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덕수궁(德壽宮)

큰누리 2026. 3. 5. 06:43

 

≪덕수궁(德壽宮)≫

덕수궁 터에는 월산대군(1454~1488)의 후손을 비롯한 왕족들과 고관들의 저택들이 있었다. 임진왜란(1592)으로 서울의 모든 궁궐이 불타 없어지자 선조는 이 집들을 수용하여 임시로 거처하는 행궁으로 사용하였다가, 광해군이 1611년에 재건한 창덕궁으로 옮기면서 별궁인 경운궁(慶運宮)이 되었다. 이후 19세기 중엽까지 궁궐로서 큰 역할이 없다가 1897년 고종이 황제로 즉위면서 경운궁을 대한제국의 으뜸 궁궐로 삼았고, 많은 전각들을 새로 세워 궁궐의 격식을  갖추어 나갔다. 또한 근대화를 향한 고종의 의지에 따라 궁 안에 여러 서양식 건물들을 세웠다. 그러나 1880년대 정릉동 일대는 각국 외교사절의 공관과 선교사들의 주택이 밀집되어 있어서 경운궁의 궁역을 확장하기 어려웠다. 결국 기존의 미국·영국·러시아 영사관 사이로 궁역을 확장하다 보니 대지의 모양의 불규칙하게 되었다. 

1907년에 고종이 퇴위하면서 선황제의 거처가 되어 궁의 이름을 덕수궁으로 바꾸었으며, 태평로를 확장하면서 궁역이 축소되었다. 고종이 승하한 후에는 북쪽 선원전과 서쪽 중명전 일대도 매각되어 원래 넓이의 1/3만 남게 되었다. 1933년에는 중심 부분과 몇 개의 양관(양관)만 남고 대부분의 전각들이 철거된 후에 공원으로 조성되어 일반에게 개방되었다. 현재는 중심부인 중화전 일원과 정관헌 및 석조전과 같은 양관들이 남아있다. 덕수궁은 임진왜란과 구한말이라는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으뜸 궁궐로서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던 상징적 공간이었다. 또한 전통 규범 속에서 서양식 건축을 수용한 근대적 궁궐이며, 주변 상황의 공간적 맥락에 맞추어 조성한 도시적 궁궐이었다.

 

≪덕수궁(德壽宮)에 대한 나의 회고≫

고궁 중에서 60대 중반인 우리에게 덕수궁 만큼 친숙한 고궁이 있을까 싶다. 지금은 경복궁, 창덕궁이 고궁으로서 더 인기가 있지만 먹고 살기 바빴던 우리의 젊은 시절에는 고궁이 지금처럼 가까운 존재(!)가 아니라 평생에 몇 번 소풍이나 가족 나들이를 가는 특별한 곳이었다. 그나마 덕수궁은 시청역 바로 앞이라 접근성이 좋고, 거의 공원인데다 무료라서 가장 만만한(!) 고궁 아닌 고궁이었다. 지금은 입장료도 있고, 많이 정비가 되어서 고궁이라는 것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정도가 되었고, 작년 말(2025.11)에 답사차 들렀을 때에는 선원전 터까지 확장해서 복원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워낙 도심이라 완전한 복원은 어렵겠지만 선원전 구역까지만 복원해도 황궁으로까지 격상되었던 구한말의 영광(!)을 조금이나마 되살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자주 드나들면서도 고궁으로 접근하지 않았던 탓에 경복궁이나 창덕궁 만큼도 몰랐다가 최근에 국립민속박물관의 궁궐 답사에 참여하면서 모든 궁궐들을 다시 보게 되었고, 특히 덕수궁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면서 황궁우나 환구단, 최근에 정비, 혹은 복원된 중명전과 돈덕전, 복원 중인 선원전 등을 묶어 덕수궁이란 곳을 다시 돌아보니 너무 많이 훼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것보다 상당한 규모와 격식을 갖춘 궁궐(황궁)이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덕수궁 대한문(大漢門)과 앞 계단의 장식>

대한문(大漢門)의 본래 이름은 대안문(大安門)이었는데 1906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원래 궁궐의 정문은 남쪽(현재의 서울특별시의회 별관 맞은편)의 인화문(仁化門)이었는데, 환구단 건립 등으로 경운궁의 동쪽이 새로운 도심이 되자 동문이었던 대안문을 정문으로 삼았다. 1970년에 태평로를 확장하면서 서쪽인 현재의 위치로 물러나 앉게 되었다. 

 

<덕수궁 금천교>

대한문을 지나 건너는 금천교는 1986년에 발굴, 정비한 것이다. 이 다리를 건너 중화문 앞에 이르는 길이 궁궐의 중심 행차로였다. 

 

<덕수궁 홈페이지에 게재된 덕수궁 안내도>

 

<경운궁(덕수궁)의 원래 구역과 현재의 덕수궁>

1880년대 정릉동 일대는 각국 외교사절의 공관과 선교사들의 주택이 밀집되어 있어서 경운궁의 궁역을 확장하기 어려웠다. 결국 기존의 미국·영국·러시아 영사관 사이로 궁역을 확장하다 보니 대지의 모양의 불규칙하게 되었다. 위, 아래의 옥색 구역을 포함한 면적이 구한말의 경운궁(덕수궁)이었다. 1907년에 고종이 퇴위하면서 선황제의 거처가 되어 궁의 이름을 덕수궁으로 바꾸었다. 일제강점기에 태평로를 확장하면서 궁역이 축소되었고, 고종이 승하한 후에는 북쪽 선원전과 서쪽 중명전 일대도 매각되어 원래 넓이의 1/3만 남게 되었다.

 

<덕수궁 광명문과 함녕전 출입문>

광명문은 함녕전 앞에 있으며, 현재 외톨이처럼 문만 달랑 남아있다.

 

<덕수궁 함녕전(右) 앞에서 본 중명전(左), 덕홍전(중앙)>

 

<덕수궁 함녕전(咸寧殿)>

함녕전(咸寧殿)은 고종이 거처하던 (경복궁의 강녕전과 같은) 침전으로 1919년에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1904년에 화재로 소실되어 다시 지었다. 대청마루 양 옆으로 온돌방을 들였고, 사방 툇간에 방을 두른 전형적인 침전 건물이다. 함녕전 뒤편에는 계단식 정원을 꾸몄고, 전돌로 만든 유현문(惟賢門)과 장식적인 굴뚝들을 설치했다.

 

<덕수궁 덕홍전(德弘殿)>

덕홍전(德弘殿)은위 관료와 외교 사절을 접견하던 곳으로, 1911년에 건립한 전통양식의 건물이지만 내부는 천장에 샹들리에를 설치하여 동, 서양풍으로 장식했다.

 

<덕수궁 함녕전, 덕홍전 옆 담장>

왼쪽은 침전인 함녕전, 중앙은 덕홍전이다. 사진 오른쪽 밖에 중명전이 뒤에 석어당이 있다. 침전을 둘러싼 담장이라 아기자기하다.

 

<덕수궁 정관헌(靜觀軒)과 전통 문양 장식>

정관헌(靜觀軒)은 1900년경 고종의 침소인 함녕전 후원에 지어진 동양과 서양의 건축양식이 절충된 독특한 건물이다. 건물의 동·서·남 세 방향에 지붕이 돌출된 Porch 형태로 나무 기둥과 금속 난간이 세워져 있다. 기둥 윗부분과 난간에는 모란과 박쥐, 소나무, 사슴 등 전통 문양이 새겨져 있다. 이곳에 역대 왕의 어진을 모셔두기도 했고, 고종의 어진과 순종의 황태자 시절 초상화인 예진을 그리던 공간으로 쓰이기도 했다.

 

<덕수궁 즉조당(卽阼堂) 일원의 석어당(昔御堂)과 내부>

즉조당 일원은 선조가 거처했던 전각들을 보존한 곳이다. 즉조당(卽阼堂)은 광해군과 인조가 왕위에 오른 곳이고, 석어당(昔御堂)은 선조가 거처하다 승하한 건물이다. 1610년(광해군 2) 임진왜란으로 불탄 궁궐 중 창덕궁을 처음으로 재건하여 이어한 후 1623년에 대부분의 전각과 땅을 원주인에게 돌려주었으나, 석어당과 즉조당 두 건물은 보존하여 경운궁의 상징으로 삼았다. 석어당(昔御堂)은 현존하는 유일한 목조 2층 건물로 단청을 입히지 않아 소박한 살림집 같다.  

 

<덕수궁 즉조당(卽阼堂) 일원>

왼쪽은 준명당(浚明堂), 중앙은 즉조당(卽阼堂), 오른쪽의 단청을 칠하지 않은 건물은 석어당(昔御堂)이다. 현재의 세 건물은 1904년의 경운궁 대화재 때 불탄 것을 같은 해에 다시 지은 것이다.

 

<덕수궁 준명당(浚明堂)과 즉조당(卽阼堂)>

왼쪽 끝은 석조전, 왼쪽은 준명당(浚明堂), 오른쪽은 즉조당(卽阼堂)이다. 

 

<덕수궁 즉조당(卽阼堂)과 준명당 연결 복도>

즉조당(卽阼堂)은 선조 뒤를 이은 광해군과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가 이곳에서 즉위식을 올렸다. 아래는 즉조당 중앙의 대청마루(왼쪽), 즉조당과 준명당을 연결하는 복도이다. 아래에 아궁이가 잘 남아있다. 

 

<준명당 연결 복도와 즉조당(卽阼堂), 석어당(昔御堂)>

 

<덕수궁 준명당(浚明堂)과 덕혜옹주를 위한 안전펜스 구멍>

준명당(浚明堂)은 고종이 업무를 보던 편전이며 즉조당과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계단 위 난간에는 어린 덕혜옹주를 위해 안전 펜스를 설치한 구멍이 남아있다. 

 

<덕수궁 석조전(石造殿) 일원>

사진의 석조전(石造殿)은 고종이 침전 겸 편전으로 사용하려고 지은 서양식 석조건물로, 영국인 건축가 하딩(J.R. Harding)이 설계하여 1910년에 완공하였으나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로 실제 용도로 사용하지 못했다. 기단 위에 이오니아식 기둥을  줄지어 세우고, 중앙에 삼각형의 박공지붕을 얹은 19세기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었다. 건물의 전면과 동서 양면에 베란다를 설치한 것이 특징으로 일제강점기에 미술관으로 사용했다.

 

<덕수궁 석조전 앞의 앙부일구(仰釜日晷, 보물) 복제품>

 

<덕수궁 석조전(石造殿) 서관(덕수궁미술관)> 

덕수궁 석조전 서관(덕수궁미술관)은 1938년에 일제가 미술관 용도로 지었으며, 그 앞에 서양식 분수정원을 조성했다. 서관은 의석조(儗石造)로 지은 몸체 중앙에 코린트식 기둥의 현관을 덧붙인 모습이다.

 

<덕수궁 중화전 앞의 드무>

위의 물건(!)도 드무로 묶긴 했지만 드무인지 확실치 않다. 그 뒤에 두 번째 사진처럼 화로 같은 형태의 드무가 또 있다.

 

≪덕수궁 중화전(中和殿)≫

덕수궁 중화전(中和殿)과 그 앞마당은 왕의 즉위식, 조례, 외국 사신 접견 등 중요한 국가 행사를 치르는 상징적인 공간이다. 중화전 앞에는 2단으로 된 월대가 있고, 마당에는 넓적한 돌을 깔았으며, 벼슬의 등급을 나타내는 품계석과 임금이 다니는 어도(御道)를 설치하는 등 전통 궁궐의 격식을 갖추었다. 1902년에 임시 정전으로 쓰던 즉조당 남쪽에 행각을 두르고 중화전을 지어 궁궐의 중심 영역으로 삼았다. 중화전은 원래 중층 건물이었으나, 1904년에 큰 화재가 나서 건물들이 모두 불에 탔다. 이에 1906년에 단층으로 규모를 줄여 다시 세운 것이 지금의 중화전이다. 중화문과 행각도 다시 세웠는데, 현재 행각은 동남쪽 모퉁이의 일부만 남아 있다.

 

<덕수궁 중화전(中和殿), 월대와 어도>

 

<덕수궁 중화전(中和殿) 어도의 귀여운 석수상>

근대에 지어진 궁궐 관련 석물, 특히 계단 난간이나 다리 등의 석수들은 통통하면서도 귀여운 공통점이 있다. 덕수궁, 환구단, 기년전 등의 석수상이 그렇다. 

 

<덕수궁 중화전(中和殿)에서 본 중화문>

고종이 황궁으로 처음 덕수궁(당시 명칭은 경운궁)을 지었을 당시에는 중화문 앞에 남문인 인화문(仁化門)이 있고, 인화문이 정문이었다. 하지만 경운궁 남쪽은 이미 들어선 외국 공관들 때문에 공간이 비좁은데다 궁궐 동쪽이 중심이 되면서 인화문은 사라지고, 동문인 대한문(당시의 대안문)이 정문이 되었다. 

 

≪궁궐 정전의 구조물과 상징≫

궁궐의 정전 내부에는 집 속의 집이라는 의미의 '닫집'이 있는데 그 안에 왕이 앉는 어좌가 있으며, 그 뒤로 '세 번 꺾인다'하여 '삼절곡병'이라고 불리는 병풍이 있고, 맨 뒤에는 왕을 상징하는 '일월오악도'가 있다. '오악(五嶽)'이란 우리나라 오방위의 중요한 산들, 즉 전 국토를 의미하고, 태양과 달, 소나무 등은 천계, 지계, 생물계를 나타낸다. 이는 왕의 권한이 미치는 모든 곳과 모든 것들이 왕의 아래에서 자손만대로 번창하라는 의미가 있으며, 더불어 왕실의 무궁한 번영과 번창을 기원하는 것이다. 중화전 어좌 바로 위에는 왕을 상징하는 용이 있다.

 

<덕수궁 중화전(中和殿) 현판>

 

<덕수궁 중화전(中和殿)의 어좌와 천장의 용 한쌍>

노란색은 황궁을 상징하고, 중앙의 어좌는 삼절병풍, 일월오봉도 순으로 배치되어 있다. 중화전 어좌 위의 용 한 쌍은 다른 궁궐 정전에 있는 용과 같은 모양으로, 덕수궁이 대한제국의 황궁이었음을 보여준다.

 

<덕수궁 중화문(中和門)과 중화전 행각>

1902년 덕수궁 정전인 중화전을 건립했을 때 중화전은 128칸의 행각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1904년 덕수궁의 대화재로 중화전을 비롯한 많은 전각들이 불에 탄 후 건물을 다시 지으면서 행각도 108칸의 규모로 다시 지었다. 11910년 국권을 상실한 후 일제강점기에 덕수궁 내 여러  전각들이 훼손되었는데, 중화전 행각도 이때 대부분 철거된 것으로 보인다. 현존하는 행각은 1905년 중건된 사진 오른쪽의 동남쪽 행각뿐이다.  

 

<덕수궁 돈덕전(惇德殿)>

돈덕전(惇德殿)은 고종 즉위 40주년(1902) 기념 칭경예식의 서양식 연회를 위해 신축한 건물이다. 고종은 칭경예식을 국제행사로 성대하게 거행하여 서구 열강을 대상으로 대한제국의 위상을 높이고, 아울러 중립국가 승인을 요청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시도는 콜레라의 창궐과 러일전쟁의 시작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화려한 유럽풍 외관의 벽돌로 지어진 돈덕전은 1층은 폐현실, 2층은 침실이었으며, 각국 외교사절의 폐현 및 연회장, 국빈급 외국인의 숙소로 사용하였다. 또한 순종의 즉위식과 고종의 생신을 축하하기 위한 오찬 장소로도 사용되었다. 돈덕전은 고종 승하 후 방치되었다가 덕수궁 권역이 점차 축소되고 공원화되기 시작하면서 1933년 이전에 훼철된 것으로 보인다. 2017년 문화재청에 의해 발굴조사, 재건 공사가 이루어져 2023년 9월 26일에 공식 개관되었다. 아기자기하면서도 화려해서 유난히 눈에 띄는 건물이다. 

 

<덕수궁 돈덕전(惇德殿) 복도>

 

<덕수궁 돈덕전(惇德殿) 1층 방과 유리로 덮어 공개 중인 지하>