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사(海歌詞)의 터--
「삼국유사」에 나오는 향가 <헌화가>와 <해가사>의 배경으로 추정되는 지역이다. <헌화가>의 터로 추정되는 곳은 삼척시 임원과 용화 사이로 수로부인헌화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해가사>의 터로 추정되는 곳은 증산마을 부근으로 수로부인공원을 조성해 놓고 일명 '해가사의 터'로 부른다.
해가사 터인 임해정은 「삼국유사」 '수로부인전'의 <해가(海歌)>라는 설화를 토대로 복원되었는데 원래의 위치로 추정되는 곳은 군사보호시설이라 주변경관이 수려한 현재의 증산동 해변에 조성되었다. 해가사의 터에는 해가사의 비, 임해정, 사랑의 여의주가 설치되어 있는데 사랑의 여의주는 누구나 돌릴 수 있으며, 헌화가 배경 그림이 멈추면 연인들의 사랑이 영원하고, 해가사 배경 그림이 멈추면 묻어둔 사랑과 잃어버린 사랑을 되찾을 수 있다고 한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향가 <헌화가>, <해가사>--
* 헌화가(獻花歌) : 신라 성덕왕 때 순정공이 강릉 태수로 부임하며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그곳에 험한 절벽이 있고 그 위에 철쭉(척촉화)이 피어 있었다. 순정공 부인 수로가 꽃을 원하자 험하다고 꺼려했는데 암소를 끌고 지나가던 노인이 꽃을 꺾어 바치며 노래를 지었는데 그 노래가 헌화가이다.
자포암호변희(紫布岩乎邊希) 자줏빛 바닷가에
집음호수모우방교견(執音乎手母牛放敎遣) 암소 잡은 손을 놓게 하시고
오힐불유참힐이사등(吾肸不喩慚肸伊賜等)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면
화힐절질가헌호리음여(花肸折叱可獻乎理音如)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 해가사(海歌詞) : 그 이틀 후 바다의 용이 나타나 수로부인을 납치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데 한 노인이 '백성을 모아 노래를 지어 부르며, 막대기로 언덕을 치면 수로부인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이에 순정공이 그대로 하자 용이 수로부인을 돌려주었다.
구호구호출수로(龜乎龜乎出水路) 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을 내놓아라
약인부녀죄하극(掠人婦女罪何極) 남의 아내를 빼앗은 죄 얼마나 크더냐
여약패역불출헌(汝若悖逆不出獻) 네 만일 거역하고 내놓지 않으면
입망포략번지끽(入網捕掠燔之喫) 그물로 잡아서 구워 먹으리라.
--헌화가, 해가사에 대한 해석--
수로부인 이야기는 무속적 산신제의와 해신제의가 구조적으로 병립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이 견해는 수로부인이 체험한 두 사건은 심산대택(深山大澤)에 존재하는 신물이 나타난 것이니 신이담(神異譚)이라 할 수 있고, 신물은 신앙관념의 대상으로서 신격이라 해석했다. 다른 견해는 헌화가는 산간지방의 꽃노래 형태 민요가 산신신앙과 결합되면서 제의가요로 상승작용을 일으켜 4구체 향가로 정작되었다고 추정한다. 해가는 수로부인의 설화에 깔린 불교적 배경을 바탕으로 강릉 수다사(水多寺)의 연기설화와 용신신앙의 민간의례인 해신제와 결합하여 기존의 구지가를 원용한 제의가요로 파악했다.
<삼척 해가사의 터와 사랑의 여의주>
해가사의 비, 사랑의 여의주, 임해정이 있다. 사랑의 여의주에는 해가사가 적혀 있고, 헌화가 배경 그림과 해가사 배경 그림이 있다. 평일인데도 소원을 빌며 여의주(공)를 열심히 돌리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임해정과 그 아래에서 본 추암촛대바위>
해변이 깨끗하고 아름다우며 이곳에서 보는 추암촛대바위도 절경이다.
<해가사의 터의 삼척 지리좌표 통합기준점>
이 시설은 국토교통부 국토지리정보원에서 국가기본측량에 의해 결정된 지리좌표(위도, 경도, 표고)를 표시한 통합기준점이다. 이 표지석 위 십자선교점에서 각종 측량을 통하여 새로운 지리좌표를 정확하게 정할 수 있다. 지각변동과 국토의 위치변화 모니터링 등의 중요 기초자료로 활용되며, 내비게이션, 등산, 레져활동과 현장에서 내 위치 확인 등 국민생활에 편익증진을 위해 활용한다.
<해가사의 비에서 본 추암촛대바위>
<점심을 먹은 삼척 강릉불고기 식당>
고기를 덮을 정도로 넉넉한 파채에 상당히 칼칼한 매콤 돼지 산더미 파 불고기를 먹었다. 시커먼 막된장은 보기와 달리 맛이 괜찮았는데 일행들은 모두 '왜 짜장이 소스로 나왔느냐'고 계속 물을 정도였다. 시레기된장국 역시 시커멓지만 맛은 좋다.
--삼척 공양왕릉--
강원특별자치도 기념물.
고려 왕조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과 두 아들의 묘로 전하며, 일명 궁촌 왕릉(宮村 王陵)으로 불린다. 왕릉군 4기 중 1기는 왕의 시녀, 혹은 왕이 타던 말의 무덤이라고 전한다. 고려 공양왕 4년(1392) 7월에 이성계가 조선 태조로 즉위하면서 태조는 8월에 공양왕을 패하여 공양군으로 봉하고 강원도 원주로 보내 감시하였다. 조선 태조 3년(1394) 3월 14일에 공양군과 그의 두 아들의 귀양지를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로 옮기고, 한 달 뒤인 4월 17일에 반역을 꾀한다는 누명을 쓰고 살해제에서 모두 교살 당했다.
공양왕릉은 삼척과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의 고릉(高陵), 두 곳에 있는 것으로 전해지는데, 문헌의 기록이 부족하여 어느 쪽이 왕릉인지 확실히 알 수 없다. 이곳 삼척 공양왕릉에 대한 기록은 현종 3년(1662) 삼척부사 허목이 쓴 「척주지」와 철종 6년(1855) 기구혁이 쓴 「척주선생안」 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곳은 헌종 3년(1837) 가을에 삼척부사 이규헌이 고친 뒤 1977년 삼척군수와 근덕면장의 노력으로 새롭게 단장되었다. 매년 음력 4월 17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기타 가장 오래 유배 생활을 한 고성에도 공양왕릉이 있다.
<삼척 공양왕릉으로 오르는 계단>
후대에 조성되어서인지 우리가 아는 왕릉과는 많이 다르다. 특별한 석물이나 장식은 없고 높은 위치에 석축 기단을 쌓고 조성한 점이 일반 무덤과 다르긴 하다. 공양왕 무덤으로 추정되는 가장 오른쪽의 능에만 호석을 둘렀고 상석 비슷한 돌이 놓여있다.
<아래 정면에서 본 삼척 공양왕릉>
<오른쪽에서 본 삼척 공양왕릉와 나머지 무덤 3기>
<정면에서 본 공양왕릉과 호석, 상석>
후세에 손을 보았겠지만 탄탄해보이는 호석과 연륜이 있어 보이는 상석(!)이 그나마 왕릉의 품위를 유지하게 한다.
<왼쪽에서 뒤로 올라가며 본 공양왕릉>
<뒤에서 본 공양왕릉>
사진 왼쪽에 삼척 해양레일바이크 종착역인 궁촌리가 있다. 10여 년 전에 직장 동료들과 삼척에 왔다가 해양 레일바이크를 타고 이곳까지 와서 점심을 먹고 해변을 산책하고 적이 있다. 당시에 공양왕릉이 부근에 있는 것을 알고 들리려다 거리가 좀 있는 것 같아 일행들 때문에 포기했는데 이번에 보니 궁촌리 뒷산 같은 곳이라 지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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