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21.07. 국립제주박물관2(고려~조선)

큰누리 2021. 10. 5. 22:41

♣ 국립제주박물관 관람 시간 및 정기 휴관일

*전시실 관람 / 평일 - 19:00~18:00 / 토,일,공휴일 : 09:00~19:00 (3월~10월 토요일은 21:00까지 관람, 관람시간 종료 1시간전 입장)

*정기휴관일 /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날, 추석

*야외공간 개방 / 06:00~21:00

*입장료 무료

 

 코로나 19로 인한 부분 개관

*인터넷 사전 예약제 : 30분 간격으로 50명, 개별(4인 이하) 관람만 가능

*입장 시간 : 오전 10시 ~ 오후 5시 30분

*예약 인원 미달 시 현장접수 후 입장 가능.

 

-이하 내용은 현지 안내문에 의함-

<시대에 따라 달라진 제주도의 명칭>

'제주'란 명칭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생각보다 늦은 충렬왕 21년(1295)부터 불리기 시작했다.

1. 기록에 등장하는 제주도의 최초 명칭은 <삼국지-위서-동이전>에는 주호(州胡)이다. '주호'라는 마한의 서쪽 바다 가운데 큰 섬이 있다. 가죽옷을 입고 소 돼지를 즐겨 치며, 배를 타고 한중을 왕래하며 장사를 한다.

 

2. <삼국사기-백제본기-문주왕 2년(476)>에는 4월에 탐라국(耽羅國)이 방물을 바치니 왕이 기뻐하여 사자에게 은솔 벼슬을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3. <삼국사기-백제본기-동성왕 20년(498)>에는 왕은 탐라에서 공부를 수행하지 않으므로 친히 충정하여 무진주에 이르다 중략... 탐라는 곧 탐모라(耽牟羅)이다.

 

4.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문자명왕 13년(504)>에는 황금이 부여에서 생산되고, 옥이 섭라에서 생산되는데, 부여는 물길에게 쫓겨나고, 섭라(涉羅)는 백제에 병합되었으므로... 하략...

 

5. <고려사-지리지-숙종 10년(1105)>에는 탁라(乇羅)를 고쳐 탐라군(耽羅郡)이라 하였다.

 

6. <고려사-지리지-충렬왕 21년(1295)>에는 탐라를 다시 제주(濟州)로 고치고 판비서성사 최서를 목사로 임명하여 파견하였다.

 

7. <신증동국여지승람-중종 25년(1530)>에는 한라산 일명은 원산이니, 곧 바다 가운데 있다는 원교산이고, 그 동쪽은 동무소협인데 신선이 사는 곳이다. 또 그 북동쪽에 영주산이 있으므로 세상에서 탐라를 일컬어 동영주(東瀛州)라 한다 하였다.

 

8. <신증동국여지승람-중종 25년(1530)>에는 제주목(濟州牧)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동쪽은 정의현 경계까지 80리이고, 서쪽은 대정현 경계까지 81리이며, 남쪽으로는 바다까지 1백 20리이고, 북쪽으로는 바다까지 1리이다.

건치연혁 : 본래 탐라국인데 혹은 탁라라고도 하며 전라도 남쪽 바다 가운데 있는데 넓이가 400여 리이다.

 

 

<고려시대의 제주>

918년에 건국한 고려는 탐라국을 인정하고 성주의 작위를 내리고 간접적으로 지배하였다. 1105년(숙종 10)에는 탐라국을 고려의 행정구역인 군(郡)에 포함시키면서 탐라군이 되었고, 탐라는 나라의 지위를 잃게 되었다. 1295년(충렬왕 21)에는 '탐라'라는 이름 대신 바다 건너 고을이란 뜻의 '濟州'로 이름이 바뀌었다.

탐라는 고려의 영향으로 청자와 불교문화를 받아들였다. 고려시대 말기 대몽항쟁 시기에는 몽골군의 침입에 대항하던 삼별초(三別抄)의 마지막 거점이었으나, 1273년(원종 14) 삼별초가 여몽 연합군에게 패하면서 제주는 元나라 탐라총관부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고려시대, 한경면 신창리의 해저유물>

고려시대 제주에서 청자를 만들지 않았지만 바닷길을 통한 청자 수입은 유리하였을 것이다. 제주시 한경면 신창리 해저에서 중국 청자와 금팔찌, 금뒤꽂이 등이 발견되었다. 중국 남송 용천窯에서 만들어진 청자와 다른 물건들을 싣고 일본으로 가던 무역선이 난파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 절터에서 출토된 유물들>

제주에서 불교가 융성한 것은 고려시대부터이며 제주의 대표적인 절은 법화사, 수정사, 원당사, 존자암 등이다. 법화사 터에서는 고려청자와 다양한 기와, 중국 도자기 등이 발견되었다. 그 밖에 원당사 터 5층석탑, 수정사 터 석탑 부재, 존자암 터 출토품 등은 제주의 불교문화를 잘 보여준다.

첫번째와 두번째 사진은 제주시 삼양동 원당사 터에서 출토된 청자와 기와이고, 세번째 사진은 서귀포시 하원동 법화사 터에서 출토된 구름봉황무늬 수막새, 구름 용무늬 암막새 및 청자와 기와이다.

 

 

 

 

<청동합, 청자국화무늬 접시와 완, 청자국화무늬 병>

고려시대(13~14세기)에 제작된 것들로 서귀포시 법환동, 제주시 삼도동에서 출토되었다.

 

 

<최충헌 묘지명 탑본(위)과 고려첩장불심조조 복제품>

두번째 사진의 고려첩장불심조조(高麗牒狀不審條條)는 삼별초의 진도 정부가 1271년(원종 12) 일본에 보낸 외교문서를 가마쿠라 막부가 교토 조정에 보내면서 잘 이해되지 않는 내용을 12항목으로 정리한 문서이다. 삼별초 진도 정부의 첩장은 몽골 침략의 위기상황을 일본과 공동으로 대응하고자 하는 기대가 표현되어 있다.

 

 

 

<항파두리성(三別抄 缸坡頭里城)에서 발견된 유물들>

제주도에 거점을 둔 삼별초는 김통정 장군을 중심으로 항파두리에 성을 쌓고 항전하였으나 1273년(원종 14) 결국 여몽 연합군에 항복하였다. 元나라는 삼별초를 평정한 후 제주도에 탐라총관부를 설치하고 다루가치를 파견하여 감독하게 하였다. 

최근의 발굴조사로 항파두리성의 내, 외성 구조와 축성방식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성안에서 20여 기의 건물 터가 확인되었고, 갑옷을 비롯하여 청자, 청동그릇, 기와류 등을 발견하였다. 사진 오른쪽 아래의 길죽한 병 5개는 몽골 병사들이 사용한 항아리(몽골병)이다.

 

 

<항파두리성(三別抄 缸坡頭里城) 터와 내성 터에서 발견된 철갑옷>

 

 

 

<조선시대 제주와 3읍(三邑)>

조선시대는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고 중앙집권적인 왕도정치를 지향한 조선의 지방통치제도에 의해 운영되었다. 사람들은 거친 풍토와 지속적인 자연재해, 끊임없는 왜구의 침입으로 어려운 생활을 이어갔다. 게다가 감귤과 말, 전복 등 토산품의 과중한 공납200년 동안 지속된 제주 사람의 섬 밖 이동 금지는 제주의 경제와 문화발전을 더디게 만들기도 하였다. 한편 제주에 부임한 관리, 사화나 당쟁으로 유배 온 학자와 정치인, 표류로 인해 바깥세상을 경험하고 온 사람들은 제주 사람들에게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었다.

 

조선은 지방통치를 위해 전국8도에 관찰사를 파견하고, 그 아래 330여 개의 府, 牧, 郡, 縣에는 수령을 내려 보냈다. 1393년(태종 16) 여의손(?~?)이 첫번째 제주목사로 부임하였다. 1416년(태종 16)에는 제주목사 오식이 남쪽의 토착세력을 통제하고 한라산 북쪽에만 관아가 있는 불편을 덜기 위해 현감 2명을 파견해달라고 건의한다. 이후 제주목(濟州牧), 정의현(旌義縣), 대정현(大靜縣)의 3읍 체제가 되었다.

 

 

<조선시대 탐라제군사명(耽羅諸軍司命) 旗>

이원조가 1841년(현종 7) 제주목사로 부임할 때 받은 깃발이다. 사명기는 조선시대 각 영의 우두머리가 휘하의 군대를 지휘할 때 쓰던 깃발로 각 대장의 방위에 따라 바탕색이 달랐다. 

아랫부분에는 赤(남방), 靑(동방), 黃(중앙), 白(서방), 黑(북방)의 오방색 술이 달려있다. 부임할 때 교지와 함께 이 깃발을 받아 사용하였는데 목사의 존재와 위엄을 드러내 주었다. 

 

 

<조선시대 3읍과 한라장촉>

왼쪽의 작은 그림 3개는 1702년(숙종 29)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형상이 남긴 <탐라순력도> 41점 가운데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의 3읍을 점검하고 군사를 훈련시키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오른쪽의 한라장촉은 <탐라순력도> 첫장에 수록된 제주도와 주변 지형을 그린 지도이다. 지도 위쪽이 남쪽이고, 아래쪽이 북쪽으로 한양에 있는 임금이 내려다보는 방향에서 그렸다.

 

 

<조선시대 제주속오군적부>

1620년~1650년 사이 제주도 속오군(束伍軍)의 소속과 신원을 기록한 명부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군적부로 군사 개개인의 나이, 거주지, 얼굴 모습, 수염 상태, 흉터 등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조선시대 제주목사 관련 자료들>

제주목사는 제주목 뿐아니라 대정현과 정의현을 감독하는 전라도 관찰사의 임무까지 겸해 다른 지방의 수령보다 권한이 컸다. 왜구 방어를 위해 절제사나 방어사 등의 군작도 함께 맡았다. 제주목사는 형옥(刑獄), 소송, 세금 징수, 삼강 등의 모범이 되는 사람 발굴 등 수령의 일반적인 업무 외에도 나라에 중요한 물품인 귤과 제주말 진상을 위해 과수원과 목장 관리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중앙은 이익태의 제주목사 교지, 오른쪽은 제주목사 이익태 초상화이다.

 

 

<제주도의 진상품들>

감귤, 공마, 전복은 제주도에서 중앙정부에 할당 받은 양을 진상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품목이었다.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얼마나 철저하고 가혹하게 특산품을 수탈했는지 알 수 있다. 제주도는 오늘날 우리가 관광하러 들르는 풍요롭고 아름다운 곳이 아니라 특산품을 수탈해가는 장소였을 뿐이다.

 

감귤의 경우 종류별로 하나하나 갯수까지 감시하며 거둬갔기 때문에 감귤을 독약같이 보았다고 했다.

은 죽은 가죽까지 대조하며 거두었고, 징납을 면하고자 말 키우는 목자를 죽이기까지 하였다.

해남인 포작인과 해녀인 잠녀 또한 수탈을 견디다 못해 도망을 쳐서 홀아비가 되거나 늙어서도 죽음을 무릅쓰고 물로 들어가야 했다. 

 

 

 

 

<갈옷, 마구, 갓>

갈옷은 감물로 염색한 옷이고 갈옷 아래 물건은 말안장과 나막신이다. 중앙은 탕건과 탕건골, 오른쪽 아래는 망건, 양태와 양태판 등이다.

 

 

 

<포작(해남)과 잠녀(해녀)>

제주의 바다를 터전으로 해산물을 채취하는 남자는 포작, 여자는 잠녀라고 한다. 포작은 전복 및 바다고기를 잡아 진상하는 역을 주로 담당하는 어부였지만 조선후기에 이르면 전복 진상에 과중한 군역까지 더해져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고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후 포작의 역할은 주로 잠녀들이 하였다. 목숨을 건 힘든 잠수일과 사욕을 채우는 관리들까지 늘어나 잠녀들의 고통은 점점 심해졌다.

 

왼쪽은 물옷(잠수복)으로 상의는 물적삼, 하의는 물소중이라고 부른다.

왼쪽 아래의 빨간 물체는 테왁으로 해산물을 채취할 때 사용하는 부력도구이며 작업 도중 잠시 숨을 고를 때 사용한다.

테왁 아래의 망사리는 채취한 해산물을 그물망으로 테왁에 매달아 한 세트가 된다. 

중앙 바닥의 작은 옷 세트는 아동용 물옷으로 제주에서는 여자 아이가 7~8세가 되면 물질을 배우면서 입은 옷이다.

그 옆의 구멍 뚫린 그릇은 성게체,  오른쪽 아래 물체(전복이 든 바구니)는 본조갱이이다. 본조갱이 허리에 차고 다니는 작은 전복껍질로 물속의 해산물을 발견했을 때 표시해 두는 용도이다. 

오른쪽 윗단의 물건들은 해녀들이 해산물을 채취할 때 쓰는 빗창, 종개호미, 까꾸리, 눈(물안경), 눈갑(물안경갑)이다.

 

 

<제주도에 표류한 하멜이 남긴 기록>

1653년 네덜란드인 헨드릭 하멜(1630~1692)은 항해 중 제주도에 표류했다가 조선에 13년간 억류되었다. 본국으로 돌아가 남긴 <하멜 표류기>는 유럽에 조선을 소개한 최초의 기록이다. 하멜은 처음 제주도에 도착했을 때 이곳을 '퀄파트'라고 생각하였다. 퀄파트는 1642년경 제주도 근처를 항해했던 퀄파트 드 브락이란 배의 이름을 딴 것으로 서양에서 불린 제주도의 명칭이었다.  

 

 

<표류로 얻은 견문록들>

해난 사고가 잦은 제주에서는 바람을 잘못 만나 중국 명나라, 청, 왜, 류큐(오키나와), 타이완, 여송, 안남(베트남)까지 표류하는 일이 많았다. 바다에서 표류하면 대부분 돌아오지 못했지만 위기를 극복하고 무사히 돌아온 사람들은 표류 기간에 보고 들은 것을 기록으로 남겼다.

 

 

<제주도에 유배된 사람들>

조선시대 제주도에 유배된 사람들은 광해군을 비롯한 왕족, 양반, 도적 등 다양한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사화와 당쟁이 심해지면서 정치인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이들은 활동이 엄격하게 제한되었지만 선비로서 후학을 양성하며 지내기도 했다. 제주도에 유배된 유명인사(?)는 우암 송시열, 추사 김정희, 면암 최익현 등이 있다.

 

 

<제주도 유배인 우암 송시열의 글씨>

 

 

<제주도 유배인 면암 최익현의 초상화와 고종 비답 필사본>

 

 

<제주의 인물>

제주 밖으로 이동이 어려운 사황에서도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간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굶주리고 제주민을 위해 재산을 기부했던 거상 김만덕(1739~1812), 탐라사절로 알려진 고홍진(1602~1682), 진국태, 양유성, 문영후와 명도암, 김진용, 안병택, <탐라기년>을 저술한 김석익 등은 이웃과 나라의 어려움을 살핀 제주의 인물이다.

 

 

<제주의 교육기관>

제주의 유학교육을 위한 향교는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 세 곳에 있었다. 조선 후기에는 향교의 기능이 약화되면서 사학으로 귤림서원과 삼천서당, 우학당, 좌학당 등이 설립되어 제주 유학 교육의 중심이 되었다.

 

 

<물허벅과 물구덕>

물허벅은 물을 긷고 다녔던 열 되들이 운반용구(주로 도기)이며, 물구덕은 물허벅을 담아 이동할 때 사용하는 대나무로 만든 바구니이다.

 

 

<제주인의 생활용품과 토신함(土神函)>

윗단의 대나무 용품은 차롱과 동고랑이며 오른쪽의 현무암 용기(!)들은 토신함이다. 아랫단은 왼쪽부터 솔박(되)과 작박(홉), 좀팍(간장용 바가자), 코남박(코사발)이다. 토신함은 칠성신을 모시는 돌집으로 제주인들은 칠성신을 부의 상징으로 믿어서 안채 뒤에 모시는데 이것을 밧칠성이라 했다. 밧칠성은 뱀칠성을 의미하며 뱀을 가신으로 모시는 제주의 민간신앙이다.

 

 

<무당이 굿을 할 때 사용하는 각종 무구>

제주도에서는 무구를 삼멩두, 연물 등으로 부르는데 삼멩두는 신칼, 요령, 산판을 의미한다. 산판은 점을 치는 도구인 天門과 상잔(床盞), 이것들을 담는 그릇인 산대(算臺)를 말한다. 연물은 북, 장구, 설쇠(꽹과리), 대양(징), 바랑(바라) 등의 악기를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