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

아산 외암마을

큰누리 2023. 12. 15. 03:21

 

 

≪아산 외암(外岩)마을≫

외암마을의 집은 대개 남향 또는 서남향으로 배치되어 일조량이 많으며 겨울에는 서북 계절풍을 막아주는 좋은 기후 환경 때문에 일찍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 이 마을에는 원래 여러 성씨가 살고 있었는데 조선 명종(1545~1567) 때 예안 이씨 이사종이 세 딸만 둔 진한평의 첫째 사위가 되어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그의 후손들이 번창하게 되었고, 그 후손 중에서 많은 인재가 배출되자 차츰 예안 이씨를 중심으로 하는 동족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 

 

조선 경종3년(1723)에 이간(李柬) 선생이 쓴 <외암기(巍巖記)>에 마을 이름을 '외암(巍巖)'으로 기록한 사실이 있으며 일제 때부터 획수가 적은 외암(外岩)으로 쓰기 시작하였다. 이 마을에는 충청지방의 양반집과 초가가 어우러지고 집집마다 돌담으로 둘러져 있으며, 북쪽의 설화산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은 수로를 따라 마을 안을 흐르면서 정원을 꾸미거나 생활용수로 이용되고, 유실수와 화목군 등 수림과 어울려 아름다운 경관을 보여준다. 

 

정월 보름을 전후하여 느티나무제와 장승제를 지내며, 매년 10월에는 전통문화(관·혼·상·제)와 농경문화, 민속놀이 등을 체험할 수 있는 짚풀문화제가 열린다. 이 마을은 역사와 자연환경이 잘 보존되어 있고 충청지방의 전통적인 살림집 모습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는 민족문화의 보고라 할 수 있다.   (현지 안내문)

 

 

<아산 외암마을 종합안내도와 관람요금표>

외암마을은 입구에 주차장이 2개 있고, 아래 안내도 ②홍보관 맞은편의 개울 옆 주차장에서 내려 ⑤관광안내소에서 입장권을 산 후 다리를 건너 마을로 입장했다.

 

관람은 왼쪽의 개울을 따라 ④물레방아, ③관리사무소, ②홍보관을 지나 ①외암민속관을 먼저 보는 것이 좋다. 외암홍보관과 외암민속관 사이에 상류층 가옥, 중류층 가옥, 서민층 가옥 2채 등 마을 가옥을 대표하는 계층별 가옥 모델이 실제 크기로 지어져 있어 외암마을의 가옥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외암마을은 현재 60여 가구가 거주한다고 한다.

 

 

 

<주차장쪽에서 본 아산 외암마을과 다리의 짚눌>

이 위치에서 외암마을은 중앙의 나무 뒤로 보이는 가옥 몇 채를 제외하고 보이지 않는다. 앞 왼쪽에 보이는 작은 초가는 물레방아이고 그 앞길로 들어서면 홍보관, 계층별 가옥 모델들이 있다. 돌다리 양쪽 난간에 씌운 볏집 덮개들이 독특한데 돌이 얼까봐 씌웠을 리 없고, 용도가 무엇일까? 10월에 열린다는 짚풀문화제의 흔적이 아닐까?

 

 

 

<아산 외암마을 입구의 장승>

 

 

<아산 외암마을의 물레방아와 디딜방아>

마을 안내도에는 물레방아, 디딜방아, 연자방아가 각각 다른 장소에 있는데 마을 입구(다리 건너편)에 있는 물레방아와 감찰댁 뒤에 있는 디딜방아만 확인했다.   

 

 

<외암마을 외암민속관의 계층별 가옥 명칭 및 배치도>

아산 외암마을은 충청지방 고유의 전통을 간직한 반가와 초가, 돌담, 정원이 보존되어 있지만 사람이 살고 있기 때문에 주민의 사생활 보호를 위해 가옥 공개를 할 수 없어 대신 건립한 것이라고 한다. 관람하는 입장에서도 부담없이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어서 아주 좋았다.

 

 

<외암마을 외암민속관, 상류층 가옥>

 

 

<외암마을 외암민속관, 상류층 가옥 문간채의 부엌과 방>

 

 

<외암마을 외암민속관, 상류층 가옥 문간채와 사랑채>

 

 

<외암마을 외암민속관, 상류층 가옥 사랑채>

사랑채는 대문을 들어서면 접하는 건물로 방과 마루로 구성되는 남자들의 생활공간이다. 남자들은 어려서부터 이곳에서 생활하며 글을 익히고 손님을 맞는 예절을 배우게 된다.

 

 

<외암마을 외암민속관, 상류층 가옥 사랑채 측면과 사당>

이 가옥의 사당은 사랑채 뒤쪽에 있다. 사당(祠堂, 位牌堂)은 조상의 신주(위패)를 모시는 곳으로 가묘(家廟)라고도 한다. 사당에는 4대 조상(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고조부모)의 신주를 봉안하는데, 사당이 없을 경우 사랑 대청 한쪽 벽에 감실을 만들어 조상의 신주를 모시기도 한다.

 

 

<외암마을 외암민속관, 상류층 가옥 연못>

이곳을 제외하고는 직접 확인이 어려웠지만 안내문으로 보아 외암마을의 상류층 가옥에는 대체로 연못이 있는 듯했다.

 

 

<외암마을 외암민속관, 상류층 가옥 안채>

윗 사진은 곳간채(왼쪽), 안채 부엌과 옆면이고, 아래 사진은 정면에서 본 안채이다. 안채는 가옥 내에서 가장 안쪽에 있는 건물로 외부인의 출입이 쉽게 허용되지 않고, 밖에서 내부공간이 들여다 보이지 않도록 구분된 곳으로 집안 여자들의 생활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안방에는 시어머니가 건넌방에는 며느리가 거주하면서 집안 살림살이의 대물림이 이루어진다.

 

 

 

<외암마을 외암민속관, 상류층 가옥 마당의 전통혼례 체험장소>

 

 

<외암마을 외암민속관, 상류층 가옥 안채 부엌과 안방>

 

 

<외암마을 외암민속관, 상류층 가옥 안채쪽에서 본 모습>

왼쪽은 안채, 중앙은 사랑채, 오른쪽은 곳간채이다. 안채 뒤에 장독대가 있다.

 

 

<외암마을 외암민속관, 중류층 가옥>

옆에서 본 중류층 가옥으로 대문은 왼쪽 문간채에 있다. 왼쪽부터 문간채, 곳간채, 안채이다.

 

 

<외암 이간선생 묘로 가며 본 상류층 가옥과 중류층 가옥>

왼쪽은 상류층 가옥, 오른쪽은 중류층 가옥의 안채 뒷면이다.

 

 

<외암마을 외암 이간선생 묘>

외암 이간(李柬) 선생(숙종 3년, 1677~1727)은 아산시 송악면 외암마을에서 태어난 조선후기의 문신이며 학자로, 자는 公擧, 호는 외암(巍巖) 또는 추월헌(秋月軒)이며, 시호는 문정(文正), 본관은 예안(禮安)이다. 선생은 과거를 본 적은 없으나, 숙종36년(1710) 33세 되던 해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장릉 참봉을 제수 받은 후 회덕현감, 경연관 등을 지냈지만 관직에 뜻을 두기 보다 학문에 정진하였다. 

 

선생은 수암 권상하(遂庵 權尙夏) 선생에게 사사하여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의 으뜸으로 일컬어졌으며, 율곡-사계-우암-수암-외암으로 이어지는 기호사림의 중심계열을 이루는 성리학자이다. 정조는 선생의 학덕을 기려 이조참판과 성균관제주를 증직하였고 순조는 이조판서를 증직하고 문정이라는 시호를 하사했다. 

 

숙종 33년(1707)에 광덕산 기슭에 관선재를 건립하고 후학에게 유학을 강론하였고 저서로는 「외암유고(巍巖遺稿)」가 있으며 「외암문집목판(巍巖文集木板)」 307매가 현존한다. 외암마을에 있는 사당에서는 매년 3월에 불천위 제사를, 강당골 문천사에서는 유림과 후손이 세일제를 지내고 있으며, 외암마을 입구에 신도비가 현존한다.   (현지 안내문)

 

 

<외암마을 외암 이간 선생 묘 앞의 소달구지와 정자>

 

 

<외암마을 마애불들>

 

 

<외암마을 농촌체험 민박집>

 

 

<외암마을 나무 놀이기구(통나무다리)>

 

 

<외암마을의 초가들> 

 

 

<외암마을의 돌담들> 

 

 

<외암마을 카페 겸 전통찻집>

 

 

<외암마을 교수댁, 솟을대문과 무너진 담장 너머로 본 집안>

교수댁은 조선시대 말에 무과에 급제한 후 성균관 대사성, 명성황후 혼전향관, 탁지부 협판, 궁내부 특진관 등을 지냈고,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한 퇴암 이성렬(1888~1913)이 살던 집이다. 훗날 성균관 교수를 지낸 이용구(1854~?)가 이 집에서 살았다고 해서 '교수댁'으로 불린다. 원래 사랑채, 안채, 행랑채, 별채가 있었으나 지금은 안채와 행랑채, 사당만 남아 있다. 사랑채가 없어지긴 했지만 이 집도 마을의 다른 집처럼 '」'자 모양의 사랑채를 두고 뒤쪽에 '「'자 모양의 안채를 둔 'ㅁ'자 모양의 집이다.

 

교수댁의 정원은 건재고택, 송화댁과 함께 외암마을을 대표한다. 정원의 크기는 두 고택보다 작지만, 다른 지방의 양반댁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설화산에서 흘러들어온 수로를 마당으로 끌어들여 휘몰아 나가게 하는 연못을 만들었으며,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목을 정원수로 삼아 자연친화적인 요소를 강조하였다.   (현지 안내문 요약)

 

 

<외암마을 초가와 돌담길들>

 

 

 

<외암마을 아산건재고택>

지정 : 국가민속문화유산

지정 연월일 : 1998. 1. 5.

재료 : 목조

시대 : 조선 후기

아산 건재고택은 조선 숙종 때 성리학자이자 문신인 외암 이간(巍巖 李柬, 1677~1727)이 태어난 곳으로 알려진 집이다. 현재의 집은 후손인 건재 이상익(建齋 李相翼)이 고종 6년(1869)에 지었다고 한다. 고택은 설화산 남서쪽 자락의 지형을 살려 건물을 배치하면서 계곡물을 끌어들여 수로와 연못을 만들고 불을 끄는 방화수로도 이용한 점이 돋보인다. 

 

남서향으로 자리 잡은 고택은 문간채, 사랑채, 안채를 중심으로 오른쪽에 광채와 가묘(사당), 왼쪽에 곳간채가 있다. 고택은 돌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담장 일부에는 기와가 올려져 있다. 담장 밖에는 하인들이 머물던 초가로 된 가람집이 있다. 중략... 건재고택의 정원양식은 부분적으로 일본식 정원기법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현지 안내문)

 

주변이 평지인데다 담장이 높아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고택의 구조를 전혀 알 수 없다. 대신 하루에 2회(동절기의 경우 19:30~11:20, 14:00~15:30) 개방한다. 나는 시간을 못 맞추었기 때문에 문앞의 안내문을 보고 가늠한 결과 마을 입구에 있던 외암마을 외암민속관의 상류층 가옥과 구조가 거의 비슷했다. 건재고택을 모델로 류층 가옥을 재현한 듯하다.

 

 

<외암마을 감찰댁>

감찰댁은 조선 후기에 지어진 목조 주택으로 택호는 옛 주인의 관직에서 따온 것으로 추측한다. 안채의 중앙에 있는 앞면 3칸, 옆면 2칸의 대청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방, 서쪽에는 마루방을 두었고, 아래쪽으로 안방에 이어 부엌과 작은방을 배치하였다. 

안채의 동쪽 뒤편에는 가묘(사당)가 있고 동쪽에는 대나무 숲이 있으며, 그 앞으로 정원, 정자, 작은 연못이 있다. 사랑채문간채는 오래전에 훼손된 것을 옛 문헌을 참고하여 최근에 복원하였다.

 

 

<외암마을 초가와 사립문>

 

 

<외암마을 보호수(느티나무)>

높이 21m, 나무둘레 170cm, 수령 600년인 느티나무인데 아래 줄기의 훼손이 심하다.

 

 

<입구의 돌다리 쪽에서 본 외암마을>

 

 

<외암마을 앞 들판과 짚더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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