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

21.09. 아산 현충사

큰누리 2021. 11. 10. 22:49

《아산 이충무공 유허》

사적 제155호.

아산 백암리 방화산 기슭은 충무공 이순신장군(1545~1598)이 혼인하여 살던 옛집과 그를 기리는 사당이 있는 곳이다. 충무공은 이곳에서 십년 간 무예를 연마하여 서른 두 살 되던 해(1576년, 선조9년)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충무공이 순국하신지 108년이 지난 1706(숙종32)년. 이곳에 공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사당을 세웠으며, 1707년 숙종이 현충사(顯忠祠)라 사액하였다.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사당이 훼철되었으나, 일제시대인 1932년 동아일보사가 주관하여 온 겨레의 정성으로 다시 세웠다.

 

1945년 광복 후에는 매년 4월 28일에 온 국민의 뜻으로 탄신 제전을 올려 공을 추모하여 왔다. 1966년부터 1974년까지 공의 위업을 기리고자 고 박정희대통령의 지시로 성역화사업을 시행하였으며 2008년부터 2011년까지 현충사 유적정비 사업을 통해 충무공이순신기념관을 건립하였다.

 

 

<현충사 종합 안내도와 경내의 시설들>

 

 

 

<현충사 경내>

입구에 첫번째 사진의 충무공이순신기념관 있고, 기념관을 지나면 충무문- 정려- 홍살문- 현충사가 남북으로 늘어서 있다. 홍살문 좌측(서쪽)에 구 현충사가 있고, 오른쪽(동쪽)에 충무공 고택과 충무정(우물), 활터, 이면공 묘소가 있다.

 

 

<현충사(사당) 입구인 충무문>

 

 

<현충사 경내의 느티나무>

느티나무는 우리나라 자생 수종으로 수명이 길고 수형이 단정하여 옛날부터 대표적인 정자나무로 여겨왔다. 이 나무의 수령은 약 300년이며 나무 높이는 20m, 나무 둘레는 480cm, 수관폭은 20m이다.

 

 

<현충사 경내의 연못들>

연못이 제법 커서 무언가 이름이 있을 법한데 없다. 윗 사진 2개는 아래에 있는 천원지방형 연못이고, 세번째 사진은 다리 윗쪽에 있는 사각형 연못이다.

 

 

 

 

<현충사 정려(旌閭)>

정려는 조선시대에 충신이나 효자, 열녀에게 임금이 내린 현판을 그들이 살던 마을 입구에 걸어두고 마을 사람들로 하여금 본받게 한 정문(旌門)을 말한다. 이 정려에는 충무공 이순신을 비롯하여 강민공 이완, 충숙공 이완, 충민공 이봉상, 효자 이제빈의 현판이 걸려 있다.

 

 

 

 

<현충사 고택>

이 집은 충무공 이순신이 무과에 급제하기 전부터 살던 집으로 이후 종손이 대대로 1960년대까지 살았던 곳이다. 400여 년간 종손들이 살면서 부분적으로 늘려 짓거나 고쳐 지었으며, 집 뒤편에는 이순신의 위패를 모신 가묘가 있다. 매년 이순신이 전사한 날인 음력 11월 19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위패(位牌)는 돌아가신 분의 이름을 적은 나무패이며, 가묘(家廟)는 집안 내 사당을 말한다.

 

 

<현충사 고택 내부>

 

 

 

 

 

 

<충무정(忠武井)>

충무정은 이순신장군과 가족, 그리고 후손들이 1960년대까지 쓰던 우물이며, 현재는 탐방객들이 마시는 물로 활용하고 있다.

 

 

<현충사(사당) 왼쪽(서쪽)의 숲길>

산책로로 숲이 제법 깊지만 상당히 가파르다. 이 숲길로 올라가면 홍살문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현충문 옆으로 연결된다.

 

 

<현충사 현충문>

두 번째 사진은 현충문을 통해본 현충사(사당)이다.

 

 

 

<현충사(顯忠祠)와 내부의 충무공 이순신장군 영정>

현충사는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영정을 모신 곳으로 19323년 국민의 성금으로 지은 구 현충사를 옮기고 1967년 성역화 사업으로 새로 지은 것이다. 현충사는 이 사당도 그렇고 경내도 그렇고 규모는 크지만 대체로 단순하다.

 

 

 

<정면 옆에서 본 현충사(顯忠祠)>

 

 

<현충사(顯忠祠) 앞에서 본 아산시와 은행나무길>

현충사와 아파트 사이에 있는 가로로 놓인 도로는 최근 젊은이들에게 각광을 받는 현충사 은행나무길이다.

 

 

<舊 현충사>

구 현충사는 숙종 32년(1706년)에 아산 유생들의 청원으로 지어졌으나 고종 5년(1868년)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헐리게 되었다. 1931년에 이르러서는 덕수 이씨 충무공파 종가의 채무로 이충무공 묘소의 위토(제사 비용 마련을 위한 농지)가 경매에 부쳐지자, 정인보, 송진우, 김병로 등 민족지사들은 '이충무공유적보존회'를 결성하여 유적 보호에 앞장섰다. 

채무 변제를 위하여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성금 모금운동이 펼쳐졌고, 온 국민의 호응을 얻어 채무를 변제하게 되었다. 채무를 변제하고도 돈이 남자 '이충무공유적보존회'는 1868년에 헐렸던 현충사를 1932년에 다시 짓고 사액 현판을 다시 달았다. 1966년 현충사 성역화 사업으로 현재의 사당을 다시 크게 지으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현판은 숙종 32년(1706년)이 내린 것인 듯하다.

 

 

 

<현충사 경내의 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