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성북동 이종석 별장, 만해 한용운 심우장

큰누리 2023. 10. 20. 00:05

 

 

≪성북동 이종석 별장≫

지정번호 : 서울시 민속문화재 제10호 / 시대 : 조선시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로 131

성북동 서쪽 산자락에 위치한 이 집은 마포에서 새우젓 장사로 부자가 된 이종석이 별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한옥이다. 우물이 있는 바깥마당을 지나 일각문 대문을 들어서면 왼편에 행랑채, 오른편에 본채가 있다. 행랑채는 특이하게도 ㄱ자형으로 일반적인 가옥의 공간 구성이다.

행랑채와 안채 사이에는 원래 담장이 놓여 있었는데, 이곳 중문을 통해 안채로 드나들도록 되어 있었다. ㄱ자형의 안채는 대청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누마루를 두고 왼쪽에는 안방을 두었다. 누마루에는 원래 일관정(一觀亭)이라고 쓴 글씨가  걸려 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양반가옥에서 볼 수 있었던 누마루를 사용하였다는 점에서 조선 말기 신분에 따른 주거 형식의 경계가 허물어진 모습을 볼 수 있다.    --현지 안내문--

 

이종석 별장은 조선 말기의 부호이자 보인학원의 설립자인 이종석(1875~1952)의 여름 별장이다. 1900년경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 강점기 일관정에서 이태준, 정지용, 이효석, 이은상 등 문학인들이 모여 문학활동을 하였다고 전한다. 1960년대 대림산업 회장을 지낸 이재준이 구입하였고, 1985년 덕수교회에서 인수하여 현재는 부속건물로 사용하고 있다.  

 

 

<성북동 이종석 별장 소재지 덕수교회>

 

 

<이종석 별장 소재지 덕수교회 안내도>

일관정이 바로 이종석 별장이다. 

 

 

<성북동 이종석 별장 대문 안팎과 대문의 일관정 (一觀亭) 각자>

 

 

<성북동 이종석 별장 행랑채>

윗사진의 오른쪽 건물은 본채이다. 행랑채와 본채 사이에 담장이 있고 중문이 있어서 그곳으로 드나들었다고 하는데 남아있는 모습으로는 상상이 잘 안 된다. 아래 사진은 행랑채로 특이하게 일반 가옥처럼 ㄱ자형이다. 

 

 

<성북동 이종석 별장 본채와 누마루>

양반 전용인 누마루가 집에 기품을 더한다. 누마루에는 일관정 (一觀亭) 현판이 붙어있었다고 한다. 첫번째 사진에 이종석 별장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덕수교회 일부와 종탑이 보인다. 

 

 

<누마루 쪽에서 본 이종석 별장>

 

 

<누마루에서 본 이종석 별장 뒷쪽>

 

 

<성북동 이종석 별장 대문 밖에 있는 우물>

 

 

<성북동 이종석 별장 아래에 있는 덕수교회 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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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만해 한용운 심우장으로 오르는 입구>

첫번째 사진의 계단은 산 윗쪽에 있는 만해 한용운 심우장으로 오르는 입구이다. 계단 오른쪽 아래에 만해 한용운의 동상이 있는 작은 공원(!)이 있다. 심우장까지 거리는 멀지 않지만 경사가 가파르다. 첫번째 사진 오른쪽 위(=두 번째 사진)의 나무로 만든 공원은 누군가 다른 사람의 이름이 붙은 공원인데 잊었다! 이 정도만 올라도 지대가 높아서 맞은편의 성북동이 잘 조망된다.

 

 

 

<성북동 만해 한용운 심우장으로 올라가는 골목>

 

 

≪성북동 만해 한용운 심우장≫

등록번호: 사적 제550호 / 시대: 1933년

소재지: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로 29길 24

이 집은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분이자 <님의 침묵>의 시인인 만해 한용운(韓龍雲 1879~1944)이 1933년부터 1944년 숨을 거둘 때까지 살았던 집이다. 동쪽으로 난 대문으로 들어가면 북쪽으로 향한 기와집인 심우장과 관리동, 그리고 만해가 직접 심었다는 향나무 등이 있다. 심우장은 전체 규모가 5칸으로,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 온돌방, 오른쪽에 부엌이 있다. 부엌 뒤쪽에는 식사 준비를 하는 찬마루방이 있다.

 

한용운의 서재였던 온돌방에는 심우장(尋牛莊)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는데, 이 이름은 깨우침을 찾아 수행하는 과정을 소를 찾는 일에 비유한 불교 설화에서 따온 것이다. 심우장이 있는 성북동 일대는 1930년대 서울이 확장되면서 주거지로 개발되었는데, 이 집은 당시의 여느 집과는 다르게 검소하고 소박한 외향을 보여준다. 한용운은 조선 불교를 개혁하려고 했던 승려이자 조국의 독립에 힘쓴 독립운동가이며, 근대 문학에 큰 업적을 남긴 시인이었다. 

 

한용운이 말년을 보낸 심우장은 그의 이 같은 면모를 살필 수 있는 역사 현장으로 1985년  7월 5일 서울시 지정문화재 기념물 7호로, 2019년 4월 8일에 사적 제550호로 승격하여 지정되었다.   --현지 안내문--

 

심우장은 3.1운동 때 옥고를 치르고 나와 성북동 셋방에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승려 벽산 김적음이 자신이 초당을 지으려고 준비한 땅 52평을 내어주었다. 여기에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 등 몇몇 유지들의 도움으로 땅을 더 사서 집을 짓고 '심우장'이라 하였다. 심우장 안에는 <님의 침묵>을 비롯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으나 대부분 복제품이다.

 

 

<성북동 만해 한용운 심우장 대문 안팎>

 

 

<성북동 만해 한용운 심우장>

 

 

 

 

<성북동 만해 한용운 심우장 앞마당의 '사색의 공간'과 독립운동가 김동삼>

옆에 '심우장과 김동삼'에 대한 안내문이 세워져 있다. 일송 김동삼(1878~1937)은 만주 지방 항일 무장투쟁의 지도자로서 대한독립선언과 민족유일당 운동을 이끈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1931년 하얼빈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겪다 1937년 4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만해 한용운이 그의 주검을 수습하여 심우장에서 5일장을 치러주었다. 일제의 엄중한 감시 속에서 치러진 장례식에는 조헌영, 조지훈 부자도 참석하였다.  --현지 안내문--

 

 

<만해 한용운 심우장 옆 모습과 서재 앞에 걸린 심우장(尋牛莊) 현판>

 

 

<만해 한용운 심우장 서재의 심우장(尋牛莊) 현판>

한용운의 서재였던 온돌방에는 심우장(尋牛莊) 현판이 걸려있는데, 이 이름은 깨우침을 찾아 수행하는 과정을 소를 찾는 일에 비유한 불교 설화에서 따온 것이다. 

 

 

<만해 한용운 심우장 서재의 모습>

 

 

 

<만해 한용운 심우장 대청과 전시물들>

 

 

 

 

 

<뒷마당에서 본 심우장 대청(왼쪽), 앞마당과 부엌, 찬마루방(오른쪽)>

심우장은 특이하게 부엌 안에 음식을 준비하던 찬마루방이 있다. 

 

 

<만해 한용운 심우장 부엌과 찬마루방>

 

 

<만해 한용운 심우장 뒷뜰>

 

 

<만해 한용운 심우장 대문 쪽 옆모습>

만해 선생이 심었다는 향나무는 대문 안에 있는데 사진(정중앙에 위치)에서 가장 멀리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