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21.07. 대정현성 터, 추사 유배지

큰누리 2021. 9. 26. 15:43

≪추사 유배지(사적 제487호)≫

위치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 1661-1.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는 시,서,화 분야에서 독창적이며 뛰어난 업적을 남긴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학자이자 예술가이다. 헌종 6년(1840) 55세 되던 해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제주도로 유배되어 헌종 14년(1848)까지 약 9년간 이곳에서 머물렀다. 유배 초기에는 포교 송계순의 집에 머물렀다가 몇 년 뒤 이곳 강도순의 집으로 옮겨 왔다. 이곳에 살면서 제주 지방 유생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쳤으며 제주 지역의 학문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차를 매우 좋아한 김정희는 다도의 대가인 초의선사와 평생 우정을 나누었으며 제주 지역에 차 문화를 도입한 선구자이기도 하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김정희는 추사체를 완성하고 생애 최고의 명작으로 꼽히는 세한도(국보 제180호)를 비롯하여 많은 서화를 남겼다.

 

이곳은 집터만 남아 경작지로 이용되다가 1984년에 강도순의 증손의 고증에 따라 복원되었다. 2010년에 세워진 추사관에는 김정희와 관련한 역사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현지 안내문-

 

 

<추사기념관 앞의 벽에 그려진 지도>

추사 유배지와 추사 기념관은 대정현성 터(정사각형의 점선) 안에 있다. 추사 유배지 지척에 추사의 처음 유배지였던 송계순 집터, 동계 정온 유허비 등이 있다. 

 

 

<추사 유배지외 추사기념관 밖에 있는 대정현성 돌담>

오른쪽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길을 건너면 이 돌담이 보이고 안으로 들어가면 추사 유배지와 기념관이 있다.

 

 

<추사 기념관 관람 안내>

관람시간, 휴관일, 정시해설 등이 안내되어 있고, 유배지와 기념관 모두 관람료는 따로 받지 않는다.

 

 

<추사 유배지 진입로의 추사 김정희 동상>

 

 

<추사 유배지 진입로의 추사 김정희 초상화와 수선화 목탄 탁본>

왼쪽은 추사의 제자인 소치 허련이 1847년 스승인 추사를 보러 제주에 왔을 때 그린 추사 초상화(완당선생 海天一笠像)이다. 소치는 추사의 서울집에 머물며 그림과 글씨를 직접 배웠던 수제자로 초의선사가 소개했고, 그는 세 차례 이곳을 방문했다.

오른쪽은 추사 김정희의 수선화부 탁본으로 그는 수선화를 아끼고 사랑하여 여러 편의 시를 남겼다.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섬 곳곳에 수선화가 피어 있어서 기쁘나 소와  말의 먹이로 삼는 것이 애석하다'는 내용이 있다.

 

 

<추사 유배지 진입로의 추사의 영원한 벗 초의선사와 세한도>

1843년 봄, 일지암의 초의선사가 아내를 잃은 추사를 위로하기 위해 건너왔고, 그들은 반년을 한 지붕에서 보냈다. 추사는 동갑인 초의선사와 신분을 초월하여 가장 가깝게 지냈고, 초의선사는 제주도를 세 차례나 방문하였으며 매해 햇차를 보내주었다. 일로향실(一爐香室)은 추사가 초의선사에게 일지암에 써준 현판으로 '화로 하나가 있는 다실'이란 뜻이다. 추사 현판 중 명품으로 꼽히는데, 제주 시절 작품이다.

 

오른쪽의 세한도(歲寒圖, 국보 제180호)는 추사 나이 59세인 1844년, 제주도 유배 5년차에 그린 것이다. 추사는 생애 최고 명작으로 꼽히는 세한도를 제자인 이상적에게 그려 주었다. 제자인 역관 우선 이상적은 스승 추사가 귀양살이를 하는 동안 연경에서 구해온 귀중한 책을 정성으로 보내주었다. 추사는 고마운 마음의 표시로 세한도를 그려준 것이다.

 

 

<추사의 필체들>

윗 사진 疑問堂 현판은 추사가 대정향교에 써준 현판이고, 아래 사진 恩光衍世 편액은 의녀 김만덕의 선행을 듣고 감명을 받아 후손인 김종주에게 써준 편액이다.

 

 

<추사 유배지 배치도>

왼쪽의 건물은 추사 기념관, 오른쪽의 전통초가는 송계순의 집에 이어 두 번째 머물렀던 강도순의 집이다. 추사 유배지는 집터만 남아 경작지로 이용되던 것을 1984년에 강도순의 증손의 고증에 따라 복원되었다. 밖거리, 안거리, 모거리의 세거리집이며 그 외에 쉐막(소외양간)과 돗통시(화장실)가 있다. 일반적으로 대문이 없는 제주 전통 민가와 달리 부잣집에는 대문이 있었고, 쉐막까지 있다.

 

 

<추사 유배지의 대문>

 

 

<대문에서 본 추사 유배지>

왼쪽 앞은 밖거리, 안쪽 중앙은 안거리, 오른쪽은 모거리이다. 이 집은 부잣집이어서인지 돌문화공원에서 본 세거리집과 배치나 명칭이 다르고 규모도 훨씬 크다. 돌문화공원에서 본 세거리집은 대문이 없고 정낭이 있었으며 밖거리와 안거리, 1칸짜리 불치막(창고) 뿐이었다. 이곳은 (자식이 사는) 밖거리가 4칸, 부모가 사는 안거리가 3칸으로 규모가 바뀌었고, 별채인 모거리도 2칸이며, 외양간인 쉐막이 따로 있다.

 

 

<짚눌(장독대)에서 본 추사 유배지>

왼쪽은 안거리, 중앙은 모거리, 오른쪽은 밖거리이다. 대문이 있는 쉐막은 모거리 오른쪽에 있는데 밖거리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중앙의 모거리는 별채라고 되어있는데 사랑방 용도였는지 추사와 초의선사가 차를 마시는 소상이 있다.

 

 

<대문쪽에서 본 추사 유배지 밖거리>

가장 앞은 추사가 아이들을 가르친 방, 중간은 대청, 오른쪽은 창고(!), 가장 오른쪽 끝은 부엌의 4칸 구조이다. 당시 기억이 정확하지 않아 사진으로 종합 판단을 했는데 맞는지 확실하지 않다.

 

 

<추사 유배지 밖거리>

밖거리는 김정희가 마을 청년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쳤던 곳이다. 김정희에게는 문하생이 많아 '추사의 문하에는 3천의 선비가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는데 제주 유배 시절에도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추사 유배지 안거리>

왼쪽은 고팡인 듯하고, 오른쪽의 방에는 友鶴山人書室(우학산인서실) 현판과 물레가 있다. 고팡은 음식 재료와 살림살이를 보관하는 제주 특유의 창고로서, 가장이 쓰는 큰 구들(안방) 뒤에 두었다. 그래서 밖거리에 있는 자식들에게 안거리를 내주는 것을 '고팡물림을 한다'고 했다. 이 고팡이 안거리에 있는지 밖거리에 있는지 가장 헷갈렸는데 현지 안내문에 따라 안거리에 있다고 판단했다.

 

 

 

 

<추사 유배지 눌과 장독대, 안거리>

가장 왼쪽의 '눌'은 탈곡하기 전의 농작물을 묶어 쌓아 두거나 탈곡하고 난 짚을 쌓아 놓은 것을 말한다. 안거리 끝에 놓인 고인돌 같은 받침대는 식수로 이용할 물을 길어나를 때 사용한 옹기(물허벅)를 올려놓는 '물팡'이다.

 

 

<추사 유배지 모거리>

모거리는 별채로 김정희가 기거하던 곳이다. 집 울타리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위리안치 형을 받은 김정희는 이곳에서 학문과 에술을 심화시켰다. 그의 추사체는 벼루 10개를 구멍 내고 붓 천 자루를 닳아 없어지게 할 정도로 고독한 정진 속에서 완성되었다. 

모거리에는 방이 두 개 있고, 한쪽 방에는 초의선사와 추사가 차를 마시는 장면이 재현되어 있다. 다른 방은 반은 대청처럼 마루가 깔려 있고 뒤주가 놓여있다.

 

 

 

<추사 유배지 돗통시>

제주의 가정마다 하나씩 있던 돗통시는 돼지를 기르는 우리와 화장실을 합쳐놓은 공간이다. 돼지를 돗통시에 키워 인분을 처리하고, 그곳에서 나온 퇴비를 다시 밭에 뿌리는 것은 제주만의 지혜로운 농법이다. 돌로 만든 돼지가 귀엽다!

 

 

<추사 유배지 쉐막과 대문>

소를 기르는 외양간을 쉐막이라고 하며 대문 옆에 두었다. 대문이 없는 제주 전통 민가와 달리 이집처럼 부잣집에는 대문이 있었다.

 

 

<추사 유배지 앞의 '겸손한 민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