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세계유산 정읍 무성서원(武城書院)

큰누리 2025. 1. 10. 03:13

한국의 서원

서원은 조선 사회에 성리학이 정착하면서 사림 세력이 지방에 설립한 사립 고등교육기관이다. 서원은 성리학을 연구하며 인재를 교육하는 강당이 있는 강학 공간, 존경하는 스승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올리는 사당이 있는 제향 공간, 유생들이 시를 짓고 토론도 벌이며 휴식하고 교류하는 유식 공간으로 구성되었다. 주변의 자연경관과 조화를 이루며 인격을 갈고닦는 인성교육에 중심을 두었다. 조선 시대 서원 중에서 소수서원, 남계서원, 옥산서원, 도산서원, 필암서원, 도동서원, 병산서원, 무성서원, 돈암서원 등 9개 서원20197월 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한국의 서원이란 이름으로 세계유산목록에 등재되었다. 이들은 한국 서원의 총체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한국의 서원문화적 전통, 또는 현존하거나 소멸한 문명과 관계되면서 독보적이거나 적어도 특출한 증거를 지니고 있는 것이라는 세계유산 등재 기준()을 인정받아 세계유산이 되었다.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 중반에 걸쳐 건립된 이들 서원은 조선 시대 성리학이 교육과 사회 활동에 널리 퍼져 있었다는 명확한 증거이다. 또 이 서원들은 전국 각지의 지식인들이 제향을 올리고 강학하여 성리학 교육 체계를 만들고, 그것에 꼭 맞는 건물을 지어 성리학 가치가 담긴 독특한 역사 전통을 만들어 가는 공간이었다.

 

≪무성서원(武城書院)≫

정읍 무성서원(武城書院)은 신라말 태산(현재의 정읍)군수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푼 고운 최치원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1615년 건립하여 태산서원이라 했는데 1696년(숙종 22) 무성서원으로 사액되었다. 19세기 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아니한 전라북도 내 유일한 서원으로 고운 최치원 선생, 조선 중종 때 태인현감을 지낸 신잠, 상춘곡을 지은 불우헌 정극인 선생, 기타 송세림, 정언충, 김약묵, 김관 등 이 지역에서 성리학을 보급하고 정리한 7분을  배향하고 있다. 교류와 유식의 공간인 현가루, 강학공간인 명륜당과 강수재, 내삼문 안쪽의 제향공간인 태산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무성서원은 서원의 입지를 선정할 때 일반서원과 달리 자연경관보다 접근성 및 서원 참여자에 주목하였기 때문에 주거지 인근에 건립되어 성리학이 사람에 한정하지 않고 지역공동체 전반으로 확대됨을 보여준다. 무성서원을 포함한 한국의 서원은 조선 후기 교육 및 사회적 활동에서 널리 보편화된 성리학적 증거라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무성서원 홍살문과 추향제 플래카드>

 

<무성서원 전경>

 

<무성서원 배치도>

 

<무성서원 현가루(絃歌樓) 밖과 안>

현가루(絃歌樓)는 무성서원 외삼문 대신 1891년에 건립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누각이다. 현가루는 논어의 현가불철(絃歌不輟)에서 따온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그치지 않는다'는 뜻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힘든 상황이 되어도 학문을 계속한다는 의미이다.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표석>

 

<무성서원 현가루 동쪽 앞의 비석>

왼쪽 2개는 무성서원(武城書院) 중수기념비, 오른쪽은 士人김인기불망비이다.

 

<무성서원 현가루 서쪽 앞의 비석들>

현가루 동쪽에 3기, 서쪽에 6기의 비석이 있다.

 

<무성서원 현가루 서쪽 앞의 비석 1>

위 사진을 확대한 것으로 오른쪽부터 무성서원(武城書院) 묘정비, 이최응불망비, 무성서원묘정비 방명록이다.

 

<무성서원 현가루 서쪽 앞의 비석 2>

오른쪽부터 의관이경희不忘碑, 현감李OO不忘碑, 참봉주찬형紀功碑이다.

 

<서쪽 비각쪽에서 본 무성서원 현가루와 비석군>

무성서원에는 모두 15기의 비석이 있는데 역대 현감들과 무성서원을 지켜낸 인물들의 공적비가 대부분이다. 

 

<무성서원 강당>

현가루를 안쪽에 있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강학공간인 강당은 좌우에 방이 있고 중앙 3칸의 마루는 앞뒤가 트인 구조이다. 이 강당은 성종 6년(1475) 불우헌 정극인이 향악을 창설하면서 세운 향학당에서 유래했다. 광해군 7년(1615)에 태산서원을 창건할 당시에는 현재와 다른 건물이 있었으나 1825년 큰불이 나서 사라졌고, 1828년 태인현감 서호순이 현재의 모습으로 중건했다.

 

<무성서원 강당의 배롱나무와 채송화>

 

<무성서원 제향공간인 태산사>

윗사진의 내삼문을 들어서면 최치원 선생을 비롯하여 불우헌 정극헌 등 7위를 모신 태산사가 있다. 원래 태산사는 신라 말 태산군수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푼 최치원을 기리기 위해 세운 생사당이다. 성종 14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으며, 현재의 건물은 헌종 10년(1844)에 세운 것이다. 

* 생사당 : 감사나 수령의 선정을 찬양하는 표시로 그가 살아 있을 때부터 백성들이 제사를 지내는 사당.

 

<무성서원 강당 옆 강수재 협문>

 

<무성서원 강수재(講修齋)>

일반적으로 서원에는 기숙사인 동서 양재가 있고, 원래 서쪽에 흥학재가 있었으나 사라지고 동재인 강수재만 있다. 강수재는 숙종 22년(1696) 사액 후에 고직사(관리사들의 살림집)를 기숙사로 변경한 것이다. 현재의 건물은 고종 24년(1887)에 세워진 것으로 여러 차례 수리하였다.

 

<무성서원 강수재(講修齋)의 편액들>

편액의 내용보다 흰색의 벽과 천장, 마루와 천장의 목재 등 흑백의 조화와 독특한 주렴 글씨들이 눈에 더 들어온다.

 

<강수재 끝에서 본 동쪽에서 본 비각들과 협문>

 

<무성서원 강수재(기숙사) 뒷면>

 

<무성서원 강수재 뒷면의 '흥학재병건비(興學齋㔙建碑)'>

흥학재는 서쪽에 있던 기숙사였으므로 그와 관련된 내용일 것으로 추측된다. 뒷면에는 '㔙設義助員'과 사람들 이름이  새겨져 있다. 

 

<무성서원 강수재 앞 마당의 비각과 丙午창의기적비>

 

<무성서원 강수재 앞 진사최영대 영세불망비>

 

<무성서원 강수재 앞 정문술중수의조비>

 

<무성서원 강수재 앞  丙午倡義紀蹟碑(병오창의기적비)>

1905년 일제에 의해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듬해인 1906년 6월 13일 면암 최익현, 둔헌 임병찬의 주도로 무성서원에서 호남 최초로 의병이 일어난 역사적 현장을 기념하기 위해 1992년에 세운 것이다.

 

<무성서원 서쪽의 신용희, 서호순불망비>

무성서원 내에는 이곳에 2개, 강수재 앞에 2개의 비각이 있다. 앞쪽은 신용희불망비, 뒷쪽은 서호순불망비이다.

 

<무성서원 서쪽의 신용희불망비>

1925년에 세웠으며 '통정대부 전비서감승 신용희불망비'라 새겨져 있다. 

 

<무성서원 서쪽의 서호순불망비>

철종 즉위년에 세웠으며 '현감 서호순불망비'라 새겨져 있다. 1828년 태인현감이었던 서호순이 강당을 현재의 모습으로 중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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