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함양 남계서원

큰누리 2025. 1. 29. 17:53

 

≪함양 남계서원≫ 세계유산, 사적.

서원은 조선시대의 사설 교육기관이자 선현들을 모시고 제향을 올리는 곳이다. 남계서원(濫溪書院)은 조선 초기 성리학자이며 동방 5현으로 불리는 일두 정여창(一蠹 鄭汝昌) 선생의 학문과 사상을 추모하기 위해 1552년 개암 강익(介庵 姜翼)을 비롯한 지방 유생들이 건립하였다. 이 서원은 소수서원에 이어 전국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서원으로 1566년에 명종 임금에게서 하사받은 사액서원이다. 출입문인 풍영루와 강당, 동재, 서재, 경판고(장판각), 사당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급한 경사지에 사당을 제일 높은 곳에 두고출입문까지 일직선상으로 배치하였는데, 이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 형식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이며, 이후 각 지역에 건립되는 서원은 대부분 이러한 배치 형식을 따르게 되었다. 

남계서원은 정유재란(1597년) 때 소실되었으나 1612년 현재 자리에 다시 세웠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 헐리지 않고 존속한 서원 중 하나이다.

 

<남계서원 입구 우물과 우물에서 본 서원>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표석과 9개 서원>

 

<홍살문에서 본 남계서원>

 

<남계서원 배치도>

 

<남계서원 출입문인 풍영루(風詠樓)>

풍영루는 유생들이 공부하거나 손님이 오면 학문을 토론하고 정담을 나누기도 한 누각으로, 창건 당시 준도문(遵道門)이라고 하는 출입 삼문이었으나 후에 다락을 올려 현재에 이르고 있다. 논어의 내용 중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쏘이고 노래하며 돌아오겠다'라는 증점의 뜻을 바로 여기서 느낄 수 있다 하여 풍영루라 이름지었다. 기수와 무우는 춘추시대의 전설 속에 나오는 곳이다. 풀입은 사당의 내삼문과 함께 동쪽으로 들어가고 서쪽으로 나가는 형태로 기문은 정여창 선생의 후손인 조선 말기 문장가 오담 정환필이 지었다. 바깥에는  풍영루(風詠樓), 안쪽에는 준도문(遵道門) 현판이 붙어있다.

 

<남계서원 묘정비각, 강당, 동재>

서재는 묘정비각에, 경판고는 동재에, 사당은 중앙의 강당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윗사진 아래 양쪽에는 연지가 있다.

 

<남계서원 묘정비각과 묘정비>

남계서원에 일두 정여창, 동계 정온, 개암 강익 선생 세 분을 모시고 향사를 올리고 있음에도 이를 찬양하는 송덕비가 없어 안타까워 하다가 남계서원 건립 200여 년이 지난 1779년에 묘정비를 세우면서 글을 새겼다. 비문은 정조 때 문관 김종후가 지었다.

 

<남계서원 강당과 동재(양정재)>

동재는 유생들이 거처하며 공부하던 곳으로 '양정재(養正齋)'라고도 한다. 동재는 서재와 같은 2칸의 건물로 1칸은 온돌방이며 나머지 1칸은 누마루인 '애련헌(愛蓮軒)'이다. 정여창 선생은 송나라의 성리학자 주돈이의 愛蓮設에 영향을 받아 매화와 연꽃을 사랑하여 누각 이름을 애련헌과 영매헌이라고 지었다. 중앙 뒤쪽에 살짝 보이는 건물은 경판고(장서각)이다. 

 

<남계서원 강당과 서재(보인재)>

서재는 유생들이 거처하며 공부하던 곳으로 '보인재(輔仁齋)'라고도 한다. 서재는 동재와 같은 2칸의 건물로 1칸은 온돌방이며 나머지 1칸은 누마루인 '영매헌(詠梅軒)이다. 영매헌과 애련헌은 '연못을 파고 못 옆에 둑을 쌓아서 연을  구경하고 매화를 읊조릴 만하다'라는 뜻이다.

 

<남계서원 강당(명성당, 明誠堂)>

강당은 敬과 論을 연구하고 학습하는 곳으로 명성당(明誠堂)이라고 하며, 강학영역을 구성하는 중심 건물로 1559년에 완성되었으며,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앙 2칸은 대청마루, 양쪽 각 1칸은 온돌방이다. 오른쪽 방을 '거경재(居敬齋)', 왼쪽의 동쪽 방은 '집의재(集義齋)'라고 한다.

 

<동쪽에서 본 남계서원>

서재(영매헌, 보인재)와 강당인 명성당(明誠堂) 이다. 

 

<남계서원 경판고(經板庫)>

경판고는 장판객이라고도 하며, 서원에서 보유하는 책이나 판각 등을 보관하는 곳이다. 유생들을 교육한 어정오경(御定五經) 등의 서적이 이곳에 보관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정면 2칸, 측면 1칸으로 건물을 지면에 붙이지 않고 4면을 모두 터놓아 공기의 유통이 자유롭게 하여 판각을 보관하기 쉽도록 하였다. 외부 벽재는 나무 판벽이고 내부 역시 가운데에 판벽이 있다.

 

<경판고(經板庫)쪽에서 본 남계서원>

윗사진은 정문인 풍영루와 동·서재, 강당(명성당)이며, 아래 사진은 내삼문과 사당, 전사청이다. 

 

<남계서원 강당(명성당, 明誠堂) 뒷면>

 

≪남계서원 제향영역, 소수서원과의 차이점≫

제향영역은 제사를 지내는 공간으로 사당과 전사청이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이 건물 배치에 일정한 형식을 갖추지 못한 것과 달리 남계서원은 서원의  제향공간에 속하는 건물들은 서원 영역 뒤쪽에 자리잡고, 강학공간에 속하는 건물들은 서원 영역 앞쪽에 자리잡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서원 건축 배치 형식이다. 사당은 실질적으로 서원 향사를 거행하는 곳으로, 이곳에 성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그래서  이곳은 어느 곳보다 엄숙하고 경건한 곳이다. 사당 오른쪽 담장  밖에 별사가 있었는데 서원 건립 후 뇌계 유호인  선생과 송탄 정홍서 선생을 모셨으나 서원  철폐령 때 헐렸다.

 

<남계서원 제향영역>

윗사진부터 내삼문, 사당, 전사청이으로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건물이다. 주벽은 일두 정여창 선생을, 서쪽에는 1675년에 동계 정온 선생을, 동쪽은 1689년애 남계서원 건립을 주도한 개암 강익 선생을 모셨다. 강익 선생은 정온 선생의 외삼촌이다. 

 

<남계서원 내삼문에서 본 경판고, 강당(명성당)>

 

<남계서원 내삼문에서 강당(명성당), 관리사,문간채>

 

<관리사 협문쪽에서 본 남계서원 사당, 강당(명성당)>

 

<협문에서 본 남계서원 강당(명성당), 동·서재, 묘정비각>

 

<관리사에서 본 남계서원 사당, 협문>

 

<서쪽 앞에서 본 남계서원>

남계서원 서쪽에 있는 청계서원을 다녀오며 본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