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21.07. 제주4.3평화공원

큰누리 2021. 10. 24. 19:42

-제주4.3평화공원과 기념관-

제주4.3은 내게 너무 무겁고, 명성(!)에 비해 별로 아는 바가 없어서 항상 궁금했던 사건이었다. 제주에 와서도 들릴 일이 없었는데 이번엔 작정을 하고 제대로 보기로 했고, 이곳을 둘러봄으로써 그동안 몰랐던 사실들을 많이 알 수 있었다. 여러 상황 때문에 정확한 명칭조차 붙이지 못한 사건, 이웃끼리 이념 혹은 다른 이유로 미워하고 죽였던 사건, 서로 얽혀 있어서 누구도 벗어날 수 없지만 아무도 들추고 싶지 않아 했던, 그래서 오랜 기간 묻혀 있던 사건...

 

다른 역사적인 사건에 비해 비교적 근래(!)의 사건이라 앞으로도 더 많은 진실과 해석들이 있겠지만 내가 4.3평화공원에서 본 것들을 중심으로 간단하게 요약해보고자 한다. 어떤 사건은 관점이나 시대적 상황에 따라 해석이 판이하게 달라질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실을 규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진실을 덮거나 왜곡한 상황에서는 절대 실체에 다가갈 수 없을 뿐더러 추측이나 오판은 제대로된 역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날 정말 더웠다! 7월 21일부터 26일까지는 그럭저럭 견딜만했는데 27일부터 폭염이 이어져 에어컨이 없는 집에서 잠조차 자기 어려웠다. 오전부터 이미 다른 곳을 들렀기 때문에 역사적인 장소임에도 지쳐서 가장 중요한 기념관과 비설(변병생 모녀상), 연못 정도만 둘러보았다. 4.3평화공원에서 중요한 내용들은 기념관 안에 대부분 있지만 위령탑이나 위패봉안실, 행방불명인 표석도 들러보면 좋을 듯하다.

 

 

-제주4.3평화공원-(이하 현지 안내문)

제주4.3평화공원은 4.3희생자와 유가족의 명예회복 및 화해와 상생의 미래를 열어가기 위한 평화.인권 기념공원이다. 4.3희생자에 대한 공동체적 보상의 성격으로 2003년 공원을 조성하기 시작하여 2008년 3월 4.3평화기념관이 개관되었다. 제주4.3평화공원은 위령제단, 위패봉안실, 4.3평화기념관, 행방불명인표석, 봉안관, 4.3평화교육센터(어린이체험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4.3평화기념관-

4.3의 역사를 담은 그릇의 형태를 차용하였으며 4.3의 역사적 진실을 기록한 상설전시실과 특별전시실, 기획전시실, 개가자료실, 영상실 등이 들어서 있다. 정부의 제주4.3사건 진상보고서를 토대로 전시 연출된 상설전시관은 4.3의 발발, 전개, 결과, 진상규명운동까지 전과정이 차례로 펼쳐져 있어 자연스럽게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배울 수 있는 교육의 장으로 운영되고 있다.

♣ 전시실 관람시간 : 09:00~17:30 (입장 마감 16:30)

 휴관일 : 매월 첫째, 셋째 월요일

 입장료 : 없음

 

-봉안관-

봉안관은 2006년 5월부터 2018년 12월까지 5차에 걸쳐 제주도내 8개 지역에서 발굴하여 수습한 4.3희생자 유해 405구 중 379구(2020년 5월 현재)가 안치되어 있다. 봉안관에는 2009년에 확인된 제주국제공항 4.3희생자 유해발굴 학살 암매장 구덩이를 재현하고 있다.

 

 

<제주 4.3평화공원 안내도>

 

 

<4.3평화기념관과 전시관 안내도>

4.3평화기념관 1층은 6개의 상설관과 특별전시관(다랑쉬굴)이 있다. 상설관 1층은 1관 역사의 동굴, 2관 흔들리는 섬, 3관 바람 타는 섬, 4관 불 타는 섬, 5관 흐르는 섬, 6관 새로운 시작이다.

2층에는 '세계의 제노사이드'와 '제주판 아우슈비츠수용소, 주정공장'이 있는데 내 기억에는 없다. 역사적인 흐름에 따라 전시되어 있기 때문에 1관부터 순서대로 따라가며 보면 된다. 

 

 

 

<1관 역사의 동굴관의 4.3백비, 이름 짓지 못한 역사>

컴컴한 동굴 같은 통로를 지나면 묵직한 느낌을 주는 이 백비가 좁은 원통형의 공간에 있고, 길고 높은 천장 위쪽은 뚫려(!) 있다. 비석에 대한 안내문이 별도로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언젠가 이 비에 제주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

 

4.3백비, 이름 짓지 못한 역사 백비(白碑), 어떤 까닭이 있어 글을 새기지 못한 비석을 일컫는다. '봉기, 항쟁, 폭동, 사건, 사태, 사건' 등으로 다양하게 불려온 '제주4.3'은 아직까지도 올바른 역사적 이름을 얻지 못하고 있다. 분단의 시대를 넘어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통일의 그날, 진정한 4.3의 이름을 새길 수 있으리라.

 

 

<2관 흔들리는 섬>

비행장이나 진지 등 제주 대부분이 일제에 의해 요새화된 상태에서 광복을 맞이한 제주도에서 벌어진 일들을 다루고 있다. 해방 전에 일본군이 7만명(당시 제주 인구는 22만)이나 배치된 제주도는 9월 28일에 일본군 항복조인식이 진행되었고 해방 초기에 인민위원회가 제주사회를 주도했다. 

 

그 상태에서 통일정부 수립과 단독정부 수립을 놓고 의견이 갈라졌고, 신탁통치에 대한 찬반 문제까지 불거졌다. 제주는 도(島)에서 도(道)로 승격되고, 미군정이 실시되었으며 군경조직이 불어났다. 대표적인 군부대는 모슬포에서 창설된 국방경비대 제9연대였고, 1947년 당시 400명의 병력이었다.

 

 

 

 

 

<2관 흔들리는 섬 - 4.3사건의 도화선 3.1발포사건 발발>

1947년 3월 1일은 제주 현대사의 분수령으로 기록되는 날이다. 3.1절 기념대회 후 군정경찰이 군중을 향해 쏜 총탄으로 6명이 희생되었다. 이 사건이 기폭제가 되어 그때까지 큰 소요가 없었던 제주사회가 들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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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를 둘러싼 미,소 대립으로 통일정부 수립의 길은 점차 멀어지고 있었다. 제주도 민전은 자주독립을 촉구하기 위해 대대적인 3.1절 기념대회를 개최했다. 기념대회가 열린 제주북국민학교 주변에는 대략 2만 5천~3만명으로 추산되는 사람들이 모였다.

기념대회가 끝난 후 통일독립을 촉구하는 가두시위가 있었는데 시위행렬이 관덕정을 벗어난 오후 2시 24분경, 관덕정 앞 광장에서 기마 경관이 탄 말에 어린이가 치었고, 주변사람들이 돌을 던지며 달려들자 순간 총성이 울렸다. 경찰서 습격으로 오인한 경찰의 이 발포로 민간인 6명이 숨지고, 6명이 총상을 입었다.

 

경찰 발포에 3.10총파업으로 민,관 직장인들이 총파업으로 항의하자 사건 조사를 맡은 미군정은 남로당 제주조직이 선동을 증폭시켰다고 분석하고 제주를 '레드 아일랜드(붉은섬, 빨갱이섬)'로 단정했다. 미군정 당국이 떠난 다음날부터 조병옥 경무부장과 제주경찰은 파업 주모자를 검거한다며 200여명을 연행하여 고문을 시작했다. 

한편 극우청년단체인 서북청년회(서청) 단원들이 제주에 들어와 경찰, 행정기관, 교육기관 등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빨갱이 사냥을 구실로 테러를 일삼아 4.3사건 발발 요인이 되기도 했다.

 

 

 

 

 

<3관 바람 타는 섬 - 무장봉기의 시작>

-제주4.3사건에 대한 진상보고서의 4.3의 정의-

1947년 3월 1일의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청의 탄압에 의한 저항과 단독선거, 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3관 흔들리는 섬 - 5월 10일 단독선거 거부와 제주도 토벌작전>

첫번째 사진의 그림은 강요배의 '제주도민의 5.10'으로 긴장을 배후에 둔 평화로운 풍경이다. 미,소 냉전과 정치 지도자들의 분열로 민족의 운명은 유엔으로 넘어갔고, 결국 1948년 5월 10일 단독선거가 결정되었다. 

 

선거일이 다가오자 전국에서 선거 관련 무력충돌이 벌어지고 경찰 피습사건이 239건에 경찰 53명, 무장대 114명이 사망했다. 제주도는 5.10 단독선거를 보이콧해서 선거가 무효화되었고, 미군은 브라운 대령의 지휘하에 토벌작전을 감행하게 된다.  

 

 

 

 

<4관 불타는 섬 - 1948년 11월부터 1949년 3월까지 초토화 작전>

남북에 따로따로 정부가 수립되고 38선이 굳어지자 해안선에서 5km 이외의 지역에 있는 사람은 모두 총살한다는 포고령을 발표하고, 중산간 마을 주민들을 해변마을로 강제 이주시키기 시작했다. 이 작전으로 비무장 민간인이 대량 학살되고 가옥 4만 채가 방화로 불바다가 되었다.

 

 

 

<4관 불타는 섬 - 죽음의 섬 '아트 워크'>

제주4.3과 관련하여 죽임을 당한 민중들의 참혹한 상황을 표현한 것이다. 세월, 집단희생1과 2, 질식사, 암매장, 수장, 참수, 어린이의 죽음, 여성의 죽음, 무기들, 총살, 무장대, 교수, 유해발굴 순으로 둥그렇게 배열되어 있다.

 

 

 

<4관 불타는 섬 - 제주4.3사건 피해 상황과 4.3사건의 종식>

중산간 마을 대부분이 토벌대에 의해 깡그리 불태워짐으로써 3만 9천여 동의 가옥이 잿더미로 변했고, 주민 9만여 명(당시 제주 전체 인구는 22만명)은 이재민 신세가 되어 오랫동안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렸다. 정신적, 물질적 피해뿐 아니라 서로 도우며 평화롭게 살던 전통적인 제주공동체가 철저히 파괴되었다.

 

경찰은 무장봉기 발발 6년여 만인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령을 해제했다. 이로써 1947년 3.1 발포 이래 7년 7개월만에 4.3사건은 종식되었다.

 

 

<4관 불타는 섬 - 무장대에 의한 희생과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의 죽음>

무장대는 1948년 11월 중순 이후 토벌대의 초토화작전이 벌어지자 자신들에게 협조하지 않는 마을을 습격했다. 이때 남원리, 위미리, 성읍리, 세화리 주민들이 많이 희생되었고, 이런 행위는 향후 주민들과 무장대를 갈라놓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1949년 6월 7일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가 경찰에게 사살됐다. 무장대는 이미 와해된 상태였지만, 이덕구가 무장대의  상징적인 존재였기 때문에 그 영향이 컸다. 경찰은 제주읍 중심지인 관덕정 옆에 이덕구 사체를 나무십자가에 매달아 놓고 어린 학생들에게 구경하도록 했다.

 

 

<5관 흐르는 섬 - 전쟁이 몰고 온 또 다른 희생 예비검속>

'예비검속'이란 범죄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사전에 구금하는 것을 말한다. 일제가 식민지 조선을 탄압하기 위해 만들었다가 해방 후 미군정법령 제11호에 의해 폐지되었다. 그러나 정부는 6.25전쟁 발발 직후 불법적인 예비검속을 실시해서 예비검속자와 형무소 수감자에 대해 대대적인 학살극을 벌였다. 이 학살극은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해 전세가 역전된 후에야 멈췄다.

 

 

 

<5관 흐르는 섬 - 대물림된 멍에와 탄압 받은 진상규명운동>

4.3사건의 또 다른 아픔은 무고한 희생이 당대에 그치지 않고 유가족들에게 대물림되었다는 것이다. 군경토벌대에 의해 죽임을 당하거나 사법처리를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유가족들은 연좌제에 의해 감시 당하고 공직 진출, 취직이나 승진, 사관학교 등 각종 입학시험, 해외 출입 등 온갖 불이익을 당했다.

해방 이후 일본에서 귀환한 6만여 명의 제주인들은 4.3사건으로 인한 피해를 피하기 위해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들중 많은 사람들이 오사카의 이쿠노쿠에 모여 살면서 남한이나 북한, 어느 쪽도 택하지 않고 경계인의 삶을 살았다. 

 

4.3사건 진상규명운동은 5.16직후 된서리를 맞았고, 1970~80년대에는 학살극을 폭로한 소설가와 시인들이 공안당국에 끌려가 고문을 받거나 구속되었다. 1989년에는 4.3마당극을 공연한 놀이패 '한라산'이 경찰에 연행돼 곤욕을 치뤘고, 1995년의 다큐멘터리 '잠들지 않는 함성'의 제작자와 1997년의 다큐멘터리 <레드 헌트>를 상영한 사람도 구속되었다.

 

반세기 가까이 이념적 누명을 쓰고 지하에 갇혔던 4.3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피나는 기억투쟁이 있었다. 4.3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은폐, 왜곡, 억압의 긴 터널을 벗어나 평화, 인권, 화해, 통일의 상징으로 거듭나고 있다.

 

 

<5관 흐르는 섬 - 유해발굴로 드러난 학살의 흔적>

제주국제공항에서는 4.3 당시 학살된 후 묻힌 유해가, 셋알오름에서는 예비검속 당시 구덩이에 묻힌 유해가 발굴되었다.

 

 

<특별전시관 다랑쉬굴>

1948년 12월 18일, 제9연대 제2대대는 다랑쉬마을 근처에서 피난민과  그들의 은신처인 작은 굴을 발견했다. 군인들은 밖에 있던 사람들을 총살한 후 굴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오라고 소리쳤다. 굴속으로 수류탄을 던져도 나오지 않자 밖에서 불을 피워 질식사시켰다. 희생자는 11명으로 이중에는 50대 여성도 있었고 아홉살 난 어린이도 있었다.

 

다랑쉬굴을 발견한 제주4.3연구소는 1992년 3월 29일 제민일보와 합동으로 현장조사를 해서 사건 일자 및 상황, 희생자의 신원과 유족 등 사건의 전모를 밝혔다. 사건의 실체가 알려진 뒤 유족과 도민 여론은 '양지 바른 곳에 안장을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얼마 후 화장으로 결정되었고, 유해는 1992년 5월 15일 불태워져 바다에 뿌려지고 다랑쉬굴은 봉쇄되었다.

 

 

<6관 새로운 시작>

2003년 10월 15일 '국가 공권력의 인권유린'으로 규정한 진상조사보고서가 확정됐고, 같은 해 10월 31일 노무현 대통령은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과거사에 대한 대통령의 사과는 4.3이 처음이다.

4.3의 상처를 화해와 상생의 정신으로 승화시키고 평화와 인권의 상징으로 삼기 위해 정부는 2005년 제주도를 '세계평화의 섬'으로 선포하였다.

 

 

 

 

<제주4.3평화기념관 1층 로비>

 

 

<제주4.3평화공원의 70주년 추모 동백꽃과 60주년 기념캡슐>

 

 

 

<제주4.3평화공원 문주>

공식적인 정문이지만 관람객들은 주로 기념관 앞에 있는 주차장으로 입장한다.

 

 

<제주4.3평화공원 귀천과 평화의 숲, 연못>

 

 

 

<제주4.3평화공원 조형물 '이젠...'>

작가 : 강문석, 서성봉

제작 : 제주 4.3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2018. 4.)

 

 

<'비설' 조형물 앞에서 본 제주4.3평화공원 기념관과 귀천>

 

 

<변병생 모녀상(비설 飛雪)>

본개동 지역에 대대적인 토벌작전이 벌어지던 1949년 1월 1일 변병생(당시 25세)과 그의 두 살배기 딸은 거친오름 북동쪽 지역에서 토벌대에 쫓겨 피신 도중 토벌대가 쏜 총에 맞아 숨졌다. 후일 행인에 의해 눈더미 속에서 모녀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이 모녀상은 당시 억울하게 희생된 두 생명을 기억하고자 제작되었다.

 

비설(飛雪)은 '쌓여 있다가 거센 바람에 휘날리는 눈'을 뜻한다. 눈보라가 치던 한겨울,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안타깝게 죽어간 모녀의 모습을 마치 거센바람에 휘날리는 비설의 의미와 중첩시켰다. 옛날 어머니들이 불러주던 자장가 '웡이자랑'이 새겨져 있는 돌담길을 따라 모녀상에 다다르면 눈밭 위에서 웅크린 채 죽음을 맞는 어머니와 딸의 죽음을 마주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