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

산청 정취암(淨趣庵)

큰누리 2024. 11. 16. 20:50

 

≪산청 정취암(淨趣庵)≫

소재지 : 경남 산청군 신등면 둔철산로 675-87 전통사찰제8호

유물 : 관음보살좌상(유형문화재 제543호), 산신탱화(지방문화재 자료 제243호)

정취암(淨趣庵)은 산청군 소재지에서 동남방향 약 10km에 위치한 대성산(일명 둔철산)의 기암절벽 사이에 자리한 절로 상서로운 기운이 있다 하여 예로부터 소금강이라 일컬었다. 신라 신문왕 6년(686) 때 의상조사가 금강산에 원통암을, 대성산에 정취사(正趣寺)를 창건하였다. 정취암은 「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조선중기 기록에는 정취사(正趣寺)로 기록되어 있으나, 조선후기에 조성된 불화와 문서에는 정취암(淨趣庵)으로 기록되어 있다. 정취암(淨趣庵)은 정취관음보살을 본존불로 봉안하고 있는 유일한 사찰이며, 다른 나라에서도 이런 경우는 찾아볼 수 없다.

정취보살상은 신라 헌강왕 2년(858) 굴산 범일선사가 낙산사에 최초로 봉안했었다. 몽고 침략기인 고려 고종 45년(1258) 야별초 병사 10인과 걸승이 정취보살상을 땅속에 묻어 난늘 피했다가 기림사 주지 각유선사가 국가의 신령한 보물이니 어부(궁궐)에 모실 것을 청하여 어부에 모시게 되었다. 고려 공민왕 3년(1354)에 화경, 경신 두 거사가 정취사를 창건한 후 어부에 봉안되어 있던 정취보살상을 정취사로 옮겨 봉안했다. 

세월이 흐르며 당우가 기울고 조선 효종 3년에 화재로 모든 전각과 정취보살상이 소실되자 봉성당 치헌대선사가 효종 4년(1653)~효종 6년(1655)에 중창하고 숙종 40년(1714) 소실된 정취보살을 재현하여 목조정취관음상을 조성하였다. 그러나 순조 32년(1832) 4월 다시 화재로 100년 간의 모든 전각이 소실되어 이관선사가 다시 순조 34년(1834)에 당우를  세우고 중건하였다.   ---현지의 '대성산 정취암 사적비'의 내용이 너무 장황하여 요약한 것이 이 정도임---

 

<정취암 입구의 부도>

버스가 하차한 지점에서 정취암까지 15분 이상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진입로가 좁고 이렇다 할만한 주차장이 없어서 정취암에 좀더 가까이 접근하는데만  관광버스 기사님의 상당한 노련함이 있어서 가능했다. 부도는 정취암에서 꽤 떨어진 입구에 있다.

 

<정취암으로 내려가는 길>

길은 차량이 지나다닐 수 있도록 비교적 잘 닦여 있으나 버스는 진입이 불가하다. 제법 걸어 내려가야 일주문 역할을 하는 기둥이 나온다. 기둥 안쪽으로 다시 내려가면 정취암이 있다.

 

<정취암 입구의 '당부의 말씀'>

 

<정취암 입구의 기둥과 비천상>

일주문이 따로 없고 이 기둥이 대신한다. 기둥 뒤에 비천상을 새긴 바위가 있다.

 

<정취암 입구에서 정취암으로 내려가는 마지막 내리막 길>

 

<정취암(淨趣庵) 전경과 전각들>

중앙의 원통보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종무소, 요사채가 있고, 위의 산자락에는 비교적 수평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응진전-정취전-삼성각 순으로 늘어서 있다. 원통보전 위쪽, 삼성각 사이에 거북바위로 불리는 2개의 바위가 있다.

 

<정취암(淨趣庵) 원통보전(圓通寶殿)>

두 번째 사진 왼쪽은 종무소, 오른쪽의 일부가 보이는 건물은 정취전이다.

 

<정취암(淨趣庵) 종무소 앞의 공양물품들>

쌀 부대는 종종 보았는데... 공양미를 담은 토끼 모양의 병이 앙징맞다.

 

<정취암(淨趣庵) 원통보전(圓通寶殿)>  

 

<원통보전의 '산청 정취암 목조관음보살좌상'>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관음보살은 자비로 사람의 괴로움을 구제하고 왕생의 길로 인도하는 보살로, 관세음보살이라고도 한다. 산청 정취암 원통보전에 모셔져 있는 목조관음보살좌상은 조선 숙종 40년(1714)에 진열과 상정이 만들었다. 높이 약 50cm의 작은 보살상으로 연꽃 장식의 대좌 위에 앉아있다. 보살상은 등을 세우고 머리 부분은 약간 앞으로 내밀고 있다.

머리에는 보석으로 꾸민 관을 쓰고 있는데 이 관은 후대에 만든 것으로 추측한다. 머리 관 중앙에는 화불(化佛)을 새겨넣고 앞뒤에는 불꽃무늬 장식으로 화려하게 치장했다. 얼굴은 네모 반듯하고, 턱은 둥글며, 가늘고 긴 눈과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어 부드러운 인상이다. 짧은 목에는 목주름인 삼도를 얕게 표현하고, 두 손은 따로 만들어 끼웠으며, 각각 엄지와 중지를 구부려서 맞대고 있다. 옷은 양어깨를 모두 덮고 있는 통견 형식이며, 가슴 아래에는 꽃잎 모양으로 주름진 모습이다.

 

<정취암 원통보전 목조관음보살좌상 옆의 지장보살상>

 

<정취암 쌍거북바위(영귀암, 靈龜岩)>

정취암 거북바위(영귀암) 쌍거북바위로 부부의 금슬을 좋게 하고, 귀한 자손을 보게 하며, 사업 번창 등 원하는 바를 성취하게 하는 영험이 있다고 한다. 특히 산신기도를 하면서 거북바위에 함께 기원하면 오랫동안 자손을 못본 이들이 자손을 보거나 소원하는 바를 성취한 사례가  많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아래에 소원을 비는 하트 쪽지들이 많이 걸려 있다. 거북바위중 하나는 삼성각 옆(사진의 바위 너머)에 있어서 아래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윗단으로 올라가는 원통보전 뒷길>

 

<거북바위에서 내려다본 전각들>

왼쪽부터 요사체, 원통보전, 종무소이다.

 

<삼성각과 산청 정취암 산신탱>

산신각은 중앙에 유리를 설치하고 그 너머로 바위 아래의 주불 대신 호랑이와 산신을 봉안한 것 같은 구조이다. 그런데 산신탱 때문에 상당히 헷갈렸다. 처음에는 두 번째 사진의 왼쪽 그림인 줄 알았는데 내용이 달라서 다음에는 산신각 뒤의 석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뭔가 이상했다. 탱화는 걸기 위한 그림인데 조각이 산신탱이라고? 나중에 사진을 정리하면서 다시 살펴본 결과 세 번째 사진의 호랑이와 산신 뒤쪽의 유리 보호각 안에 탱화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정취암 산신탱은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43호이다. 산신탱은 1833년(순조 33)에 제작된 것으로 가로, 세로가 각각 150cm의 불화이다. 산신이 호랑이를 타고 행차하는 것을 협시동자가 받들고 있는 내용이 불교적이라기보다 토속신앙을 표현한 것이다. 전통적인 토속신앙과 불교의 혼합을 잘 보여주는 그림이다.

 

<삼성각쪽에서 본 정취암 정취전과 응진전>

왼쪽의 지붕이 보이는 전각은 주불전인 원통보전이다. 

 

<정취암 정취전(淨趣庵 正趣殿)>

자연석으로 보이는 바위 앞에 불상(약사불?)을 안치했다.

 

<정취암 응진전과 그 너머의 산책로>

 

<산책로에서 본 정취암 전경>

왼쪽의 윗단은 응진전-정취전-삼성각-쌍거북바위, 오른쪽의 아랫단은 원경부터 요사채-원통보전-종무소이다. 

 

<정취암 응진전, 정취전, 삼성각, 쌍거북바위>

 

 <정취암 응진전>

석가모니불과 16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다.

 

 <정취암 정취전과 삼성각, 쌍거북바위> 

 

--정취암 주변의 식물들--

<정취암 벌등골나물>

 

<정취암 좀깨잎나무>

 

<정취암 참취꽃>

 

<정취암 꽃무릇>

 

<비오는 날의 산청 대성산 정취암>

 

<정취암 둥근잎유홍초>

 

<정취암 입구의 백합>

특이하게 산중에 백합이 피었다. 일행들은 나리라고 하는데 아무리 보아도 백합...

 

<정취암 입구의 산기름나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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