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21.07. 다크 투어리즘(알뜨르비행장, 예비검속 섯알오름 유적지)

큰누리 2021. 9. 24. 20:53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

'다크 투어리즘'이란 전쟁이나 테러, 인종 말살, 재난처럼 비극적인 역사 현장을 직접 찾아가 보고 듣고 느끼는 여행이다. 제주 지역의 다크 투어리즘 장소로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군사 기지화를 위한 군사시설과 제주 4.3사건의 잔혹한 현장을 들 수 있다. 특히 대정읍 알뜨르비행장일대는 제주의 다크 투어리즘의 성지로, 역사 교훈의 장이라고 할 수 있다. 

다크 투어리즘의 세계적인 장소로는 제2차세계대전 당시 약 400만 명이 학살당했던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꼽을 수 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는 생체실험실, 고문실, 가스실, 처형대, 화장터와 함께 희생자들의 머리카락과 낡은 신발, 옷가지 등을 담은 거대한 유리관이 전시되어 있다. 전시물과 나치의 잔학상을 기록한 영화 관람 등을 통하여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고 성찰하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현지 안내문-

 

 

<알뜨르비행장>

'알뜨르비행장'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아래쪽의 너른 벌판에 제주도민 등을 동원하여 건설한 군용 비행장이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이 비행장을 전초 기지로 삼아 약 700km 떨어진 중국의 난징을 폭격하기 위해 오무라 해군항공대의 많은 전투기를 알뜨르에서 출격시켰다. 그러나 1938년 11월 일본군이 상하이를 점령하자 오무라 해군항공대는 중국 본토로 옮겨졌고, 알뜨르는 연습 비행장으로 남았다. '알뜨르비행장'은 '마을 아래에 있는 너른 벌판'의 뜻을 갖고 있는 상모리의 알뜨르에 조성되어서 붙은 이름이다.   -현지 안내문-

 

현장의 사진이 작아서 중요한 부분의 글씨를 다시 집어넣고 비행기 격납고들을 또렷하게 표현했다. 빨간 글씨 1번은 알뜨르비행장 일제 지하벙커, 2번은 셋알오름의 일제 동굴진지, 3번은 셋알오름 일제 고사포진지, 4번은 송악산해안 일제 동굴진지, 윗부분의 노란 *는 비행기 격납고들이다.

현장 답사를 할 때 사전지식이 없었던 데다 안내문과 휴대폰으로 유적지를 찾았음에도 상당 부분을 놓쳤다. 날씨가 너무 더운데다 사람이 전혀 없으니 풀밭이나 산을 돌아다니는 것이 많이 부담스럽기도 했다. 그런 이유에 더해 대부분이 평지라 유적을 금방 찾을 줄 알았는데 부지가 워낙 넓어서 셋알오름은 접근조차 못했다.

 

 

 

<알뜨르비행장 다크 투어리즘 코스>

알뜨르비행장 다크 투어리즘 코스에 올레길 10코스도 포함되어 있다.

 

 

<알뜨르비행장 중심지>

알뜨르비행장 유적은 평지이지만 워낙 넓어서 어느 방향부터 갈 것인지 이곳에서 가닥을 정리하고 도는 것이 좋다. 주차장 앞의 모정인데 이곳을 중심으로 산방산 방향(북쪽)에는 비행기 격납고들이 19개(지도상에는17개)가 있고, 동쪽(사진 오른쪽)에는 섯알오름(예비검속 양민 학살 터=일제 탄약고 터)과 셋알오름(일제 고사포 진지와 동굴 진지)이, 서쪽에는 일제 지하벙커가, 모정 이편(남쪽)에는 알뜨르비행장 활주로와 관제탑이 있다.

 

 

<예비검속 섯알오름 유적지 표석>

비석 뒤에 비행기 격납고를 대표하는 격납고가 바로 뒤로 보인다. 멀지 않지만 날이 너무 더워서 격납고나 섯알오름 모두 차로 이동했다. 

 

 

<예비검속 섯알오름 유적지로 가는 길의 제주올레길 10코스 안내문>

 

 

<알뜨르비행장 관제탑>

1940년대 초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군사적인 목적으로 제주도에 비행장 두 군데를 설치했다. 그중 하나는 현재의 제주공항인 '정뜨르비행장'이며, 다른 한곳은 서귀포시 대정읍 모슬포의 '알뜨르(알드르)비행장'이다. 

알뜨르비행장은 일본 해군에서 구축한 제주도 항공기지로 1926년부터 계획하고 1930년대 중반까지 20만평의 비행장을 건설하는 중에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당시 국민당 정부의 수도인 난징 대포격의 발전기지로 활용되었다. 이후 알뜨르비행장은 상하이의 해양폭격 지점이 되었다. 오무라부대가 주둔하면서 비행장의 면적은 40만평으로 확대되었고, 태평양전쟁이 종전될 때까지 비행장 관련 면적은 80만평에 이르렀다. 활주로 규모는 남북방향 길이 1,400m, 폭 70m, 유도로는 3,500m, 2,500m이다.   -현지 안내문-

PS : JTBC에서 방영된 '세계 다크투어' 10회 '군함도 투어'에서 역사 가이드(!) 박광일씨는 아래 사진의 건물이 관제탑이 아닌 급수대로 밝혀졌다고 했다(22.8/12. 확인).

 

우리는 비행장활주로와 관제탑, 일제 지하벙커를 보기 위해 남쪽으로 먼저 갔다. 이곳에서 지하벙커는 결국 못 찾고, 관제탑 위에 올라가 사방을 둘러 보았는데 시계가 탁 트여 전망이 아주 좋았다. 관제탑으로 향할 때 올레길 간세 표지가 있는 아주 작은 언덕이 있었는데 그곳이 일제 지하벙커였던 것 같다. 

윗사진은 가파도(남쪽)를 배경으로, 아래 사진은 산방산(북쪽)을 배경으로 본 것이다. 계단으로 올라갈 수 있는데 계단이 가파르고 허름하며, 관제탑 바닥은 뚫린 곳도 있어서 위험하다.

 

 

 

<알뜨르비행장 관제탑 위와 활주로>

 

 

 

<알뜨르비행장 관제탑에서 본 동쪽(섯알오름, 송악산)과 북쪽(산방산)>

 

 

 

<주차장에서 본 알뜨르비행장 비행기 격납고>

윗사진 왼쪽에 보이는 가장 큰 격납고 안에만 비행기가 들어있는 듯하다. 오른쪽과 뒤쪽으로 드문드문 격납고들이 있지만 다른 격납고는 둘러보는 것을 포기했다. 두번째 사진은 가장 앞(!)에 있는 일제의 비행기 뼈대가 들어있는 격납고이다. 철로 된 뼈대(아무리 1인용이라도 너무 허술하다!)만 남았는데 관광객들이 비행기 전체에 리본을 묶어놓았다. 

 

 

 

-≪남제주 비행기 격납고(국가등록문화재 제39호)≫-

이 시설물은 태평양전쟁 당시에 일본군이 제주도민을 강제동원하여 만든 군용 비행기 격납고이다. 모슬포 바닷가의 자갈과 모래를 철근, 시멘트와 혼합해서 만들었으며 규모는 폭 20m, 높이 4m, 길이 10.5m이다. 일제는 1943년에 이러한 격납고 20기를 만들었는데 현재 19기가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이중 10기는 국가등록문화재로 관리하고 있다.

이 시설물은 태평양전쟁 당시에 일젝가 제주도를 출격 기지로 활용하였다는 역사적 사실과 더불어 제주도민을 강제노역에 동원한 실태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군사시설 유적이다.   -현지 안내문-

 

 

<알뜨르비행장 비행기 격납고들>

'현위치'란 표시가 있는 격납고가 바로 관광객들이 들르는 대표적인 곳이다.

 

 

<알뜨르비행장 비행기 격납고>

이렇게 허술한 비행기로 그 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가미가제(자살) 공격까지 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이다.

 

 

 

 

 

 

<관광객들이 남긴 알뜨르비행장 격납고 안의 글들>

 

 

-≪한국전쟁 당시 '예비검속'에 의한 섯알오름 양민 학살터≫-

이곳은 일제 때 일본군이 제주도민을 강제동원하여 구축한 도내 최대의 탄약고였으며, 해방 이후 미군에 의해서 폭파된 곳이다. 1948~1949년 1만 5천명~3만명(미군 정보자료 추정치, 제주 의회 접수 2000년 1월 현재 약 1만 5천명) 외 양민이 군경토벌대에 의해서 학살된 '제주사건(통칭 4.3사건 : Red Hunt)'이 진정 국면에 접어들 무렵,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치안국의 불법적 '예비검속(Preventive Detention)' 광풍이 몰아쳐 무고한 제주도민들이 경찰에 의하여 강제 검속을 당하였다. 예비검속자들 중 약 1천명(추정 모슬포 252명, 서귀포 240~250명, 성산포 6명, 제주 500~600명)이 넘는 제주인들은 당시 계엄군(육군본부 정보국 CIC-방첩대와 해병대 사령부 정보과)에 의해서 아무런 법적 절차 없이 한밤중에 무참히 총살, 이름 모를 산야에 암매장되거나 깊은 바다에 수장되었다. 현재까지 이곳만이 당시의 비참했던 상황을 보여줄 수 있는 제주도내의 유일한 학살터이다.

 

1950년 8월 20일(음력 7월 7일) 모슬포경찰서에 예비검속된 357명 중 252명(극비문서에 의함)을 새벽 2시경과 5시경 2차에 걸쳐 밤중에 총살(해병대 모슬포 주둔군 3대대), 돌무더기와 함께 암매장하였다. 그러나 만행은 당일 새벽 유족들에 의해 발각되고, 그 시신 인도를 시도하였으나 당시 계엄군경이 무력으로 저지하였고, 이곳을 7년 동안 출입금지 구역으로 만들어 버렸다. 

1956년 3월 29일 새벽 한림지역 유족들이 61위를 수습하여 한림읍 명월리 개꼬리오름(狗尾岳)에 안장하였다(현재 42위만 남음). 1956년 5월 18일 백조일손 유가족의 끈질긴  탄원으로 당국의 허가를 받아 149위를 수습하여 그중 132위를 상모리 지경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池, 조상이 다른 132명이 죽어 뼈가 엉키어 하나 되었다)에 안장하였다(5.16쿠데타 당시 23위 강제 이장, 현재 109위 남아 있음).

 

1962년 9월경 이곳에서 철근을 채취하던 인부들에 의해서 유해 2위가 발견되어 윗동산에 이장하였다(현재 그 위치를 추적중). 발굴 총계 212위, 약 90위가 아직도 이곳에 매장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 

현재 재발굴을 국방부의 허가를 받고 제주도의 후원으로 이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유족들의 가슴에 '50년의 한'으로 응어리진 이곳을 탈바꿈하여 천부적인 인권과 인간의 존엄성을 깨우치는 역사박물관으로의 전환을 기대해 본다. 2000년 11월 20일 유해 재발굴 착수에 즈음하여, 제주특별자치도, 백조일손 유족회, 예비검속에 의한 희생자...(훼손)   -현지 안내문-

 

 

<섯알오름 예비검속 희생자 추모비와 명예회복 진혼비>

추모비 뒤 섯알오름 정상에 분지 형태의 백조일손 영령 희생터가 있고 사방에 목도를 설치하여 돌아볼 수 있게 하였다.

 

 

<섯알오름 예비검속 희생자 추모정과 목도>

 

 

<한국전쟁 당시 '예비검속'에 의한 섯알오름 양민 학살터 안내문>

2000년 11월에 세운 것이므로 21년이 지난 지금은 내용과 상황이 많이 달라졌으리라 추측된다.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池), 백조일손 영령 희생터>

*백조일손(百祖一孫) : 조상이 다른 132명이 죽어 뼈가 엉키어 하나 되었다. 이념이란 미명하에, 전쟁이 발생하면 혹시라도 적군의 편이 될 수 있다는 판단하에 군경에 의해 불법으로 자행된 양민학살... 소설이나 드라마에서만 보았던 끔찍한 현장을 보았다.

이후에 들른 4.3기념관에서도 이에 못지 않은 잔혹한 양민학살의 증거들을 보았는데 정말 끔찍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아름다운 섬 제주도에 너무 가슴 아픈 역사가 있는데 그 사실이 오랜 기간 동안 묻혀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섯알오름 백조일손 영령 터를 지나는 제주올레길 10코스 안내 간세>

 

 

<섯알오름에서 본 산방산(북쪽)과 가파도(남쪽)>

섯알오름에서 동쪽으로 더 나아갔어야 셋알오름이 나오고 그곳에 일제 동굴진지와 고사포진지가 있었는데... 너무 지치고 인적도 없는 곳을 헤짚고 다니자니 내키지 않아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다음에 다시 들러 이번에 놓친 것들을 사진이 아니라 실물을 꼭 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