관에서 내려다 보고 거주지로 직행했는데 주변에 우람한 후박나무, 푸조나무, 담팔수, 통달목 등이 많다.

 

 

<이중섭 거주지>

맨 윗 사진의 마루 중앙에 두 번째 사진의 녹이 슨 이중섭 초상 부조가 걸려있다. 이중섭 거주지는 주황색 안내문이 붙은 초가 건물 오른쪽의 부엌이 딸린 단칸 방이다.

 

 

 

 

 

<이중섭 거주지 부엌의 솥단지>

6.25 전쟁 같은 비상상황이 아니면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은 손바닥만한 공간인데 솥만 크다! 방 못지 않게 부엌도 좁고 길어서 두 사람이 동시에 지나칠 수 없다.

 

 

<이중섭 거주지의 방>

이런 방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정말 좁다! 피난온 후 이곳에서 이중섭은 아내, 아들 둘과 함께 1년 정도 살았다고 한다. 그에게는 이곳에서의 짧은 생활이 마지막으로 누린 가장, 혹은 인간으로서의 호사였을 것 같다. 없어도 함께 할 수 있었으니까. 부인 야마모토 마사코(이남덕)은 이곳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돌아오지 못했고, 구상 시인이 구해준 선원증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일주일 정도 가족을 만난 것이 마지막이었다. 

벽 2면에 미술관 마당의 기념탑에 새겨져 있는 '소의 말'이란 이중섭의 시가 적혀있다. 이중섭의 시를 다른 분이 써서 붙인 것이다.

 

소의 말

이중섭

높고 뚜렷하고

참된 숨결

나려나려 이제

여기에 고웁게

나려 두북 두북

쌓이고 철철

넘치소서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 아름답도다.

여기에 말게 두분 열고

가슴 환히 헤치다

 

 

 

<이중섭 거리에서 본 이중섭 거주지>

첫 번째 사진 중앙 뒤쪽에 이중섭미술관이, 오른쪽 아래에 이중섭공원이 뚜렷이 보인다. 집 앞의 둥근 조형물은 이중섭 거리 이름 기념비글은 구상 시인이, 조각(!)은 이영학이란 분이 만들고 썼다.

 

이중섭 거리 이름 기념비

                 具 常

구상 시인이 지은 기념비의 글은

겨레의 참변으로 이곳에 피난하여

이 고장 풍물들을 화폭에 담아서

이 나라 현대미술의 명작들로 남겼네

 

그 옛집 이 거리와 저 바다 저 하늘을

님의 꿈 님의 얼이 낙원으로 삼아서

그 그림 보는 이마다 서귀포를 기리네

1997년 9월 6일

조각 李 榮 鶴

 

 

 

<이중섭미술관 입구>

미술관 입구(정문)는 이중섭거주지 바로 위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