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창덕궁

큰누리 2024. 11. 5. 19:02

≪창덕궁≫ 유네스코 세계유산.

창덕궁(昌德宮)은 1405년(태종 5) 법궁인 경복궁의 이궁으로 창건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10년(광해군 2) 궁궐 중 처음으로 다시 지어졌으며, 이후 역대 왕들이 1867년 경복궁이 중건될 때까지 약 270여년 동안 창덕궁을 더 많이 사용하여 실질적인 법궁의 역할을 하였다. 특히 대조전 부속 건물인 흥복헌은 1910년 경술국치가 결정되었던 비운의 장소이기도 하며, 낙선재 권역은 광복 이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실 가족(순정황후:순종의 두 번째 부인, 의민황태자비:이방자 여사, 덕혜옹주)이 생활하다가 세상을 떠난 곳이기도 하다.

 

후원은 1406년(태종 6) 창덕궁 북쪽에 처음 조성되었고 1463년(세조 9) 확장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이후 인조 대부터 순조 대까지 옥류천, 규장각, 주합루, 애련지, 의두합, 연경당 등이 추가로 조성되면서 창덕궁은 정치와 더불어 휴식의 공간이 조화를 이루었다. 창덕궁은 창경궁(昌慶宮)과 경계 없이 '동궐'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1917년에 대조전을 비롯한 내전들이 붙타 없어지자 경복궁의 전각을 헐어다 옮겨 짓는 등 많은 건물들이 변형, 훼손, 철거되었다가 1991년부터 복원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창덕궁은 다른 궁궐에 비해 인위적 구조를 따르지 않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 자연스럽게 건축하여 가장 한국적인 궁궐이라는 평가를 받아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창경궁 안내도'와 함께 궁능유적본부(https://royal.khs.go.kr/)에서 퍼옴--

 

<창덕궁 안내도>

 

<창덕궁 돈화문(敦化門)과 진선문(進善門)>

돈화문은 창덕궁의 정문으로, 2층 목조 건물이다. 왕이 행차를 하거나 국가행사를 치를 때 드나든 문이고, 신하들은 서편의 금호문(金虎門)으로 드나들었다. 궁궐의 중심부가 동쪽에 있기 때문에 돈화문을 들어서면 동쪽으로 금천교를 건너 정전인 인정전 구역과 연결된다. 돈화문 앞에는 높은 월대가 있고, 여기서부터 종로까지 관청 거리가 있었다. 진선문(進善門)은 경복궁으로 치면 일종의 내문격인 흥례문으로 보면 될 듯하고 앞에 금천교가 있다.

 

<창덕궁 회화나무 군 천연기념물>

돈화문 안마당 좌우에 자라는 8그루 모두가 천연기념물이다. 키 15~16m, 가슴높이 줄기 둘레 0.9~1.8m, 수령은 약 300~400년으로 추정된다. 아래의 회화나무는 서쪽문인 금호문 앞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2시간에 맞춰 팀으로 답사를 했기 때문에 후원은 포기하고, 일반적인 코스가 아니라 금호문쪽의 궐내각사부터 돌아본 후 인정문에서 일반적인 코스로 답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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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궐내각사 내각(규장각) 출입문>

궐내각사는 궁궐에 설치된 왕실과 관련 있는 여러 관청들을 말한다. 정치를 보좌하는 홍문관(玉堂), 건강을 보살피는 내의원(藥房), 정신문화를 담당하는 규장각(內閣), 왕의 칙령과 교서를 보관하던 예문관 등이 중심시설이었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없어졌다가 2004년에 복원되었다.

 

<궐내각사 규장각 정면과 동쪽면>.

조선 역대 국왕의 시문, 친필, 서화, 유교 등을 보관하였던 곳으로 세조 때 설치했다가 사후에 폐지되었다. 정조가 부활시켜 본래의 기능 외에 왕권을 강화하는 참모기구로 이용하였지만 정조 사후 제 기능을 잃었고, 1910년에 폐지되었다. 이곳에 소장된 도서들은 조선총독부에서 보관하였다가 이왕가와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되었다. 이후 경성대 후신인 서울대학교에서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 도서 일부를 보관하고 있다. 관원은 제학 2인, 직제학 2인, 직각 1인, 검서관 4인이 있었고, 강화도에 분관(외규장각)이 있었다.

 

<규장각 서쪽면과 면과 운한문(雲漢門)>

운한문 뒤의 은행나무를 사이에 두고 책고(冊庫, 책 보관소) 2동이 있다.

 

<규장각 옆 건물 검서청>

규장각 소속 건물로 4명의 검서관이 있었으나 정조 사후 없어졌다고 한다.

 

<규장각, 검서청 뒤의 책고(冊庫)와 아름다운 은행나무>

오른쪽의 물길은 진선문 앞을 지나는 금천교로 이어진다. 왼쪽의 은행나무를 사이에 두고 책고(冊庫) 2동이 나란히 있다. 두 번째 사진은 책고 2동 중 규모가 더큰 동쪽 건물이다. 오른쪽의 은행나무(세 번째 사진)는 답사 당시(24.1024)에 가장 아름답게 물든 상태였다.

 

<창덕궁 내각의 억석루(億昔樓)>

책고 앞의 문을 지나며 위의 은행나무를 보고 내를 건너면 억서루(億昔樓)가 나타난다. 농사의 신 신농씨에 관한 자료를 보관하던 곳이라고 한다. 

 

<창덕궁 구선원전과 내찰당>

중심 건물 앞 왼쪽(西)에 진설청이, 오른쪽(東)에 내찰당이 있다. 선원전은 역대 왕들의 초상화인 어진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1921년 후원 안쪽으로 신선원전을 지어 옮겨가면서 폐허가 되었다가 2005년에 복원되었다. 선원전에 있던 어진은 6.25때 부산으로 옮겼다 불에 탔다고 한다.

 

<창덕궁 내각의 양지당(養志堂)>

 

<창덕궁 내각의 약방(내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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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인정문과 숙장문>

창덕궁이 중심 궁궐(법궁)일 당시 인정문 안을 조정이라고 하며, 인정문 중앙에서 왕의 즉위식이 거행되었다. 인정문 맞은편은 섭위청, 왼쪽은 정청이었으나 현재는 회랑 형식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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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인정전(仁政殿)>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으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 접견, 궁중 연회 등 중요한 국가행사를 치르던 곳이다. 월대의 높이가 낮고 난간이 없어 근정전에 비해 소박하다. 내부의 마루와 전등, 커튼, 유리창문 등은 1908년(융희 2)에 서양식으로 개조한 것이다.

 

<창덕궁 선정문과 희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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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선정전(宣政殿)>

선정전(宣政殿)은 왕이 신하와 함께 일상 업무를 보던 공식 집무실인 편전으로 경복궁의 사정전 같은 곳이다. 이곳에서 조정회의, 업무 보고, 경연 등 각종 회의가 매일 열렸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47(인조 25) 인경궁의 편전인 光政殿을 옮겨 지었으며, 현재 궁궐에 남아있는 유일한 청기와 건물이다.

 

<창덕궁 선정문, 복도각, 선정전(宣政殿)>

 

<창덕궁 선정전(宣政殿)의 청기와>

선정전 뒤에 있는 대조전(정식 침전이자 왕비의 생활공간)은 마침 공사 중이라 볼 수 없었고, 선정전의 청기와도 희정당 한쪽에서 이 정도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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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희정당(熙政堂)

희정당(熙政堂) 원래 왕의 침전이었으나 조선 후기에 편전으로 기능이 바뀌었다. 1917년 대화재로 모두 소실되었다가 1920년 경복궁 강녕전을 옮겨서 복원하였다. 이때 내부를 쪽매널 마루와 카펫, 유리 창문, 샹들리에 등을 설치하여 서양식으로 꾸몄다. 입구는 전통 건물에서 볼 수 없는 현관의 형태로 되어있고, 자동차가 들어설 수 있는 구조로 바뀌었다.

 

<창덕궁 희정당(熙政堂) 현관>

 

<창덕궁 희정당(熙政堂)과 서양식으로 꾸민 내부> 

 

<창덕궁 인정전(仁政殿)과 희정당(熙政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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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성정각>

성정각은 세자의 교육장이었으나 일제강점기에는 내의원으로 쓰기도 했다. 성정각은 단층이지만 동쪽에 직각으로 꺾인 2층의 누(樓)가 붙어 있어 독특한 모습이다. 누각에는 보춘정(報春亭), 희우루(喜雨樓)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성정각 뒤편에 있는 관물헌(觀物軒)은 왕이 자주 머물면서 독서와 접견을 했던 곳으로, 현재는 집희(緝熙)라는 현판이 남아 있다.

 

<창덕궁 성정각의 보춘정(報春亭), 희우루(喜雨樓), 관물헌(觀物軒)>

성정각 누각의 남쪽에는 윗사진처럼 보춘정(報春亭), 두 번째 사진처럼 동쪽에 희우루(喜雨樓) 현판이 걸려있다. 세 번째 사진은 성정각 뒤편에 있는 관물헌(觀物軒)으로 현재 집희(緝熙)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건물 앞 기단 위에는 보호성궁(保護聖躬), 조화어약(調和御藥)이란 현판이 걸린 건물이 있다. 

 

<창덕궁 성정각의 각기 다른 기와>

성정각 동쪽 담장 수막새 기와의 무늬가 다른 것은 1917년 화재 후 여기저기에서 가져와 보수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창덕궁 동궁 터 삼삼와(三三窩), 칠분서(七分序), 승화루(承華樓)>

승정각 옆, 후원 입구에 있는 세자의 처소(동궁)였으나 일제강점기 이후 우체국 등으로 사용되었고, 현재 출입불가이다. 

 

<창덕궁과 후원 관람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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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선재(樂善齋) 일원≫

낙선재 일원은 헌종이 1847년 서재 겸 사랑채로 지은 낙선재와 이듬해, 낙선재 동쪽에 이웃하여 지은 석복헌(錫福軒), 수강재(壽康齋)를 하나의 권역으로 일컫는 말이다. 낙선재는 일반적인 궁궐과 달리 단청을 입히지 않았으며 창호, 담장, 굴뚝, 석물 등에 다양한 문양을 더하여 소박하지만 단아한 기품이 있다. 석복헌(錫福軒)은 헌종이 후궁인 경빈을 위해 지은 처소이며, 수강재(壽康齋)는 어린 왕을 대신하여 나랏일을 돌본 순원왕후가 머물렀던 곳이다. 낙선재 일원에서 순종의 계비 순정효황후가 1966년까지 살았고, 영친왕의 비 이방자 여사와 고종의 막내딸 덕혜옹주가 1989년까지 머물렀다.

 

<낙선재 일원>

 

<낙선재 장락문(長樂門)>

 

<낙선재(樂善齋)>

누각 안쪽의 둥근 문과 다양한 문창살, 담장, 굴뚝 등이 아름답다.

 

<낙선재 옆의 석복헌(錫福軒)>

 

<석복헌(錫福軒)의 대청마루와 문창살>

 

<아궁이가 없는 석복헌(錫福軒)의 부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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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에서 본 창덕궁 진선문(進善門)>

진선문(進善門)은 경복궁의 내문격인 흥례문 같은 곳으로 앞에 금천교가 있다.

 

<창덕궁 금호문(金虎門)>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敦化門)은 왕이 행차를 하거나 국가행사를 치를 때 드나든 문이고, 서편의 금호문(金虎門)은 신하들의 출입문이다. 문 오른쪽 앞에 송학선 의사 의거터 안내석이 있다. 1926년 4월 28일 순종의 승하에 울분한 송학선 의사가 금호문 앞에서 조선총독을 살해하려던 곳이다.

 

<국립민속박물관 앞의 말뚝박기 놀이 조형물>

창덕궁 답사를 마치고 국립민속박물관으로 강의를 들으러 가는 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