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장면박물관의 전신 인천 선린동 공화춘(共和春)≫
국가등록문화재 제246호.
공화춘의 전신은 산동회관으로 중국인 전용 거주지인 청국 조계지에서 음식점과 호텔의 혼합형 숙식업소로 시작하였다. 1911년 산동성 출신의 화교 우희광(于希光)이 지금의 위치로 이전하여 개업하였다가 이듬해 중화민국의 수립을 기념하여 '공화국의 봄'이라는 의미로 공화춘으로 개명하였다. 일제강점기 이래 인천과 서울의 상류층들이 이용하는 경인지역 최고급 요리점으로 70여 년간 그 명성을 이어왔고, 6.25전쟁 이후에는 짜장면 등 대중음식을 보급하였다.
공화춘은 화강암 석축 위에 벽돌을 쌓아 올린 2층 벽돌조 건물로 화교의 생활 모습을 보여주는 근대문화유산이다. 연안부두 신축으로 인천역 일대 상가가 쇠락하면서 1983년 영업을 중단하였고, 2012년부터 짜장면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인천차이나타운의 짜장면박물관>
<짜장면박물관 전신 공화춘(共和春)의 원래 모습 모형>
아래 사진은 팔찌식으로 된 짜장면박물관 입장권이다.
<짜장면박물관 전시실들, 관람시간 및 휴관일, 입장요금>
<짜장면박물관 주변의 전시장 및 관광 시설들>
짜장면박물관이 있는 인천 차이나타운 주변에는 근대문화와 관련된 청나라와 일본의 유산이나 유적, 송월동 벽화마을, 인천 개항 관련 건물이나 전시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다.
<짜장면박물관 내부의 원래 공화춘 간판>
현재 짜장면박물관 입구에 이 간판들을 재현한 모조품이 걸려있다.
<짜장면박물관 2층 전시실>
안내하는 분들이 입구에서 2층부터 관람하도록 안내한다. 2층은 짜장면이나 공화춘, 중국 화교들의 생활 등 일반적인 짜장면의 역사에 대해 전시하고, 1층은 주로 공화춘 주방을 재현해 놓았다.
<인천 영사관에서 발행한 화교여권(1934)>
<1922, 1914년에 발행된 공화춘 주식증서>
<공화춘 회계장부, 식대 계산서>
<1920년대의 화교의 이발도구 삭도(削刀)>
'화교와 세 자루의 칼'이란 말이 있는데 음식점과 주방에서 사용하는 식칼인 육도(肉刀)와 채도(菜刀), 양복점에서 사용하는 가위인 전도(剪刀), 이발소에서 사용하는 면도칼인 체도(剃刀)를 말한다. 화교들이 외국에서 정착을 시작할 때 주로 음식점, 양복점, 이발소에서 종사했음을 말해 준다.
<제1전시실, 짜장면의 탄생 역사와 개항기 인천항 풍경>
1890년대를 전후하여 인천의 부둣가는 외국과의 무역이 한창이었다. 배에서 내리고 싣는 물건을 나르기 위해 수많은 짐꾼과 인력거꾼이 필요하였는데, 대부분 산둥지방 출신의 노동자인 쿨리(苦力)였다. 이들은 별다른 재료 없이 춘장에 수타면을 비벼, 즉석에서 간편하게 만들 수 있는 고향의 메뉴인 짜장면을 먹었는데, 이들을 상대로 손수레 노점상이 하나 둘 생기면서 '짜장면'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짜장면박물관 제2전시실, 1930년대 공화춘 접객실>
<제3전시실, 짜장면의 전성기 1970년대>
<시대별 짜장면 가격>
<중국집 배달가방 변천사>
나무상자가 무겁고 음식물이 흐르는 등 불편하자 철가방으로 바뀌었다.
<제4전시실, 짜장면의 종류와 조리법>
<제4전시실, 1950~70년대의 그릇과 고량주병>
양념통, 청테 물컵과 재떨이, 고량주와 잔, 중국집 이름이 새겨진 접시들이다.
<중국집에서 사용된 짜장면 재료와 대한제분 곰표 밀가루>
<제5전시실, 레토르트 및 인스턴트 식품, 시대별 짜장면>
두 번째 단은 1970년대와 80년대, 1990년대와 2000년대의 인스턴트 짜장면이고, 세 번째 단은 비교적 근래의 것들이다.
<1층 전시실, 수타 주방과 칼판 주방(1960년대)>
규모가 큰 중국집은 면을 만드는 수타 주방, 야채 등의 재료를 손질하는 칼판 주방, 음식을 익히는 화덕 주방으로 나뉘었다.
<짜장면박물관 1층 전시실, 공화춘 화덕 주방과 웍>
<공화춘 화덕 주방의 짜장면 요리 장면>
<짜장면박물관 1층 전시실, 공화춘에서 수습된 용기들>
<중식 조리용 칼과 국자, 주방용 뜰채와 깔때기>
<짜장면박물관 1층 전시실, 공화춘 주방의 조왕신>
조왕신은 부뚜막신이고, 한 가정에서 일어난 1년 동안의 일을 옥황상제에게 보고하는 일을 한다. 중국에서는 섣달 23일 저녁에 조왕신 그림 앞에 재물을 진설하고 제사를 지낸 후 조왕신 그림을 불태워 하늘나라로 보냈다가 설에는 다시 조왕신 그림을 붙여 맞이했다. 재물 중 엿과 떡은 조왕신의 입을 붙게 하여 옥황상제를 찾은 조왕신이 입을 제대로 열지 못하게 하는 것이고, 술을 아궁이에 바르는 것은 술에 취해 옥황상제를 찾아가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즉 집안의 나쁜 일을 옥황상제에게 알리지 못하게 하려는 조치이다.
<짜장면박물관 뒷쪽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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