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성북선잠박물관

큰누리 2023. 10. 25. 21:39

 

 

≪선잠제와  선잠단≫

<선잠을 모시다>
고대 사회에서는 농업과 잠업이 사회 발전의 주요한 밑거름이었다. 그래서 인간에게 처음 양잠을 가르친 서릉씨(西陵氏)를 선잠(先蠶)으로 받들어 제사를 지냈다. 삼국시대에 신라 왕실에서 누에치기를 권장한 기록이 있고, 고려시대에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선잠을 모시는 제사를 지냈다. 조선시대에는 선잠제가 더욱 중요하게 여겨져 꾸준히 시행되었으며 왕비가 직접 뽕잎을 따는 친잠의식도 행해졌다. 

<왕실의 뜻을 받들어 제사를 지내다>
조선시대에 왕과 왕비는 솔선수범하여 농업과 잠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한 해의 안정과 풍요를 기원하였다. 왕이 선농단에서 선농제를 지내는 것처럼 잠업의 풍요로움을 기원하며 잠업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주체는 왕비였다. 하지만 왕비는 선잠단까지 가지 못했고 신하들이 대신 왕이 하사한 축문과 향을 받들고 선잠단에서 제사를 치렀다. 이러한 방식을 섭사(攝祀)라고 한다. 

<선잠제의 장소 선잠단>
조선 초기부터 선잠단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태종실록」의 선잠단 규모에 대한 기록을 통래 알 수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선잠단, 동소문 밖 사한이(沙閑伊)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한이'는 성북동의 옛 이름이다. 이 외에 선잠단이 동교 또는 북교에 있었다는 기록도 보인다. 선잠단은 조선시대 500년 동안 그리고 지금까지 성북동 현재의 자리를 지켜왔다.

 

 

<성북선잠박물관>

 

 

<성북선잠박물관 관람시간 및 입장료>

▷ 관람시간 / 화요일~일요일 10:00~18:00(입장마감 17:30)

관람료 / 성인 1,000원(단체 800원), 청소년 500원(400원), 어린이 300원(200원), 유아 및 노인 무료

 

 

<성북선잠박물관 층별 배치>

 

 

<성북선잠박물관 1층(제1전시실)>

 

 

<성북동 명소들> 

 

 

<선잠제와 선잠단>

고대 사회에서는 농업과 잠업이 사회 발전의 주요한 밑거름이었다. 그래서 인간에게 처음 양잠을 가르친 서릉씨(西陵氏)를 선잠(先蠶)으로 받들어 제사를 지냈다. 삼국시대에 신라 왕실에서 누에치기를 권장한 기록이 있고, 고려시대에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선잠을 모시는 제사를 지냈다. 조선시대에는 선잠제가 더욱 중요하게 여겨져 꾸준히 시행되었으며 왕비가 직접 뽕잎을 따는 친잠의식도 행해졌다.   --현지 안내문 요약--  

 

 

<우라나라 비단의 흐름>

 

 

<선잠제의 장소 선잠단>

조선 초기부터 선잠단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태종실록」의 선잠단 규모에 대한 기록을 통래 알 수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선잠단, 동소문 밖 사한이(沙閑伊)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한이'는 성북동의 옛 이름이다. 이 외에 선잠단이 동교 또는 북교에 있었다는 기록도 보인다. 선잠단은 조선시대 500년 동안 그리고 지금까지 성북동 현재의 자리를 지켜왔다.   --현지 안내문 요약--

 

 

<누에 발육 과정>

나방을 낳고 - 알(누에씨)에서 개미누에 탄생 - 1령부터 5령까지 단계를 거치며 성장(령마다  잠을 잔다고 표현) - 익은 누에가 고치 짓기 - 고치 안에서 번데기가 되었다가 - 고치를 뚫고 새로운 나방이 됨

* 번데기가 고치를 뚫고 나오기 전에 고치를 풀어서 비단실의 원료를 만든다. 만약 때를 놓쳐 번데기가 고치를 뚫고 나오면 그 고치는 비단실로 사용할 수 없다.

 

 

<비단실로 수놓은 자수 방석>

국가무형문화재 제80호 초대자수장 한상수(1932~2016) 작.

1839년 고종이 세계에 한국을 알렸던 시카고 만국박람회 한국관에 출품된 자수 보료를 바탕으로 한상수 장인이 도안을  하고 수놓은 방석이다.

 

 

<성북선잠박물관 2층(제2전시실)>

 

 

 

<선잠단지에서 선잠제를 지내는 사람들 미니어처>

선잠제에 참여하는 사람은 제사를 주관하는 재관(齋官), 제사를 진행하는 제관(祭官), 음악을 지휘하는 관리, 음악을 연주(악공)하고 무용을 담당(일무)하는 공인(工人)으로 이루어진다. 첫번째와 세번째 사진은 선잠제 옆 모습이고, 두번째 사진은 선잠제 앞과 뒤에서 본 모습이다.

 

 

 

 

<왕비의 친잠례>

친잠례는 왕비가 직접 누에치기의 모범을 보여 양잠을 장려하기 위한 의식이다. 

 

 

<성북선잠박물관 3층 기획전시실 '2023 성북선잠박물관 소장품 특별전'>

마침 '2023 성북선잠박물관 소장품 특별전'이 열리는 중이었다. 직전에 경복궁의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조선왕실의 복식활옷 특별전 '활옷 만개'를 보았고, 이날 고려대 일민박물관의 조선시대 복식 등을 한꺼번에 보아서 조선시대 복장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성북선잠박물관 3층 기획전시실의 미니어처 전시물들>

두번째 사진은 미니어처 전시물 중 어린이 저고리와 가죽신이다.

 

 

 

<사진으로 보는 근, 현대의 양잠업>

우리나라에서 양잠은 농경과 더불어 중요한 생업이었기 때문에 양잠업이 꾸준히 발달해 왔다. 일제강점기에는 수탈의 대상이었고, 해방 이후에는 국가의 경제적 자립을 위해 적극적인 양잠 정책이 펼쳐졌다. 1960년대에 양잠업진흥정책으로 1970년대까지 이어졌던 양잠업 부흥기는 1980년대 이후 국내외의 다양한 사회·경제적 요인에 의해  급격히 감소되었다. 현대의 양잠업은 견직물의 생산보다 식품 산업에서 주목받고 있다.  --현지 안내문 요약--

 

 

<성북선잠박물관 3층 기획전시실의 '근대 저고리와 한복'>

어렸을 때는 가끔 삼회장 저고리나 반회장 저고리, 솜저고리 등을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해마다 유행에 따라 변하는 추세라 전통적인 저고리는 보기 쉽지 않다. 항라 치마 저고리나 화려한 어린이용 두루마기도 오랜만에 보았다.

 

 

<성북선잠박물관 3층 기획전시실의 근대 저고리들>

 

 

<상아색 삼회장 저고리, 연지색 박쥐 보문 저고리, 갖저고리(털저고리)>

 

 

<반회장 저고리들>

위부터 청록색 반회장 저고리, 옥색 반회장 솜저고리, 노란 반회장 솜저고리이다.

 

 

<클로버문 소색 저고리, 옥색 모본단 저고리, 생쪽색 솜저고리>

 

 

<연보라색 항라 저고리>

항라 저고리는 여름용 비단 옷감인 항라를 사용하여 만든 홑저고리이다.

 

 

<두루마기와 소색 남자 저고리>

이 전시회에서는 흰색을 특별히 소색(素色)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화려한 연지색 두루마기는 여성용인지 남성용인지 확인을 못했다.

 

 

<근대 한복의 조끼허리>

조끼허리는 치마나 바지의  말기 부분에 어깨에 걸칠 수 있는 조끼 형태로 만들어 앞뒤로 여며 입게 만든 것이다. '어깨허리'라고도 하는데 개항 이후 복식의 간소화가 논의되면서 한복의 불편함을 개선하고자 고안되었다. 1911년부터 이화학당에서 근무했던 선교사 월터(A.J.Walter)와 파이(O.F.Pye)가 처음으로 만들었다. 여성의 겉치마, 속치마, 속바지에 조끼허리를 달아서 착용하였고 아이들의 옷인 풍차바지나 두렁치마에도 달아서 여며 입었다.   --현지 안내문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