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 무장현 관아와 읍성 관람≫
'고창 무장현 관아와 읍성'은 고창 여행지 중 선운사, 운곡 람사르습지와 함께 이곳이 포함되어 있었다. 처음 듣는 성이지만 흥미로워서 꽤 기대가 되었다. 그런데 고속도로가 막혀 선운사부터 입장시각이 늦어졌고, 그 때문에 다음 코스인 운곡 람사르습지 생태공원으로 들어가는 수달열차를 놓쳤다. 다른 프로그램은 정상 진행이 되었지만 다음 수달열차를 타는 통에 마지막 코스인 무장읍성은 1시간이 늦어져서 30분만에 100m 달리기 하듯 보아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래도 짧은 시간 안에 뛰면서 정말 열심히 보았다!
처음 본 무장읍성(무장현 관아와 읍성)은 규모가 비슷해서 그런지 서산 해미읍성이 연상되었다. 가장 큰 차이점은 해미읍성은 복원이 끝난 상태이고, 무장읍성은 아직 진행 중인 점이라고 생각했다. 이름도 다른 읍성과 달리 '관아'란 명칭이 따로 붙었는데 남아있는 읍성 중 관아의 상태가 가장 좋았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규모도 상당히 커서 전주의 객사 본채가 연상될 정도였다. 고창은 무장읍성보다 고창읍성이 더 유명하고, 고창읍성도 사적 11개에 포함이 되어 있다. 곡창지대에 해안지역이라 왜구들이 더 많이 침범해서 읍성이 2개나 되는 게 아닌가 싶다.
고창 무장읍성을 검색하면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에 '고창 무장현 관아와 읍성'으로 뜬다. 검색한 결과 '읍성'은 총 33개였고, 부속문화재까지 포함하면 총 44건이었다. 읍성은 '해미읍성, 낙안읍성' 정도만 들렀는데 우리나라에 그렇게 많은 읍성이 있는지 몰랐다!
비교적 규모가 작은 읍성 외에 서울성곽(한양도성)이나 남한산성 같은 국가차원의 거대한 성과 고대의 성터까지 추가하면 성은 또 늘어난다. 되짚어보니 역사를 통틀어 침략만 당한 민족이니 당연한 결과이다. 이런 걸 찾아보는 게 취미라 이번 기회에 지정별로 정리해 보았다. 덕분에 앞으로 돌아다닐 주제 하나가 더 추가되었다^^.
≪조선시대 관아의 구조≫
조선시대 지방 수령이 거주하면서 정무를 본 관아(관청)은 부여, 제주도, 이 곳 무장현 등 몇 곳을 둘러보았지만 제대로 남아 있는 곳은 없다. 관아로 알려진 곳도 대체로 정무를 보던 관아 1동만 복원되고 내아 등 나머지 부속건물들은 빈 공간으로 남아 있어서 현재의 도청이나 군청에 거주지까지 포함된 관아의 규모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런데 안동 선성현 문화단지의 조선시대 관청은 거의 완벽하게 재현해서 관아를 이해하는데 가장 큰 도움이 되었다.
**안동 선성현 문화단지(조선시대 관청 배치도) (tistory.com)
≪우리나라의 읍성과 부속 문화재≫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에서 검색하여 요약--
구분 (갯수) | 명칭 |
사적(11) | 경주읍성, 서산 해미읍성, 고창읍성, 울주 언양읍성, 홍성 홍주읍성, 남원읍성, 순천 낙양읍성, 나주읍성, 고창 무장현 관아와 읍성, 포항 장기읍성, 하동읍성 |
국가민속문화재(9) | 순천 낙안읍성 이방댁, 순천 낙안읍성 들마루집, 순천 낙안읍성 뙤창집, 순천 낙안읍성 마루방집, 순천 낙안읍성 대나무 서까래집, 순천 낙안읍성 ㄱ자집, 순천 낙안읍성 주막집, 순천 낙안읍성 서문성벽집, 순천 낙안읍성 향리집 |
기념물(18) | 경기도(2) : 수원 고읍성, 안성읍성 및 관아지 충청남도(5) : 남포읍성, 당진 면천읍성, 홍성 결성읍성, 서산 해미읍성 회화나무, 태안읍성 전라남도(3) : 홍양현읍성, 강진읍성, 낙안읍성 노거수 경상남도(4) : 창원 웅천읍성, 창녕 영산읍성지, 사천읍성, 밀양읍성 경상북도(1) : 청도읍성 부산광역시(2) : 동래읍성지, 기장읍성 인천광역시(1) : 교동읍성 |
문화재자료(6) | 광주광역시(1) : 광주읍성유허 경상남도(1) : 고성읍성 충청남도(3) : 서천읍성, 비인읍성, 한산읍성 전라남도(1) : 진도읍성 |
≪고창 무장현 관아와 읍성(高敞 茂長縣 官衙와 邑城)≫
면적 : 129.349㎡
지정 : 대한민국 사적 제346호 (1991. 2. 26.)
소재지 : 전북 고창군 무장면 성내리 149-1번지 외
고창 무장읍성(高敞 茂長邑城)은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에 있는 조선시대의 성이다. 태종 17년(1417년) 무장진의 병마사 김노(金蘆)가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백성과 승려 등 2만여 명을 동원하여 2월부터 5월까지 4개월 동안 축조했다고 전한다. 성의 둘레는 1,400m, 넓이는 43.847평, 높이는 약 2m의 평지성이다. 무장읍성(茂長邑城)이란 명칭은 무송현과 장사현의 앞 자를 딴 것이다. 원래 토성으로 알려졌으나 복원공사 중 성벽 동쪽 끝부분의 단면이 드러나면서 성곽 일부가 돌과 흙을 섞어서 축조된 토성과 석성의 혼합 읍성인 것이 밝혀졌다.
무장읍성은 남문과 동문 2개의 성문이 있는데 남문인 진무루(鎭茂樓)는 앞면 3칸, 옆면 2칸의 2층 건물이며, 동문 터도 잘 남아 있다. 성 주위를 둘러싼 물길인 해자는 폭 4m, 길이 574m 정도로 흔적만 남아 있다. 성 안의 건물로는 객사, 동헌이 있고, 주변에 많은 유구가 남아 있다. 2018년 11월 15일, 호남문화재연구원의 발굴조사 때 11점의 비격진천뢰가 발견되었다. 무장읍성은 조선시대 옛 읍성의 모습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고창 무장읍성 남문(鎭茂樓)>
적이 침입하기 어려운 옹성 구조이다.
<무장읍성 남문(鎭茂樓) 아래의 동학농민혁명군 진격로>
무장읍성 동헌은 동학농민운동 당시에 동학농민군에 의해 점령 당했다고 하니 무장읍성은 동학농민군 활동의 주 무대 중 하나였던 것 같다. 일제 때에는 초등학교로 사용되었다.
<무장읍성 남문(鎭茂樓) 옆 성벽과 해자 터>
성벽 오른쪽 아래 잔디에 두 줄로 표시된 부분이 해자 터이다.
<옹성 구조로 된 무장읍성 남문(鎭茂樓)>
<성 안에서 본 무장읍성 남문(鎭茂樓)>
<고창 무장객사(茂長客舍) 송사지관(松沙之館)>
고창 무장객사(茂長客舍)는 중앙에 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신 정청과 그 좌우에 공무로 찾아온 관리들의 숙소인 익헌으로 구성되었으며, 중앙의 정청이 좌우의 익헌보다 한 칸 앞으로 돌출되었다. 지붕 구조는 정청이 '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이고, 좌우 익헌은 '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전체적으로는 솟을지붕 모양이다. 정청을 수리할 때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이 객사는 인조 27년(1649)에 다시 세워졌다. 1936년부터 1987년까지 면사무소로 사용하면서 일부 고쳤다가, 1990년에 원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객사 정청에는 송사지관(松沙之館)이라고 쓰인 현판이 있다. 조선 태종 17년(1417)에 무송현(茂松縣)과 장사현(長沙縣)을 합치면서 각각 앞 글자를 따서 지명을 무장(茂長)이라 했다. 송사(松沙)는 각각 뒷 글자를 따서 무장을 달리 표현한 것이다.
무장객사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객사와 기단이 원형대로 잘 남아 있는 유적이다. 객사 건물의 석축 기단을 오르내리는 양쪽 난간에는 호랑이, 구름 등을 새겼다. 기단 양 옆의 모서리 돌에도 연꽃과 화병 그림을 새겼는데 이 모서리 돌은 무장객사를 지을 때 사찰의 기단석을 철거해 재사용한 것이다. (현지 안내문)
객사는 매달 초하루와 보름, 명절,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 왕(전패)을 향해 예를 올리는 장소였기 때문에 관아 중 가장 격이 높은 건물이다. 요즘으로 치면 영빈관급의 특급 호텔이다.
<무장객사(茂長客舍) 기단 양 옆 모서리 돌의 연꽃과 화병 그림>
기단 양 옆의 모서리 돌에 새겨진 연꽃과 화병 그림은 무장객사를 지을 때 사찰의 기단석을 철거해 재사용한 것이다. 이는 성리학을 숭상하고 불교를 억압하던 조선시대 정책을 보여준다.
<고창 무장객사(茂長客舍) 송사지관(松沙之館)의 옆, 뒷 모습>
정청의 사람 인(人)자형 맞배지붕과 익헌의 여덟 팔(八)자형 팔작지붕을 비교할 수 있고, 정청의 앞뒤로 튀어나온 정도도 확인할 수 있다.
<고창 무장객사(茂長客舍) 옆의 송덕비들>
송덕비는 선정을 편 원님이나 공덕이 있는 분들을 기리는 비이다. 송덕비는 대개 원님이 떠난 뒤에 백성들이 공덕을 잊지 못해 세우기 때문에 거사비(去思碑), 혹은 불망비(不忘碑)라고도 한다. 이곳의 비는 각처에 흩어져 있던 것을 모아 놓은 것으로 <읍지관안>에는 立碑라 쓰인 원님이 34명이나 되지만 현재 11기만 남아 있다.
동치오년(1866)이라 한 비는 고종 10년 병인년에 당시 환곡의 폐단을 개정하는 조목을 정해 놓은 것으로, 좌대가 오목하게 파인 것은 아낙네들이 접시를 켜고 치성을 드린 흔적이라고 한다. 제목이 안 보이는 비는 글자가 많이 삭아 또렷하진 않지만 정준일 현감의 치수(治水) 공덕을 기리어 후임인 정권이 영조 신유년(1741)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현감비 거북머리를 비틀어 놓은 것은 백성들이 비를 세워주면서 미워서 일부러 그랬다고 한다. 쇠로 만든 철비는 조선조 후기의 몇 개 안 남은 귀중한 문화유산이며 읍지에 김유희 현감비도 철비라고 적혀 있는데 일제강점기때 군수용으로 뽑아간 듯하다. (현지 안내문을 정리)
함양 상림에 이어 아주 많은 송덕비를 보았는데 유감스럽게 30분 동안 읍성을 모두 보아야 하는 상황이라 사진촬영조차 못했다. 촬영이라도 했더라면 판독이라도 시도해 볼 텐데 아쉽다!
<무장읍성의 무장동헌(취백당, 翠白堂)>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35호.
동헌(東軒)은 조선시대의 수령이 정무를 보던 관아의 중심 건물로 이곳은 1914년 고창군으로 통합되기 전까지 무장현 동헌으로 사용되었다. 무장동헌은 조선 명종 20년(1565)에 건립되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군 무장수비보병대 사무실로, 광복 후 무장초등학교 교실로 사용되는 등 우리민족의 아픈 역사를 대변해 주는 건물이기도 하다. 현재의 모습은 담을 헐고 벽을 붙이는 등 많이 변형되었던 것을 1989년 고증을 거쳐 원형대로 복원한 것이다. 또한 발굴조사 결과를 토대로 2014년에 삼문과 담장을 복원하였다.
고지도와 문헌 자료에 의하면 동헌 경역 내에는 취백당(翠白堂) 외에 수령의 가족이 거처하던 내아(內衙), 책을 보관하던 책방(冊房), 휴게 정자인 육양정(六陽亭) 등 4동의 건물이 함께 있었던 걸로 보여진다. 동헌의 당호인 '취백당'의 취(翠)는 소나무처럼 푸른 기상을, 백(白)은 모래알처럼 희고 결백한 정조를 상징한다. 이곳에서 정무를 보던 현감들이 청렴하기를 바라는 염원이 담겨있다.
<무장읍성 동쪽 성벽>
<동북쪽 성벽 아래에서 본 무장읍성>
왼쪽에 동문이, 오른쪽에 무장동헌이 있다. 약간 오른쪽의 언덕 위에는 그 앞에서 훈련을 하던 병사들을 지휘하거나 지켜보던 읍취루가 있고 그 옆에 객사가 있다. 왼쪽 바닥의 기단들은 백성들에게 걷은 세금인 환곡을 보관하던 사창(社倉) 터이다. 이 위치에서 현재 남아있는 유적만으로 보면 동문- 사창 터- 훈련장- 연지- 읍취루- 객사- 남문- 동헌의 구조이다.
<백성들에게 걷은 세금(환곡)을 보관하던 사창(社倉) 터>
<무장읍성 동문>
상식적으로 문에는 누각이 있기 마련인데 없어서 복원이 끝난 상태인지 진행 중인지 모르겠다. 남문처럼 옹성 형태이다.
<무장읍성 동문과 동쪽 성벽>
<동쪽과 동남쪽 성벽 위에서 본 무장읍성>
<동쪽 성벽에서 본 무장읍성 동쪽과 남쪽 성벽>
<무장읍성 연지와 읍취루(挹翠樓)>
연지 앞 공간에서 훈련하는 병사들을 읍취루(挹翠樓)에서 지켜보았다고 한다. 하지만 앞의 대형 연못으로 보아 병사들을 지켜보거나 지휘하는 목적보다 연회용 건물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뒤에서 본 무장읍성 읍취루(挹翠樓)와 읍취루에서 본 연지>
<나오면서 본 무장읍성 남문 진무루(鎭茂樓)>
와, 살면서 이렇게 30분만에 (그래도 성인데) 성을 훑어본 것은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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