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21.01. 제주 성읍 마을의 객사, 근민헌, 정의향교

큰누리 2021. 4. 12. 23:25

 

 

‘자연으로’에서 쌈밥으로 점심을 먹고 바로 앞에 있는 성읍 민속 마을에 들렀다. 이전에 제주에 올 때마다 들렀던 곳이라 건너 뛰려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래도...' 하는 심정으로 들렀는데 의외로 제대로 보았다. 전에는 그저 보았다면 이번에는 그 동안 10여년 정도 답사를 하면서 '유적을 보는 법'을 알고 본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그 때문에 전에는 지나쳤던 별방진 같은 요새를 꼼꼼히 둘러보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덕분에 원래 딸의 계획에 있던 고흐의 정원과 광치기 해변은 시간이 모자라 포기했다.

 

♣ 성읍 마을은 남문(정문)으로 들어가 고평오 고택, 한봉일 고택, 고창환 고택, 객주집 등 민속가옥과 일반 가옥들, 정의현 객사, 근민헌, 정의향교 같은 관청, 혹은 관의 성격을 지닌 건물들을 둘러보고 나왔다. 

♣ 정의향교는 육지의 외삼문과 달리 수평 높이의 3칸의 문이고, 내삼문은 육지 구조랑 같았다. 담 너머로 육지의 서원이나 향교에서는 본 기억이 없는 신도와 입구에 있는 독특한 석비(?), 동·서재, 내삼문과 대성전 일부를 보았다. 정의향교 측문은 성읍 마을 서문과 연결되어 있었다.

 과거 관아 터인 근민헌 주변의 느티나무와 팽나무 군락이 볼 만 했다. 근민헌 뒤에는 청덕비, 불망비가 2기 있고, 자리는 몇 번 옮겼지만 관청 안에 무속신앙의 산물인 관청할망(안할망)이 자리잡고 있는 점이 독특했다. 근민헌 앞에는 정의현의 최고 관청답게 마방이 별도로 있었다. 북담을 둘러보고 다시 정의향교 앞으로 돌아나와 서문으로 나왔다.

 

 

<정의현 객사>

정의현 객사를 문밖, 정면, 측면에서 본 모습이다. 정의현 객사임금에게 지방관이 한 달에 2번씩 배례를 올리거나 중앙관리가 내려왔을 때 머무는 숙소로서의 기능을 하는 곳이었다. 객사 건물은 이처럼 영빈관의 기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경로잔치나 연회를 베푸는 곳으로도 사용되었다.

객사 건물은 전국적으로 형태가 비슷하여 일반적으로 정청(政廳) 3칸을 두고 좌우에 동서 익사(翼舍, 익헌 翼軒)를 나란히 두었으며, 익사의 지붕은 정청보다 한 단 낮게 만들었다. 양쪽의 익사는 날렵한 팔작지붕이고, 중앙의 정청은 맞배지붕이어서 단아하면서도 아름답다. 전반적인 구조가 전주의 객사를 압축한 모양 같고, 조선시대에 주로 유배지였던 제주도의 입지를 생각하면 상당한 규모이다. 다른 곳과 달리 별도의 이름(현판)이 없다.

 

 

<정의현의 공식 관청 역할을 한 근민헌>

근민헌 주변(앞과 옆)의 오래된 느티나무와 팽나무가 웅장해서 좀 떨어진 곳에서 촬영했는데 사진이 별로이다.

 

 

<근민헌과 출입문(!)>

근민헌(국가민속문화재 제188호)은 정의 현감이 사무를 보던 청사로 현재의 군청과 같은 역할을 하는 건물이다. 처음 정의현의 치소는 성산면 고성리에 있었으나 왜구의 침입이 잦아 조선 세종 5년(1423)에 지금의 위치로 옮기고 석성을 쌓았다. 이 고을은 1914년 정의현과 대정군이 폐지되어 남제주군에 합병될 때까지 정의현의 중심이었다. 이 건물을 옛 건물을 헐고 조선시대의 건물을 고증하여 2014년에 복원한 것이다.   --현지 안내문--

 

제주도의 관청 출입문들은 내륙과 좀 다르다. 이곳도 그런데 솟을대문도 아니고 그렇다고 평범한 문도 아니어서 뭐라 통칭하기가 그렇다. 그런 예로는 일반적인 외삼문 형식이 아닌 정의향교의 외삼문이 그랬다. 근민헌은 터는 상당히 넓지만 정의현의 공식 관청이었음에도 남아있는 건물은 의외로 조촐하다. 두 번째 사진은 앞에서 본 모습, 세 번째 사진은 뒤에서 본 모습이다.

 

 

<근민헌 뒷마당에 있는 청덕비와 불망비>

송덕비, 청덕비, 불망비 등은 백성들이 진심에서 우러나와 세운 것도 있지만 주변 인물들이 아첨용으로 세운 것도 상당하다. 먼 훗날 이런 진실이 드러날 것을 알았다면 남사스러워서 송덕비, 공덕비, 불방비라는 이름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비의 내용들이 청덕비, 불망비를 남길만한 내용인지는 알아서 판단하면 될 것 같다.

왼쪽은 군수 채수강 청덕비로 '5년 동안 참한 정치를 펴서 호적을 보관하는 창고를 짓고 향사를 다시 고쳐 모든 백성이 봄을 만난 듯 했다'는 내용이다. 오른쪽은 정의군수 강우진 불망비로 '변란을 대비하여 군수물자를 구입할 자본을 마련하였고, 호적을 정리할 종이를 비축하였으며 천막을 만들어 백성들에게 사용하도록 하였다'는 내용이다.

 

 

<근민헌 뒤뜰의 관청 할망(안할망)>

관청 할망은 정의 고을의 대표적인 무속신앙의 기도처로 고을의 관청 안에 있다 하여 '관청 할망' 혹은 '안할망'으로 불리고 있다. 예로부터 현의 관청인 일관헌 구내 서쪽의 크고 오래된 팽나무를 신목으로 하여 기왓장 위에 비녀, 구슬 등을 놓고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후에 돌로 제단과 울타리를 쌓았다. 

1971년에 성읍리 사무소를 새로 지으면서 가깝게 닿게 되어 지금의 위치로 옮겨 설치하였으며, 6.6m의 나지막한 시멘트 슬레이트 건물 안에 시멘트 제단을 만들고, 감실을 만들어 '현해수호신지위'라는 위패를 모셔 주민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곳으로 이용해 왔었다. 1991년 지금의 건물로 다시 고쳐 지었으며, 위패를 '안할망신위'로 바꾸어 모셨는데 1996년 건물을 보수하면서 고증을 거쳐 제단 위에 감실을 마련 기왓장, 비녀, 옥구슬 등을 봉안하게 되었다.

 

 

<제주 성읍리 느티나무 및 팽나무군>

지정 : 천연 기념물 제 161호(지정일: 1964. 1. 31.).

느티나무와 팽나무는 느릅나무과에 속하며 낙엽이 지는 큰 키 나무이다. 느티나무는 제주어로 '굴무기낭'이라고 하며 목재가 단단하고 아름다워서 건축재와 가구재로 많이 쓰였고, 팽나무는 제주어로 '폭낭'이라 한다. 제주 성읍리 느티나무 및 팽나무군의 느티나무는 현재 키가 30m, 가슴 높이의 줄기 둘레는 5m에 이르는데, 나무 나이는 약 1,000년 정도로 보인다. 팽나무의 키는 24m~32m, 가슴 높이의 줄기 둘레는 2.4m~4.5m에 이르며, 나무의 나이는 약 600년 정도로 보인다. 

 

 

<근민헌 앞의 마방>

관청(근민헌)에서 사용하던 말을 묶어두거나 관리하던 곳이다.

 

 

<정의현 북쪽 성곽>

정의현 북쪽 성곽에 문이 있다는 내용은 없는 것으로 보아 현재의 통로는 통행을 위해 만든 것일 것이다. 북벽 너머로 보이는 나무들은 근민헌 앞(성읍리)의 느티나무 및 팽나무군이다.

 

 

<정의향교>

지정: 제주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제 5호(지정일: 1971. 8. 26.).

이 향교는 태종 5년(1408) 홍로현(서흥동)에 처음 세워졌다가 태종 8년(1420)에 성산읍 고성리로 옮겨졌다. 세종 5년(1423)에 현 성읍리인 진사리 서성 밖에 건립되었다가 헌종 15년(1849)에 현 위치로 옮겨졌으며, 1967년에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부분의 향교 건물이 남쪽을 향하는 것과 달리 이 향교는 동쪽을 향하고 있으며, 대성전과 학문 공간인 명륜당이 좌우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이 정의향교는 현재 전패(殿牌)가 나란히 보관되어 있는데, 원래 전패는 지방 각 고을의 객사 안에 모신 '전(殿)'이라는 글자가 쓰여진 나무패이며, 이는 '대전(大殿)' 곧 임금을 상징하는 위패였다.

 

<정의향교 외삼문>

3칸이긴 하지만 내륙지방의 외삼문과는 문의 형식이 좀 다르다. 문 틈으로라도 들여다보려 했지만 거의 틈이 없어서 옆의 담 너머로 겨우 보았다.

 

 

<담 너머로 본 정의향교 내부>

첫 번째 사진에서는 대성전과 내삼문, 동재(!)이다. 가장 앞에 보이는 것은 송덕비나 공덕비의 머리부분(비수)이고, 두 번째 사진은 대성전을 확대한 것이다. 정의향교는 동향이고, 대성전과 명륜당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고 했으니 사진 상에서 대성전 왼쪽에 명륜당이 있을 것이다. 서문 앞에 있는 후문쪽에서 본 바로는 대성전 약간 앞에 명륜당이 있는 듯 했다. 일반적으로는 향교의 향학 공간인 명륜당은 앞(남쪽)에 위치하고, 성현의 위패를 모시는 대성전은 그 뒤(북쪽)에 위치한다.

 

 

<정의향교 앞에 위치한 예절관(오른쪽 건물)>

 

 

<제주 성읍 마을 서문 앞에서 본 정의향교>

서문 바로 앞에 정의향교 후문이 있다. 중앙 건물은 대성전, 오른쪽 건물은 대성전 옆에 있다는 명륜당으로 추측된다. 이렇게 밖에서 철저히 가려져, 그것도 사방에서 내부가 제대로 안 보이는 향교도 드물 것이다!

 

 

<제주 성읍 마을 서문>

윗 사진은 성읍 안, 정의향교 후문 앞에서 본 모습이고, 두 번째 사진은 밖에서 본 모습이다. 

 

 

<제주 성읍 마을 서문 앞의 돌하르방>

정의골 돌하르방(서문) : 제주특별자치도 민속문화재 제2-26-29호(지정일: 1971. 8. 26.).

정의골 돌하르방(서문)은 정의현 성 서문 입구에 세워져 있으며, 높이는 120~152cm 정도로 각기 다르다. 돌하르방은 1970년대에 붙여진 이름으로, 본래는 우석목, 무석목, 벅수머리 등으로 불렸다. 이 석상은 서문 앞 좌우에 각각 2기씩 세워져 있다. 주민들의 안전과 건강을 지켜주고, 주술적, 종교적 의미가 있으며 도읍지의 경계를 정확히 알려주는 기능을 한다. 육지의 장승과 같은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돌하르방 크기--

♣ 제2-26호 : 높이 120cm, 너비 47cm, 폭 43.5cm(왼손 위, 오른손 아래)

 제2-27호 : 높이 134cm, 너비 45cm, 폭 38cm(왼손 위, 오른손 아래)

 제2-28호 : 높이 135cm, 너비 49.5cm, 폭 44.5cm(왼손 위, 오른손 아래)

 제2-29호 : 높이 151.5cm, 너비 51.5cm, 폭 32.5cm(왼손 위, 오른손 아래)

 

 

<제주 성읍 마을 남쪽 성벽>

서문에서 남문으로 가면서 본 성벽이다.

 

 

<제주 성읍 마을 입구 주차장의 상가들>

 커피숍의 이름이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