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21.07. 국립제주박물관1(구석기~탐라시대)

큰누리 2021. 10. 4. 13:50

--국립제주박물관 관람 시간 및 정기 휴관일--

*전시실 관람 / 평일 - 19:00~18:00 / 토,일,공휴일 : 09:00~19:00 

(3월~10월 토요일은 21:00까지 관람, 관람시간 종료 1시간전 입장)

*정기휴관일 /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날, 추석

*야외공간 개방 / 06:00~21:00

*입장료 무료

 

--코로나 19로 인한 부분 개관--

*인터넷 사전 예약제 : 30분 간격으로 50명, 개별(4인 이하) 관람만 가능

*입장 시간 : 오전 10시 ~ 오후 5시 30분

*예약 인원 미달 시 현장접수 후 입장 가능.

 

다른 국립이나 도립박물관도 위 기준을 적용하면 무리가 없다. 사전 예약을 하지 않고 무작정 가면 입장을 못할 가능성이 높고, 들어가더라도 땡볕에서 자리가 날 때까지 대기해야 한다. 나도 예약 시간이나 인원 제한에 걸려 여러 차례 관람이 미루어지거나 입구에서 20~30분 정도 대기해야 했다.

 

오래 전(2010년?)에 들렀던 제주국립박물관에 비해 소장품 내용도 많이 달라지거나 보강이 되어 볼거리가 많아졌다. 서울이나 여타 대형 국립박물관보다 훨씬 다양하고 모양도 상당히 온전한 석기시대, 청동기시대의 토기들이 많은 것은 놀라웠다. 최근에도 수시로 고대나 고려시대 등의 유물들이 공사 중에 우연히 발굴된다고 하니 본토(!)에서 기대하기 힘든 유물들을 제주에서 만날 수도 있을 것 같다.

 

 

<국립제주박물관 외관 및 상설 전시실 배치도>

 

 

 

<국립제주박물관 천장의 스테인드글라스>

제주도 지도에 다른 내용이 추가되었다.

 

 

<국립제주박물관 석기시대관>

제주는 180만년 전부터 10만년 전까지 여러 차례에 걸친 화산활동으로 만들어졌다. 약 4만년 전에는 제주도와 한반도, 중국, 일본 큐수지역이 육지로 연결되어 있어 사람과 동물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었다. 제주시 애월읍 빌레못동굴과 서귀포시 서귀동 생수궤 유적의 지질학적, 고고학적 자료는 당시의 왕래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한반도에서 제주도로 이동하여 살았던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주로 동굴이나 바위그늘에 살면서 사냥과 채집을 하였다. 이들은 각종 뗀석기와 정교하게 만든 돌날, 좀돌날 등을 제작하여 생활도구로 사용하였다. 

 

 

<국립제주박물관 빙하기(섬 이전)의 생수궤유적>

서귀포시 서귀동에 위치한 생수궤는 제주에서 발견된 최초의 구석기 생활유적이다. 생수궤의 '궤'는 바위그늘을 뜻하는 제주어이다. 당시 사람들은 바위그늘에 거주하며 주위의 돌로 석기를 만들어 사냥, 채집, 어로활동을 하였다. 바위그늘 내부의 퇴적층에서 격지, 돌날과 돌날몸돌, 좀돌날과 좀돌날몸돌, 긁개 등 후석기시대의 다양한 석기를 발견했다.

 

 

<신석기시대의 시작, 고산리식 토기와 한동리 점줄무늬토기>

약 1만년 전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문화가 제주에서 확인되었다.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 서귀포시 강정동 등지에서 후기구석기시대 석기인 돌날몸돌과 함께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토기, 눌러떼기 기술로 만들어진 화살촉 등이 출토되었다.

나무를 가공하기 위한 도끼와 열매 껍질을 벗기고 가루를 내는 갈돌과 갈판, 간석기를 만드는 숫돌 등도 발견하였다. 이는 후기구석기문화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양상으로 한국 신석기문화의 시작을 알려주는 중요한 내용들이다. 

 

 

 

<신석기시대 고산리 출토 돌창과 토기> 

 

 

<신석기시대 유물들(강정동, 오등동, 한남리, 삼양동 삼화지구, 성읍리 출토)>

뗀석기, 돌화살촉, 토기 파편, 갈판과 갈돌, 토기 등이다.

 

 

<신석기시대 빗살무늬 토기와 조개껍질, 물고기와 동물 뼈>

윗사진은 고산리 동굴에서 발굴된 빗살무늬 토기(왼쪽), 북촌리에서 발굴된 점줄무늬 토기편(오른쪽)이다. 아래 사진은 서귀포시 하모리에서 발굴된 조개껍질과 물고기, 동물 뼈이다.

 

 

 

<한반도 중남부지역 청동기시대 토기 변천>

 

 

<청동기시대의 골아가리 구멍무늬 토기와 골아가리 토기>

첫번째 사진의 왼쪽 윗단은 상모리 출토 골아가리 구멍무늬 토기, 오른쪽 아랫단은 삼양동 출토 골아가리 토기이다. 두번째 사진은 서귀포 대포동 출토 간돌검, 상모리 출토 돌화살촉, 가락바퀴, 그물추, 돌끌과 돌도끼이다.

 

 

 

<서귀포시 상모리 출토품, 청동기시대 조개껍질 팔찌>

 

 

<초기 철기시대의 삼양동 삼화지구 출토 독널(甕棺)>

 

 

<청동기시대 가락바퀴, 반달돌칼과 사용 모습>

윗 사진은 가락바퀴, 아래 사진은 삼양동 삼화지구 출토 반달돌칼이다. 가락바퀴의 용도는 옷감을 짜기 위한 실을 꼬는 도구이다.

 

 

 

<초기 철기시대의 오목돌, 공이와 갈돌, 갈판>

서귀포시 화순리 출토. 

 

 

<청동기, 철기시대의 항아리와 바리>

윗단과 중앙의 바리는 제주시 삼양동 출토, 아랫단은 초기 철기시대의 서귀포 화순리와 삼양동 출토 항아리이다. 

 

 

<삼양동 출토 청동기시대의 돌끌과 돌도끼, 돌화살촉>

 

 

<삼양동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생활모습 미니어처>

 

 

<초기 철기시대의 돌칼과 장신구들>

서귀포 화순리와 예래동, 제주시 외도동과 삼양동, 종달리 등에서 출토된 옥가락지, 고리모양 귀걸이, 옥구슬, 곱은옥, 대롱옥 등이다.

 

 

<대외교류의 흔적들>

기원 전후 한반도 남부지역은 마한 54국, 진한 12국, 변한 12국 등 수많은 작은 나라들이 있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제주는 중국과 왜 등 주변 지역과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제주시 건입동 산지항에서 출토된 오수전, 화천, 대천오십, 화포, 본뜬 거울, 칼 꾸미개 등과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 유적에서 출토된 한국식 동검, 제주 삼양동에서 출토된 청동검과 옥환 등은 대외교류의  증거이다. <삼국지-위지동이전>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제주는 한,중,일을 연결하는 해상 교역로에서 교류의 중심지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첫번째 사진은 초기 철기시대의 건입동 산지항 출토 청동검 꾸미개이다. 두번째 사진 왼쪽 엽전은 건입동 산지항 출토 대천오십과 화천, 오른쪽 엽전은 여수 거문도와 건입동 산지항 출토 오수전이다. 

 

 

 

<탐라의 해양교류 흔적>

탐라는 주변지역과의 해상교류로 다양한 문물을 받아들였다. 철기, 유리구슬, 옥제품, 남해안 지역의 토기 등 제주에서 나지 않는 산물과 새로운 토기들이 들어오거나 제주에서 만들어진 생활용기가 남해안 지역으로 전해지기도 하였다. 특히 제주 동부지역의 구좌읍 종달리에서는 남해안 지역에서 들여온 토기와 철기 여러 점이 출토되어 당시 이 일대가 해상의 요지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의례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제주시 용담동 제사 유적 출토품도 당시의 활발했던 해상교류를 보여준다.

 

첫번째와 두번째 사진은 신안군 방죽리 증도에서 발굴된 중국 원나라의 청자 연꽃잎무늬 접시와 목간이다.

두번째 사진의 목간은 물품의 꼬리표로 수하물의 항목과 수량, 물품을 받거나 보내는 사람이 적혀 있다.

이 목간을 통해 1323년 닝보를 떠나 일본으로 향하던 원나라 교역선이 신안 앞바다에서 침몰한 사실이 밝혀졌다.

세번째 사진은 제주시 외도동에서 발굴된 마한 항아리이다.

 

 

 

 

<탐라의 곽지리식 토기와 고내리식 토기>

*Tip : 남북국시대에 제주도는 탐라국으로 불렸고, '남북국'은 신라의 삼국통일부터 발해 멸망 때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과거의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넘어가던 역사의 흐름에서 '잃어버린 왕국 발해'를 북국으로 삼아 한국사에 포함하는 것이다.

 

왼쪽은 곽지리식 토기, 오른쪽은 고내리식 토기이다. 제주시 애월읍 곽지리 조개무지 유적은 탐라 전기를 대표하며 이곳에서 출토된 입이 넓은 항아리 모양 토기를 '곽지리식 토기'라고 한다. 삼양동식 토기 양식을 계승하고 있으나 굽에서 아가리로 갈수록 나팔 모양으로 벌어지는 것이 특징이다. 곽지리식 토기는 2세기 무렵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점차 일정한 형태를 갖추어 갔다. 

곽지리 외에도 서귀포시 안덕면 화순리와 예래동, 제주시 외도동과 애월읍 하귀리 등에서도 만들어졌다. 이처럼 같은 양식의 토기가 대형화되고 제주 전역에서 동일하게 사용된 것은 탐라의 결속력이 강화되고 같은 문화권에서 성장해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탐라 후기의 대표적인 유적지인 제주시 애월읍 고내리에서 출토된 원통형의 깊은 바리 모양 토기를 '고내리식 토기'라고 한다. 고내리식 토기는 납작한 바닥과 이어진 몸통에서 아가리가 좁아지는 바리 모양으로 물레를 사용하는 새로운 기법으로 만들어졌다. 고내리식 토기를 통하여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고 발전된 생활문화를 만들어가던 탐라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탐라시대의 생활용품들>

철제 무기와 이음독널, 종달리 조개무지 출토품, 화순리, 예래동에서 발굴된 그물추이다. 이미 삭아 없어진 그물은 그물추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엮어 연결한 것일 듯...

 

 

<탐라 발전기의 유물들>

탐라 중, 후기는 한반도의 삼국시대 후기에서 남북국시대(통일신라)에 해당하며, '탐라'라는 이름이 대외적으로 알려진 시기이다. <삼국사기>에는 탐라가 백제, 통일신라와 교류하고 왜와 당에 사신을 파견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 시기에는 고내리식 토기가 제주도 전역에 퍼지며 동일한 문화양상을 보인다. 또한 한반도에서 수입된 회색도기를 함께 사용하였는데 제주시 용담동 제사 유적과 용천동굴에서 확인되었다.

 

탐라국은 주변국에 조공을 바치며 독립적인 지위를 유지해 오다가 1105년(숙종 10) 고려의 행정구역인 탐라군에 속하게 된다. 첫번째 사진은 고내리식 토기(고내리 유적), 두번째 사진은 구좌읍 용천동굴에서 발굴된 항아리와 장군, 갈돌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