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척도호부 외삼문>
외삼문 안에 죽서루와 복원한 삼척도호부 객사인 진주관과 응벽헌이 있다. 외삼문 안쪽은 예전에 삼척도호부가 있었다. 도호부에는 지방의 수령이 집무를 보던 동헌이나 아전들이 사무를 보던 건물, 감옥, 수령의 살림집인 내아 등이 있고, 왕에게 예를 올리거나 중앙의 손님을 받는 객사 등이 있었을 것이다. 죽서루 아래, 객사 앞이 관아였으나 현재는 빈터이다. 그나마 객사는 복원한 것이다.
--삼척 죽서루(三陟 竹西樓)--
국보.
이 누각이 언제 창건되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고려 명종 때의 문인 김극기가 쓴 죽서루 시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12세기 후반에 이미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 태종 3년(1403) 당시 삼척부사 김효손이 고쳐 지었다. 절벽 위 자연 암반을 기초로 하여 건축되었고, 누(樓) 아래의 기둥 중 9개는 자연 암반을 기초로, 나머지 8개는 돌로 만든 기초 위에 세웠기 때문에 17개 기둥의 길이가 각각 다르다. 상층은 20개의 기둥이며 7칸이다. 자연주의 전통 건축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진수로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라 할 수 있다.
현재는 정면 7칸, 측면 2칸 규모로 겹처마 팔작지붕이지만 원래는 5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 건물 가운데의 5칸 내부는 기둥이 없는 통칸이고, 후에 증축된 것으로 보이는 양측 칸의 기둥 배열은 원래의 양식에 구애받지 않고 서로 다르게 배치되어 있다. 마루는 우물마루(넓은 널을 짧게 잘라 끼워넣은 마루)이며 천장은 연등 천장인데, 좌측 툇간(건물의 덧달아 낸 칸, 물림칸) 일부는 우물천장이다.
누각에 걸린 글씨 중 '제일계정(第一溪亭)'은 현종 3년(1662) 부사 허목이 쓴 것이고, 전면의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와 죽서루(竹西樓)'는 숙종 37년(1711)에 부사 이성조가 썼으며, '해선유희지소(海仙遊戱之所)'는 헌종 3년(1837)에 부사 이규헌이 쓴 것이다. 이 밖에 숙종, 정조, 율곡 이이 등 많은 명사들의 시가 걸려 있다.
<삼척 죽서루>
원래 5칸이었던 건물 양쪽에 1칸씩 덧대었기 때문에 덧댄 칸의 모양이 서로 다르고 왼쪽은 특히 독특하다. 이 위치에서는 잘 안 보이지만 아래 17개의 기둥 길이도 모두 다르다. 전면의 제액 2개는 부사 이성조가 쓴 것이다.
<죽서루에서 내려다 본 오십천>
<죽서루 동쪽면과 현판>
<죽서루 우물마루와 계자난간>
수많은 현판들이 단아하게(!) 걸려 있으나 공사 중이라 출입불가였다.
<죽서루 주변의 단풍과 오죽(烏竹)>
막바지 단풍이 화려하다. 오죽(烏竹)은 강릉 오죽헌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왼쪽에서 전면으로 진행하며 본 죽서루>
전면의 제액 2개(關東第一樓, 竹西樓)는 숙종 37년(1711)에 부사 이성조가 쓴 것이다. 이 방향 앞쪽의 기둥 2개는 자연 암반이 아닌 낮은 초석 위에 누하주를 세웠다.
<전면에서 왼쪽으로 진행하며 본 죽서루>
이 방향의 누하주(아랫기둥)들은 자연 암반을 기단으로 하여 세워서 기둥의 길이가 각기 다르다.
<삼척 죽서루의 그랭이질 두리기둥>
두리기둥 밑면을 기단과 초석 없이 그랭이질하여 직접 세웠다. 즉 기단을 축조하지 않고 천연의 암반을 기단으로 하여 필요한 곳에만 초석을 놓고 누하주를 세우고, 나머지 누하주는 초석 없이 암반 위에 직접 세웠다.
<높이와 기단이 서로 다른 죽서루 기둥들>
<죽서루 아래에서 본 삼척도호부 객사>
예전에는 계단 아래의 빈 공간에 동헌 등의 관아와 살림집인 내아가 있었을 것이다.
<죽서루 옆의 송강 정철 가사의 터>
--삼척도호부 관아지--
사적
삼척도호부 관아지는 조선시대에 삼척도호부 관아가 있었던 터이다. 조선 태조 2년(1393) 삼척이 삼척부로 승격되고 태종 13년(1413) 삼척도호부로 지명이 변경된 후 고종 32년(1895)에 삼척군으로 지정될 때까지 삼척 지역의 통치 중심부였다. 2010년부터 2016년까지 이어진 발굴조사 결과 객사와 동헌, 내아 등의 건물 터와 같은 관아의 건물 유적, 삼척읍성 남문 터, 성벽의 몸체 부분이 확인되었다. 조선시대 삼척 지역의 대표적인 관아 유적지로 실체가 분명히 확인되고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커 삼척도호부 관아 복원 사업이 지행되던 2021년 12월에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객사인 진주관과 응벽헌을 복원한 상태이다.
<삼척도호부 객사 배치도>
<삼척도호부 객사와 내삼문>
<삼척도호부 객사 정청 진주관(眞珠觀)>
진주관(眞珠觀)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이루어진 삼척도호부 관아 안에 있는 객사의 중심 건물로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임금이 계신 궁궐을 향해 절을 하는 의식을 치르던 공간이다. 각 고을의 객사는 고유의 이름이 있는데, 삼척도호부 관아가 진주관인 것은 삼척의 옛 이름이 진주(眞珠)였기 때문이다. 특이한 점은 건물 이름에 객사를 뜻하는 한자인 '객사 관(館)'이 아니고 '볼 관(觀)'을 썼다는 것이다. 아마도 삼척도호부 관아와 객사가 있는 장소가 오십천, 죽서루, 응벽헌 등이 가까이 있어 자연경관이 빼어났기 때문에 붙인 것으로 추정한다.
삼척도호부 관아의 객사는 원래 죽서루 밑에 있었으나 중종 12년(1517)에 부사 남순종이 지금의 자리로 옮겨 짓고 진주관이라 이름을 붙였다. 이후 여러 차례 고치고 다시 짓는 과정을 거쳤다. 1908년 행정구역의 변경으로 삼척군청 건물로 사용되다가 1911년에 진주관에 있던 궐패와 전패를 강원도청으로 옮겼다. 1934년에 삼척도호부 객사의 목조건물을 헐고 삼척군청 건물을 새로 지었다가 1982년 다른 곳으로 이사했다. 삼척시는 2010년부터 문화재청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삼척도호부 관아지 발굴 조사를 시작으로 여러 차례 발굴조사를 진행하여 그것을 근거로 객사인 진주관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삼척도호부 객사 정청 진주관(眞珠觀)과 내부>
<삼척도호부 객사 옆면과 뒷쪽의 대숲>
<삼척도호부 객사 응벽헌(凝碧軒)>
응벽헌(凝碧軒)은 객사 정청인 진주관의 西軒으로 중종 13년(1518)에 부사 남순종이 창건하였다. 이름이 없다가 중종 31년(1536)에 관찰사 윤풍형이 제액하였다. 이후 수차례 개축을 거듭하다가 순종 2년(1908)에 헐렸다. 삼척시는 2010년부터 문화재청의 지원을 받아 삼척도호부 관아지 발굴 조사를 했고, 결과를 근거로 현재와 같은 전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복원하였다. 아래 사진은 응벽헌과 삼척도호부 객사 뒷모습.
<삼척도호부 객사 정청 뒷면>
<객사 서쪽에서 본 객사 정청과 내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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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서루 남쪽 풍경>
죽서루 남쪽에 있는 용문바위와 선사암각화(성혈) 사이의 풍경.
<은행나무 옆의 용문바위>
신라 제30대 문무왕이 사후 호국용이 되어 동해바다를 지키다가 어느날 삼척의 오십천으로 뛰어들어 죽서루 벼랑을 아름답게 만들어놓았다고 한다. 호국용이 오십천으로 뛰어들 때 뚫고 지나간 죽서루 옆 바위가 용문바위이다. 중간에 구멍이 뚫려있다.
<용문바위 옆의 선사암각화(성혈) 일부>
죽서루 동쪽 용무바위 위에 모두 10개가 있다고 한다.
<오십천과 죽서루 아래의 절벽>
<오십천 건너편의 정자에서 본 죽서루>
거리 때문에 현장에서 절벽의 글씨를 확인할 수 없었으나 제법 많은 양의 명사들의 이름이나 글씨가 새겨진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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