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2023. 성북동 길상사

큰누리 2024. 4. 17. 17:56

≪두 번째 들른 길상사≫

♣길상사 찾아가는 길 : 지하철 4호선 한성대 입구(삼선교)역에서 내려 6번 출구로 나간다. 주변에 만해 한용운 선생의 집 심우장, 수연산방, 이재준집 등의 한옥과 삼청각, 간송미술관 등이 있다. 2014년 5월에 성북지역에 답사하러 나와 길상사를 처음 들렀다. 당시 절의 설립자 김영한 여사(길상화)와 시인 백석의 사랑 이야기, 법정스님과의 인연으로 요정이었던 대원각을 절로 시주한 내용 등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다. 

만 10여년 만인 2023년 9월에 다시 답사차 들렀는데 절의 모습은 예전과 크게 달라진 점은 없지만 법정스님을 위한 진영각이 세워지고, 김영한 여사를 위한 사당이 새로 만들어진 점이 달랐다. 때마침 9월말이라 경내, 특히 적묵당과 길상화 사당 사이의 언덕배기에 상사화, 누린내풀, 참취 등의 꽃이 화사하게 핀 것도 이전과 많이 달랐는데 사람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경내의 숲과 꽃길 사이를 느긋하게 걸으며 모처럼 마음의 평화를 느꼈다. 

**2011년의 길상사에 관한 1차 글 성북동 길상사 (tistory.com)

 

 

당시 싯가 1천억대의 길상사를 시주한 공덕주 길상화(김영한)

김영한(법명 길상화)은 1916년에 태어나 1999년까지 살았다. 16세에 가난 때문에 결혼했으나 바로 남편이 자살하여 금하 하규일의 조선권번에 들어가 진향이라는 이름을 받고 기생이 되었다. 평양의 연회에서 만난 시인 백석과 눈이 맞아 '자야'라는 이름을 얻고 3년 동안 동거했으나 백석 부모님의 반대로 백석 혼자 만주로 갔고, 6.25 동란 때 백석이 북한을 선택함으로써 둘의 인연은 끝났다. 하지만 김영한은 죽을 때까지 혼자 살면서 백석을 그리워했고, 말년에 2억원을 백석장학금으로 기증했다. 1953년 중앙대학교 영문학과 졸업 후 몇편의 수필, 저서 등을 '자야'라는 필명으로 발간하기도 했다.

 

현재 길상사가 있는 배밭골 7,000여평을 사들여 운영하던 한식당은 제3공화국 때 국내 3대 요정의 하나인 대원각으로 바뀌었다. 말년에 법정스님이 쓴 <무소유>를 읽고 감명을 받아 대원각 시주를 청했으나 법정스님이 10년 간 사양하여 1995년에야 그 뜻을 이루었다. 1997년 대원각은 대법사를 거쳐 길상사로 바뀌었고, 같은 해 12월 14일에 김영한은 법정스님으로부터 염주 하나와 길상화라는 법명을 받았다. 1999년 11월 14일 김영한은 길상헌에서 숨을 거두었으며 유언대로 유골을 길상헌 뒤쪽 언덕에 뿌렸다. 길상사에서 그 자리에 공덕비를 세웠다가 최근에 길상화 사당도 만들었다. 매년 음력 10월 7일에 그녀의 뜻을 기리고 추모한다.

 

 

김영한이 사랑한 백석(백기행)

천재시인으로 불리며 평양에서 교사로 재직하던 당시 연회에서 김영한을 만나 3년 동안 동거했다. 부모의 반대로 김영한과 결혼하지 못하고 부모가 골라준 여인과 결혼했으나 가정에 정착하지 못했다. 김영한과 만주로 가려고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자 1939년에 혼자 떠났고, 6.25 전쟁 후 북한에 남았다. 북한 시인이라는 이유로 남한에서 작품의 출판이 금지되었다가 1987년에 작품이 소개된 후 재평가를 받고 있다.

 

 

≪1970년대 정계와 재계를 주름잡은 고급요정의 대명사 3대 요정≫

♣ 오진암 : 종로구 익선동에 있었던 조선 후기 화가 이병직의 집이었다. 마당에 오동나무가 있어서 梧珍庵으로 불렸으며 본채, 별채의 한옥이 아름다워 소궁궐로도 불렸다. 1953년 한정식집으로 개조되어 서울 음식점 1호 등록되었다.

중앙정보부장 이후락, 국회의원 김두한 등 정관계 인사의 단골집이었다. 1972년 중정부장 이후락과 북한 제2부수상 박성철이 7.4공동성명 사전 작업을 한 곳으로 유명하다. 2010년에 철거될 때 종로구에서 건축의 역사적 가치를 평가하여 자재를 거두어 부암동에 전통문화 공간 '무계원'으로 복원했다. 

 

♣ 삼청각 : 1972년 중정부장이던 이후락이 북한에 갔을 때 본 평양의 옥류관을 본떠 만든 접대전용 건물이다. 주 건물인 일화당을 비롯하여 청천당, 천추당, 취한당, 동백헌, 유하정 등 6채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三淸 도교의 신선이 머무는 太淸, 玉淸, 上淸 말한다.

남북적십자 회담이 열릴 때 이곳에서 북쪽 대표단을 접대했으며 나중에는 정치인들의 회동이나 외국 바이어의 접대 장소로 이용되었다. 현재는 세종문화회관이 운영하는 전통문화예술복합공간으로 바뀌어 공연, 체험교육, 전시, 국제회의, 기업 세미나, 전통혼례, 가족모임 등의 장소로 이용된다.

 

♣ 대원각 : 김영한이 북악산 자락 아래에서 운영하던 고급요정으로 밀실 정치를 대표하는 곳이었다. 1995년 법정스님에게 기증을 해서 1997년에 현재의 길상사가 되었다.

 

 

≪길상사≫

서울 성북구 성북동 삼각산(북악산) 남쪽 자락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이다. 고급 요정 '대원각'을 운영하던 김영한(법명 길상화)이 승려이자 수필가인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감명을 받아 1987년부터 10여년에 걸쳐 법정스님을 설득한 끝에 시주하였다. 1995년 6월 대한불교조계종 송광사의 말사 '대법사'로 등록하였다가 1987년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매년 5월에 봉축법회와 장애우, 결식아동, 해외의 아동, 탈북자 등을 위한 자선음악회를 개최한다. 길상사가 된 후 일부 건물은 개보수하였지만 대부분의 건물은 대원각 시절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경내에 일주문, 범종각, 관음보살 석상, 극락전, 지장전, 설법전, 진영각, 적묵당, 종무소, 길상화 공덕비와 사당 등이 있다.

 

 

≪길상사와 길상화 김영한, 법정스님≫

법정스님은 1997년 12월부터 2003년 12월까지 법회를 주석하다 2010년 3월 11일에 입적하였고 길상사를 시주한 김영한(길상화)은 1999년 11월 14일 길상헌에서 숨을 거두었다. 현재 길상사 경내에는 길상화 김영한을 위한 공덕비와 사당이 있고, 법정스님을 위한 진영각이 있다. 법정스님의 유골은 송광사 불일암과 이곳 길상사에 나눠 뿌린 듯하다. 

 

 

<길상사 일주문과 조감도>

 

 

<길상사 경내 이정표>

 

 

<길상사 주불전인 극락전>

아미타불을 모신 길상사의 본전이다. 극락전은 아미타전, 미타전, 무량수전으로 불리기도 한다. 아미타불은 정토신앙에서 가장 중시하는 부처로 무량수불, 무량광불로 불리기도 한다. 

 

 

 

<길상사 범종각>

 

 

<길상사 일주문 벽 부조, 길상7층보탑>

왼쪽의 부조는 일주문 오른쪽에 있는 벽의 부조인데 왼쪽에도 같은 크기의 부조가 있다. 오른쪽 사진은 설법전 아래에 있는 길상칠층보탑이다.  길상칠층보탑은 조선중기(1600~1650)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지혜와 용맹을 상징하는 4마리의 암수 사자가 기둥 역할을 하며 입을 연 두 마리는 교(敎)를 상징하고, 입을 다문 두 마리는 선(禪)을 상징한다. 4사자 가운데 모셔진 석가모니 부처님의 수인은 정면에서 시계방향으로 선정인(禪定印),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통인(通印), 전법륜인(轉法輪印)을 하고 있다. 

이탑은 영안모자 백성학 회장이 법정스님과 길상화보살의 고귀한 뜻을 기리고, 종교화합의 의미를 전하고자 무상으로 기증하였으며 2012년 11월 11일 기단부에 오강경, 금강저, 오불, 108침향염주, 다라니 등을 봉안하였다. 이후 시절 인연으로 미얀마의 제1보궁 우뚜리와 완사 큰스님이 1,600년 전 고탑 해체 과정에서 직접 출토한 부처님 오색정골사리, 구강사리, 용혈사리와 제자인 목건련존자, 마하가섭존자, 라훌라존자 등의 사리를 2013년 8월 25일에 탑신부에 봉안하였다.

 

 

<길상사 설법전 아래의 불상들>

왼쪽은 최종태 작가의 관세음보살상, 오른쪽은 마애불이다. 관세음보살상은 천주교 신자인 최종태 교수가 종교 간의 화합을 기원하며 제작했다고 한다. 같은 작가의 작품인 혜화동 천주교회의 그리스도상과 닮은꼴이다.

 

 

<길상사 설법전> 

대규모의 설법이 이뤄지는 전각으로 석가모니불이 주불로 모셔져 있다.

 

 

<범종각에서 본 길상사 극락전>

 

 

<길상사 설법전 위쪽의 송월각> 

 

 

<길상사 극락전 뒷모습(왼쪽)과 적묵당(오른쪽 원경)> 

 

 

<길상사 적묵당과 탑, 길상선원>

길상선원은 재가자들을 위한 시민 선원으로 선원장 스님으로부터 1년 내내 참선을 받는 좌선방이라고 한다. 길상선원 앞에 적묵당이 있다. 이전에 요정이었던 곳이라 전각의 배치가 일반 사찰과 많이 다르다.

 

 

≪법정 스님(比丘 法頂)≫

1932~2010, 전라남도 해남 출생. 한국전쟁의 비극을 경험하고 인간의 선(善)의지와 진리의 길을 찾아 1956년 효봉 학눌(曉峰 學訥)의 문하로 출가하여 수행자의 기초를 다진 후, 해인사 전문강원에서 대교과를 졸업하고 쌍계사, 해인사, 송광사 등 선원에서 수선안거했다. 1960년부터 1970년대 초까지 불교사전 편찬, 불교경전 역경에 헌신하였으며 1975년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佛日庵)을 짓고 수행했다. 하지만 세상에 명성이 알려지자 1992년 아무도 거처를 모르는 강원도 산골 오두막에서 홀로 청빈과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였다.

1994년 시민모임 「맑고 향기롭게」를 창립하여 이끌었고, 무소유 사상에 감동한 김영한 여사가 성북동의 대원각(大苑閣)을 무주상보시하여 1997년 길상사(吉祥寺)를 창건하였다.  2010년 3월 11일 법랍 55세, 세수 78세로 길상사 행지실에서 입적하였다. 저서 및 역서로는 <무소유>, <버리고 떠나기>, <물소리 바람소리, <화엄경>, <숫타니파타> 등이 있다. 

* PS : 법정스님의 유언에 따라 그의 저서는 사후 절판된 것으로 안다. 젊은 시절에 열심히 읽었는데...

 

 

<법정스님을 위한 진영각>

진영각은 2014년에 들렀을 당시에는 '스님들의 처소이니 출입을 삼가해 달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은 진영각이라는 이름으로 법정스님의 진영(초상화)과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법정스님의 유골의 일부도 이곳 뜰에 모셨다고 한다. 송광사 불일암 후박나무 아래에 유골을 뿌린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곳에도 나눠 뿌린 듯하다. 

 

 

<길상사 진영각, 마루의 안내문과 내부 전시실>

내부는 촬영금지라 밖에서 줌으로 한 컷...

 

 

<'법정스님 유골 모신 곳' 주변의 피나물(동의나물)꽃과 용담꽃>

 

 

<길상사 진영각 아랫길의 침묵의 집과 육바라밀채>

왼쪽은 수행장소인 침묵의 집, 오른쪽의 바라크 같은 작은 건물 6채는 스님들의 초소인 육바라밀채이다. 육바라밀채는 2014년에는 송월각, 능인당, 죽림당, 반야당, 옥화당 등의 이름이 있었는데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다. 언덕의 높고 외진 곳에 있는 육바라밀채는 대통령이나 요인들이 드나들던 요정일 당시 경호원들의 초소였을 듯...

 

 

<길상사 적묵당 아래의 상사화와 꽃들>

길상사에서 이렇게 화사한 꽃들을 만나리라고는 전혀 상상을 못했는데 언덕배기에 촘촘하고 소담스럽게 자리한 빨간 꽃무릇(첫째 단), 보라색 누린내풀꽃(둘째 단)과 한라돌쩌귀꽃(네째 단), 하얀 참나물꽃(세째 단)이 너무 아름다웠다. 

 

 

<적묵당 아래, 길상헌 위쪽의 길상화(김영한) 공덕비와 사당>

2014년에는 윗사진의 다리 건너편에 길상화 김영한의 유골을 뿌렸고 그 자리에 공덕비만 있었다. 현재 공덕비 위에 길상화 사당을 새로 지었고 안에 김영한의 초상화를 안치했다. 그녀의 마지막 삶처럼 조촐하고 단아하다. 

 

 

<어른스님의 처소인 길상헌>

사찰 안 계곡 건너편에 있는 아담하고 운치있는 전각이다. 이곳에서 공덕주 김영한(길상화)이 숨을 거두었고 유골을 뒤편 언덕에 뿌렸다. 그래서 뒤쪽에 길상화 공덕비와 사당이 있다. 법정스님도 이곳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길상헌 입구 다리에서 본 길상화(김영한) 사당과 공덕비>

 

 

<길상사 적묵당(왼쪽)과 침묵의 집(오른쪽)>

침묵의 집은 누구에게나 열린 명상의 공간이라고 한다.

 

 

<길상사 주불전인 극락전 옆모습>

 

 

<길상사의 불상들>

왼쪽은 극락전 아래에, 오른쪽은 길상화 사당 입구 계곡에 있는 불상이다.

 

 

<길상사 설법전 아래의 보리수와 극락전 아래의 등나무> 

 

 

<길상사의 꽃들>

윗단은 길상선원 앞의 이삭여뀌와 극락전의 층꽃나무, 아랫단은 극락전의 해국이다.

 

 

<현대화된 길상사 해우소(정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